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피드백을 반영해서 텍스트 분량을 조금 늘려봤습니다
사진도 핵심 이미지 이외에는 중복 사용을 가능한 피했구요
그런데 텍스트 분량을 약간 늘린 것에 불과한데 게임하는 시간보다 글쓰는 시간이 더 많아지는 기이한 현상 ㅡ.ㅡ;;
상황봐서 점진적으로 늘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할게요
----------------------------------------------------
VIDEO 브금입니다 틀고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
착취와 약탈밖에 모르던 탐욕적인
귀족과 성직자들을
쓸어버린 농민들은
풍요로운 빵과 식량이 민중에게 돌아오리라 믿었지만
끝없는 굶주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혁명당국은 국민들에게 빵 부족현상은 더 심해질 것이라고 통보했다. 1792년 전 유럽을 상대로 한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모든 빵의 공급선은 프랑스 군대에서 장악했다. 병사들은 잘 먹어야 했다. 귀족주의자들의 무서운 음모로부터 혁명을 보호할 사람은 바로 용맹한 병사들이니 말이다.' - 하인리히 E 야콥의 빵의 역사
이러한 치명적인 굶주림은 시민들을
극도의 광기로 몰아넣기 시작했고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지 못한
혁명 프랑스는 거대한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을묘(乙卯)년의 동아시아
대명(大明) 제국의 헤게모니를 박살낸
개성 공화국은
노골적인 만주 진출의 야욕을 드러내며
만주 평야의 대부분을 집어삼키는데 성공하게 되지만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지고야 맙니다
그것은 바로 함경도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농민 봉기였지요
함경도의 농민들이 외칩니다
탐욕적인 개성 상인들과 서학자들은 들어라
너희들이 말하길
무능한 조선왕조와 탐욕적인 사대부들을 심판하면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배부르게 잘 살 수 있다고 하질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들이 말한
흰 쌀밥에 고깃국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이냐?
너희 상인들이 벌인 전쟁으로
우리는 하루하루 고통 속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굶주림 속에 죽어가야만 했던
우리네 아들 딸들
자식이 굶주려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비통한 울분
이것이 너희들이 말한
만민평등의 낙원이더냐?
너희들이 탐욕스러운 조선 왕조와 다를 바가 무엇이냐?
우리에게 쌀을 달라
우리에게 쌀을 달라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대대적인 농민 봉기에
놀란 대행수 유숙은 만주 정벌군을 재빨리
정비해 함경도로 급파하기 시작하고
폭발 직전의 대혼란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 가에 대해 심각하게 숙고하기 시작합니다
만주 진출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얻은 정만론자들은
농민 봉기를 강압적으로 진압해
북벌을 계속해야 한다는 강론을 펼치게 되지만
대행수 유숙은 이들의 의견을 물리치며
개성 공화국의 세금을 대폭 낮추고
군량을 풀어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로 결심합니다
함경도민의 폭동을 끝내 무력으로 진압할 수 밖에 없던
대행수 유숙은 큰 자괴감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중화(中華)라는 괴물로부터
개성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 이를 악물고 싸워왔건만
이러한 판단이 약간의 희생이 아니라 너무나도 크나큰 고통을
치뤄야만 했다는 것을 뒤늦게 나마 깨달았던 것이죠
정복된 여진족들도 호시탐탐 반란의 기회를 노리는 불안정한 정국으로
대행수 유숙은 공화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숨을 죽이며 정세를 살피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개성이 숨을 죽이고 있는 동안
새로운 명나라의 황제 주공탕이
성인이 되어 즉위식을 가졌다는 소식이 들려오게 되고
결국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야 맙니다
만주 독립운동가들이 개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죠
이어지는 봉기에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개성군은 만주 독립 운동가들을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진압하게 되고
개성의 사택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곱씹으며
후회의 쓴 맛을 다시던 대행수 유숙은 심장마비로
쓸쓸이 사망하게 됩니다
유숙의 사망 이후 열린 선거에서는 서학자인 채목이 당선되게 되고
이는 무리한 혁명 전쟁과 과도한 전쟁세로 민심을 잃은
정만론자들이 떠안아야만 하는 시대의 흐름이기도 했죠
전쟁을 원치 않는 개성인들의 시대정신이 선택한
서학자 채목
새로이 당선된 대행수 채목은
개성인들의 굶주림과
다시금 만주로 손아귀를 뻗어오는
대명(大明) 제국의 견제라는
