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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1/05 12:35:11
Name 플레스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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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콘솔] [스포, 장문]디스코 엘리시움 완전 비판적 평론 (수정됨)




게임 게시판에 저와 비슷하게 디스코 엘리시움을 평가하신 리뷰가 올라왔길래, 여러 시각을 비교해 보시라고 저의 리뷰글도 올려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며 제가 과거 나무위키에 기여했던 서술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임을 접해보시지 않으신 분은,

https://pgr21.net../free2/73385 요 리뷰글을 읽으시고 어떤 게임인지 파악해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장문이니 여유가 있으실 때 읽어주세요.

참고로 이 평론글 정도는 쭉쭉 읽어내려가야 디스코 엘리시움을 원활하게 할 수 있습니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이 글보다 훨씬 빽빽한 텍스트가 게임 내내 폭풍같이 몰아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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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디스코 엘리시움은 어떤 게임인가

스토리 : 기억을 잃은 형사가 술에 떡이 된 채로 호텔방에서 일어난다. 형사는 자신이 노조와 기업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중이라는 것을 알게됨. 형사는 사건과 자신의 기억을 추적하고 자기 인생이 겁나 최악으로 꼬여있다는 사실을 속속 발견하게 된다. 수사물, 초현실, 심리 사이코드라마가 마구 뒤섞이며 복합적인 이야기가 진행됨.

배경 : 공산주의 혁명정부가 패배하고 연합이라는 외부 세력에 의해 식민지화된 레바숄을 배경으로 한다. 레바숄의 낙후된 항구지역 마르티네즈가 주 무대다. 게임 전체에 현실을 연상케 하는 정치적 서브텍스트가 넘칠 정도로 풍부하다. 공산주의, 파시즘, 자유주의, PC, 페미니즘, 인종차별... 우리 현실에도 있는 온갖 골치아픈 것들이 다 있음. 레바숄이라는 국가의 체제와 역사에 대한 텍스트가 마구 쏟아진다.

게임 방식 : 발더스 게이트,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와 흡사한 아이소메트릭 시점으로 진행되는 RPG 게임이다. 주사위 굴림과 선택지의 선택을 통해 진행한다.

주인공의 논리, 감정, 신체, 운동의 4영역의 다양한 인격들을 24가지 스킬으로 구현한 점이 매우 독창적이다. 기존 RPG 시스템에서 스킬은 은신, 도둑질 같은 기술적 영역이었던 반면, 디스코 엘리시움에서는 24가지 인격들을 통해 난관을 돌파한다. 거짓말을 해야되는 상황의 실패 성공 판정을 연극이라는 인격스탯을 통해 수행하는 식이다.

이 스탯과 스킬들은 단순한 수치적 측면에서 그치지 않는다. 스킬들이 주인공의 뇌내에서 말을 걸어대며 저마다 개성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다. 권위 스킬은 꼰대스러운 선택을 종용하고, 의욕 스킬은 눈 앞의 문제를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의지가 충만한 개념아이다. 또 연극 스킬은 매 순간 충동적인 또라이짓을 하며 재미를 추구하고 백과사전 스킬은 나무위키 스러운 쓸모없는 지식은 풍부하나 현 상황에서 핵심적인 정보는 절대 주지 않는 등 매우 재미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에서는 이처럼 스킬의 탈을 쓴 인격 캐릭터들이 게임의 중요한 선택에서 마구 끼어들며 힌트와 함정을 분별없이 던져댄다. 스킬들의 조언을 항상 믿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논리 인격은 대부분의 수사 상황에서 유용한 분석을 제시하나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찐따같은 트롤링을 일삼기도 한3다.


1.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

디스코 엘리시움은 RPG 팬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는 작품이나, 선택과 결과를 잘 보여주는 훌륭한 RPG 게임이라는 호평과 함께 일방향식 이야기를 보여주는 인터랙티브 무비, 혹은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에 가깝다는 비판도 함께 공존합니다. 물론 후자라고 하여 작품의 질이 낮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장르적 표현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할 뿐 괜찮은 매체라는 부분은 인정하는 편이죠.

