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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9/27 00:19:37
Name 웃다.
Subject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송유미



밥공기들을 하나 하나 ‘퐁퐁’을 묻혀 닦아내다가
문득 씻지도 않고 쓰는 마음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먹기 위해 쓰이는 그릇이나 살기 위해 먹는 마음이나
한 번 쓰고 나면 씻어두어야
다음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이라 싶었다
그러나 물만 마시고도 씻어두는 유리컵만도 못한 내 마음은
더럽혀지고 때묻어 무엇 하나 담을 수가 없다
금이 가고 얼룩진 영혼의 슬픈 그릇이여,
깨어지고 이가 빠져 쓸 데가 없는 듯한 그릇을 골라내면서
마음도 이와 같이 가려낼 것은 가려내서
담아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누룽지가 붙어서 좀처럼 씻어지지 않는 솥을 씻는다
미움이 마음에 눌어붙으면
이처럼 닦아내기 어려울까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는 주전자를 보면서
씻으면 씻을수록 반짝이는 찻잔을 보면서
영혼도 이와 같이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일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릇은 한 번만 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뼈속까지 씻으려 들면서
세상을 수십 년을 살면서도
마음 한 번 비우지 못해
청정히 흐르는 물을 보아도
때묻은 情을 씻을 수가 없구나
남의 티는 그리도 잘 보면서도
제 가슴 하나 헹구지도 못하면서
오늘도 아침 저녁을 종종걸음치며
죄 없는 냄비의 얼굴만 닦고 있는 것이다



몇 일 있으면 부대 복귀입니다. 더 이상 부대 복귀로 인한 스트레스를 강요 받지
않을 시기입니다. 1년 전만해도 '휴가'는 '휴가'가 아닌 '도피'의 의미가 강했지만
지금 제가 받은 14박 15일은 일에 지쳐 잠시 쉬기 위한 '휴가'를 받아 집에서 편히
쉬고 있습니다.

일찍 군대를 간 덕에 지금 사회에 있는 친구는 별로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대부분 자기 일에 치여 저를 돌아볼 시간은 예전만큼 되지 않더라구요.

군 복무를 하면서 제가 흘린 짬밥만큼 닦은게 냄비와 식기류들입니다.
휴가를 보내며 이 책 저 책 읽고, 이런 저런 것들 구경하다 보니 정말 마음에
와닿게 되는 시입니다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칭찬 받으려고 하는데 우리 자식 놈들 칭찬 받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말이 제 가슴 속의 심장에 큐대가 꽂혀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어지럽게 흘러온 하루 하루가 후회스럽지는 않았지만
지금와서 내 앞길에 험난한 장애물이 되어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조금 더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이었는데.. 내가 무슨 생각으로
방독면쓰고 완전군장 매고 뛰어 댕길 길로 만들었나 싶습니다.

젊은 나이. 이번에 생일을 맞아. 설악산에 올라갔습니다. 산악회 사람들을 따라
새벽 2시에 올라가 대청봉에서 일출을 보고 공룡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코스를..
밟기로 했는데 새벽부터 비가 내리더군요. 더불어 가져간 랜턴이 고장 났습니다
다마의 접촉 불량이었죠. 일행과는 당연히 멀어졌고 저는 랜턴 없이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비오는 날. 랜턴없이 야간산행. 미친 짓이었습니다.
다시는 해서는 안될 짓이었습니다.

다른 산악회 분들이 하산하라고 권유했지만 저는 저의 생명력을 믿어보기로
하고 어둠이 눈에 익고 감각이 꽃이 피울 것이라 믿고 무작정 올라갔습니다.
등산화라고 신고간 것이 미끄럽더군요. 오르막은 랜턴없이 어느정도 올라가봄직하지만
내리막은 전혀 불가했습니다. 완전 네 발로 기어댕겼습니다.

두 어번은 길을 잘못 들어 모르는 길을 헤매다녔고 낭떠러지에 떨어질 뻔 했으며
미끄러운 돌에서 허공답보를 수차례... 멀어져간 일행들을 잡아보겠단 생각으로.
쉬지 않고 올라가던 중에 너무 배고파 앉아서 밥 먹은 곳. 그 곳은 대청봉이었습니다.
미친듯이 배가 고파 처음으로 물을 마시고 배를 채우던 곳이 대청봉이었을 줄은 꿈에
도 생각 못했습니다. 안개가 자욱히 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초보 산행자에게 주위를 둘러본 여유는 없었습니다. 밥을 먹고 제 뒤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는데 사진을 찍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고 이 곳이 대청봉이란
것을 깨닫고 셀카를 막 찍고 대피소로 몸을 옮겼습니다.

계속해서 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다가 설악산이 멋진 걸 보여주더라구요.
10분 동안 동해쪽에서 바람이 불어 구름이 살짝 걷히면서 보이는 설악산의 자태와
잠깐동안 내 눈앞에 생긴 거대한 무지개가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변하지 않는 것을 찾고 싶습니다. 제가 봤던 무지개 처럼.
제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마음. 무엇을 주던지, 받던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것이 정말 진심이었고 변하지 않느냐.

그리고 제 꿈. 그 것이 진심이었고 변하지 않느냐

찾고 싶습니다. 그리고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젊어서 그런지
눈으로 꼭 보고 믿고 싶습니다.

제 냄비가 반짝이는 날을

PS. 가을이 참 아름답게 찾아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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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츠처럼★
05/09/27 00:56
수정 아이콘
시도 좋고 글도 좋네요.
글쓴이님의 도전과 노력은 그것을 반짝이게 할것 같네요. ^^

'남의 티는 그리도 잘 보면서도
제 가슴 하나 헹구지도 못하면서
오늘도 아침 저녁을 종종걸음치며
죄 없는 냄비의 얼굴만 닦고 있는 것이다'-제 마음에 많이 와닿네요

행복하세요^^ 군대생활 열심히 건강히 하세요
빤짝이
05/10/01 17:43
수정 아이콘
오랫만에 여유있게 둘러보다가 제목때문에 클릭을 했네요.
몇년 전.. 제가 고등학생일 때, 그리고 대학 샌입생일 때 자주 들여다보던 시지요. 책 제목이 지금 기억이 안나는데, 여러 시들이 중간 중간에 나오던 소설이었던것 같습니다.(혹시 책 제목이 뭔지... 자취하는데 그때 읽었던 책들은 집에 있는지라.. ^^; ) 덕분에 정말 오랫만에 다시 보게됐네요.
마음도 냄비닦듯이 열심히 닦고 닦아서 윤기가 나게 해야지라고 다시 생각합니다. ^^
다만 오래 오래 써온 손때 묻은 냄비에 세월의 흔적과 함께 지나온 시간이 묻어나듯이, 우리 마음속에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게 되지 않을까.. 가끔은 여기 저기서 마음의 상처를 받아서 찢기고 할퀴어진 부분들도 있겠지만 잘 닦으면 그것들까지 함께 빛이 나고 이뻐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때묻는 것이 두려워서 냄비를 쓰지도 않을 모셔둘 수는 없잖아요.
이미 부대 복귀하셨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남은 군생활 건강히 마치세요. 그리고 행복하시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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