힘겨운 과업을 짊어지게 되었죠
신(新) 고을 운동을 통해
피폐화된 국토를 회복하고
농촌의 근대화를 꾀하기 시작한 대행수 채목은
새로이 공화국에 편입된
여진족에게 본격적인 천주교 전도를 시작함으로써
국가의 기틀을 단단히 다져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대행수 채목의 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가져오게 되고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던 개성 공화국은
서서히 안정기로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서서히 기반을 다져가는 개성 공화국에
한 가지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영변 교구의 주교 김을서 미카엘이
여진족에게 체계적인 전도를 위해
성경을 개성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크나큰 논란이 빚어진 것이었죠
서방 총 대주교 바오로 5세는 성경의 번역을 이단적 행위라
금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대행수 채목은 크나큰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반 서구주의를 그 근본 바탕으로
국가의 비전을 설계한 개성 공화국으로써
이러한 논란의 점화는 서방 세계로부터 종교를 분리하기 위한
매우 좋은 사건이었지만
아직 전란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종교 개혁을 했다가는
또다른 분쟁이 개성 공화국을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일
또한 비율빈(比律賓) 섬을 식민지로 차지하고 있는 서반아( 西班牙 )는 천주교 세계의 수호자로써 종교 개혁을 감행하는 개성 공화국에게 어떤 해꼬지를 할지도 모르는 상황... 대행수 채목의 번뇌는 점차 깊어만 가기 시작합니다 끝없는 갈등을 반복하던 대행수 채목은
김을서 주교의 59개조 반박문이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 끝에
결단을 세우게 되고
개성 공화국의 모든 천주교 신자를
경악시킬 파격적인 개혁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개성 공화국의 최고 지도자 대행수가
동아(東亞) 총 대주교로서
종교 지도자의 역활을 동시에 겸임하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죠
동아정교회(東亞正敎會)의 출현은
개성 공화국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 넣었습니다
공화국의 세속 지배자가 영적인 역활을 주관하는
종교 지도자로서의 역활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이러한 혼란은 마치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가
성공회를 등장시키며
스스로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상황과 매우 유사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전쟁과 만주진출의 성공으로
새로이 동아(東亞)의 용으로 떠오른 개성 공화국은
크나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 차례 터진 농민 봉기와 이민족의 반란은
대행수로 하여금
국가를 하나로 묶어줄 구심점의 출현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결론 끝에 나온 것이
바로 개성 공화국의 대행수이자
동아(東亞) 총 대주교가 다스리는
동아(東亞) 정교회의 출현이었지요
이러한 동아(東亞) 정교회의 개혁에 큰 힘을 실어준 것은
바로 노서아(
露西亞 )의 몽골 침략이었습니다
서구 열강이 언젠가 동아(東亞) 세계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언을 단순한 선동선전으로 여기던 일부 개성인들은
몽노 전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서구 열강들의 동아(東亞) 침략을
몸서리치게 깨닫게 되었고
이러한 서구 열강들이 자신들의 정신을 지배하게 놔둘 수 없던 탓에
울며 겨자먹기로 이러한 교회 개혁에 찬동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그러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정치적 행보였습니다
동아 총 대주교이자 대행수 채목은
교회 개혁에 더불어 은근슬쩍
종신 집권을 시도하려 했고
이는 만민평등 개성 공화국의 이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였죠
조선 왕조의 폭정에 치를 떨던 개성인들은
이러한 채목의 시도에 벌 떼같이 반박하기 시작하고
대행수 채목은 이런 여론의 압박에 종신 집권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한반도는 마침내 동아(東亞) 정교회로의 편입을 모두 끝마치게 되고
만주사변(滿洲事變) 이후
15년 동안 웅크리며 힘을 회복한 개성 공화국은
못다한 북만주의 정벌을 위해 다시금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내게 되고
대대적인 만주 진출이 다시금 시작되고야 맙니다
----------------------------------------------------------
항상 애독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감사하구요
반응 좋으면 계속 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