우선 호평측에서 게임을 보는 시각의 경우, 작품의 구성적 측면에서 이 게임은 2010년대 RPG 게임 최대 화두였던 선택과 결과(choice and consequence)라는 개념을 완벽하게 반영한 작품으로 평가합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플레이어가 설정한 주인공의 스킬, 즉 인격의 차이점과 플레이어의 선택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생동감 있고 방대하면서 매 회차가 차별화되는 훌륭한 게임 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즉 플레이어는 단회차로는 절대 게임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으며, 같은 게임을 플레이해도 사람마다, 회차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면 이 같은 주장에 반대하는 측, 그리고 저의 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게임에서 제공되는 선택과 결과는 기존 바이오웨어식 아이소메트릭 게임들과 유사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주석1] 디스코 엘리시움의 주요 이벤트는 모조리 고정된 결과를 보여주며 위 호평측의 관점과는 달리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똑같은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특히 중, 후반부는 게임이 JRPG식 강제 이벤트에 많이 의존합니다. 서쪽 지역이 3일차에 유저의 선택과 관계없이 강제 이벤트에 의해 열리는 것부터, 주요 용의자와의 대면, 핵심 클라이맥스 대립의 강제 이벤트식 진행 같은 것이 대표적 예이죠. 무슨 수를 써도 중요한 이벤트 발생의 선택여부나 해당 이벤트의 결과를 바꿀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 게임의 완성도를 떠나 게임의 본질적 특성은 정해진 스토리를 보여주는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인터랙티브 무비와 흡사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선택과 결과라는 개념을 완벽히 반영했다기엔 무리가 많으며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의미있는 부분이 딱히 많지 않습니다.

다만 주인공의 다양한 인격을 시스템화하여 주사위 굴림으로 전달하는 부분은 확실히 개성적인 부분입니다. 기존 게임에서 은신술, 자물쇠 풀기 같은 기술적 영역에만 머물렀던 스킬과 스탯이 캐릭터성 표현, 정신적 고뇌와 연동되어 이야기를 만든다는 부분은 공통적으로 호평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런 캐릭터 표현이 플레이어의 자기만족용 컨셉에서 그치고 플레이어의 선택대로 이야기를 바꾸지 못하며 게임적 문제 해결을 다채롭게 하지는 못한다는 점, 플레이어의 인격 표현 선택이 게임 내 세계와 엔딩 장면에 결과적으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입니다.

좋은 아이디어로 시스템을 만들어 놨는데, 게임성 or 게임 메커니즘 측면 에서 전혀 의미있게 쓰이지 못하는 거죠.

[주석1] 바이오웨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여러 선택지를 고르며 자기 뜻대로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 같지만 그건 모조리 눈속임에 가깝다. 명작으로 칭송받는 발더스 게이트 2의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해당 작품에서 플레이어는 고정된 이야기를 보게 되는데, 플레이어는 빌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해방되고, 여주인공의 납치 목격, 구출을 위해 뱀파이어나 쉐도우 시프와 협력, 스펠홀드 감옥 잠입이라는 고정된 이야기를 개발자의 의도대로 그대로 전달받게 된다. 선택지의 측면에서도 주요 줄기는 하나도 못바꾸는데 바이오웨어 게임에서 악역 RP를 하면 껄렁껄렁한 양아치 대사만 컨셉충식으로 칠 뿐 행동은 선역 캐릭터와 대부분 똑같이 하며 사건 진행도 똑같다. 발더스 게이트가 WRPG의 대표라는 국내의 인식과 다르게 이러한 구성은 JRPG의 근본에 가까운 것. 후기작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해결책이 여러개 주어진 서브 퀘스트에서 수행 방법만 좀 다르게 하는 정도.


2.1 RPG로서 비판받는 이유 - 무의미한 선택

디스코 엘리시움의 RPG적 측면에서 비판되는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택이 의미가 생기려면 선택에 따른 결과에 차이가 생겨야 합니다. 그래야 플레이어는 가지 않았던 길에 후회하고 다르게 행동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다시 되돌아가 보기도 하죠. 그리고 선역에서 악역으로 전환하는 식의 다른 성격의 역할 연기, 그에 따른 선택의 변화, 혹은 게임 진행방법의 변화를 통해 상당히 다른 이야기를 체험할 수도 있게 됩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선택의 차이라는 것도 '특정 용의자를 추궁, 체포와 석방 여부를 선택하지만 서사에는 큰 변화 없음. 아무거나 골라도 똑같음', '클라이맥스 대립이 벌어짐, 대화적 해결을 시도는 할 수 있지만 사실 의미 없고 강제 전투', '대립 종결 뒤의 전개는 동일' 같은 차이여서야 의미있는 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주석2] 이건 JRPG의 구색맞추기용 선택지에 불과합니다.

선택을 통해 교섭이나 싸움을 할지 말지, 싸움을 할 경우 어느 세력의 편을 들어줄지를 선택할 수 있어야 의미 있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선택지가 아무리 정교하고 창의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한들 뭘 골라도 사건의 결과가 같고 미세한 디테일만 바뀔 뿐이라면 선택은 의미를 잃습니다. 선택의 결과가 게임 내 세계에 큰 변동을 일으키고 그걸 플레이어가 체감할 수 있어야 의미있는 선택에 따른 의미있는 결과가 됩니다.[주석3]

그러나 디스코 엘리시움의 선택은 그렇게 의미있는 선택의 영역에는 이르지 못하는 편입니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서사는 대단히 선형적입니다. 사건의 해결방법도 거의 한 가지로 고정됩니다. 거시적인 측면이 아닌 스킬 선택 같은 미시적이고 자잘한 변화만 선택할 수 있죠. 결과도 무슨 선택지를 고르나 거의 동일합니다. 실패를 하면 그냥 거기서 끝이고, 성공하면 다음 지문으로 넘어가는 전형적 선형성이죠. 간혹 변화가 생기는 부분에서도 NPC 캐릭터가 죽는지 마는지를 결정하는 것 정도의 텔테일 어드벤쳐식 차이만 납니다. NPC가 죽어도 서사에는 별 변화가 없습니다. 타 NPC의 반응 대사 몇 가지만 달라질 뿐입니다.

게임의 진행루트 자체도 동북쪽의 호텔 근처 지구에서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는 식으로 모든 유저가 똑같이 진행하게 됩니다. 서쪽 판잣길 구역이 3일차에 강제로 해금되는 것은 그야말로 JRPG식 문법에 가깝습니다. 디테일한 대사나 서브퀘스트 수행 순서가 좀 다른거지 플레이어들이 경험하는 수사와 체포, 기억탐색 이야기는 똑같은 것입니다.

[주석2] 텔테일 게임즈의 게임이 이런 기만적 선택지 게임의 대표 격이다.

[주석3] 이 부분이 RPG의 패러독스다. 의미 있는 선택과 그에 따른 서사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스토리의 밀도가 높아지면 일직선형으로 고정된 선형적 서사가 강제된다. 반대로 비선형을 추구하게 되면 스토리의 밀도를 높일 수 없으며 많은 부분을 플레이어의 상상에 맡겨야 한다.

스토리를 중시하는 RPG나 인터랙티브 무비 게임을 만들때 선형적인 서사가 강제되는 것은 필연에 가깝다. 영화 같이 꽉 짜인 스토리를 표현하려고 하면 선택과 결과를 표방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상 기만일 뿐 실상 제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우선 플레이어가 수준 높은 정해진 스토리를 보게 하려면 자유로운 이동을 막아야 하는데, 플레이어가 아무데나 갈 수 있고 이벤트 발생 순서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면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따라서 JRPG식 지역 제한과 순차적 강제 이벤트라는 수를 쓰게 된다. 때문에 유저가 자유롭게 탐험하며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고, 일직선 루트를 따라가며 수동적으로 정해진 텍스트나 영상을 감상하던 도중에 제작자가 쥐어주는 선택지만 고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선택을 통해 결과가 크게 차이나게 되어 버리면 캐릭터의 대사부터 이야기의 전개, 캐릭터가 사건을 수행하는 공간이 모두 달라져 버린다. 필요한 개발력의 수준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가 버리는 것이다. 특히 성우 녹음과 3D 모델링을 해야 되는 경우라면 개발 코스트가 폭발하게 된다.

예를 들어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주인공이 진압군 용병세력의 편을 들어 파업 노동자들을 학살하는 전개, 혹은 양측의 대립을 오히려 조장하고 방관하는 전개, 노조 수뇌부를 제압하기 위해 암살이나 폭동을 일으킨다거나, 순수 공산주의 캐릭터의 사상에 감화되어 혁명을 일으키는 전개 같은걸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학살장면의 캐릭터 애니메이션부터 혁명과 관련된 맵의 제작, 여기에 따르는 무수한 각본 텍스트와 스크립트 이벤트를 작성하기 위한 코딩까지 만들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또 사건 후의 결과 이벤트도 모조리 다른 장소에서 새롭게 만들어야 할 것이며 각 루트별로 등장 NPC와 필수 전개 사건 같은 공통점이 완벽하게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 분기가 복잡해질수록 논리적 인과관계의 복잡도도 크게 증가하는 것이다.


2.2 RPG로서 비판받는 이유 - GOTY식 수동성

디스코 엘리시움의 다양한 선택지는 대부분 주변 NPC 반응보기용, 혹은 설정 텍스트 전달받기 정도에서 그칩니다. 주인공의 인격표현용 텍스트와 선택지가 풍부하나 표현에서 그칠 뿐 뭔가를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서사와는 상관없는 컨셉놀이에 불과한 것. 특히 플레이어가 아무리 공들여서 역할 연기를 하고 신경써서 주인공의 내면 인격 선택지를 고른다 한들 게임 내 세계 변화는 커녕 주인공의 심상마저도 거의 바꾸지 못하죠.

주인공의 인격적 각성은 플레이어의 선택이 아닌 고정된 각본에 100퍼센트 좌우됩니다. 대표적 예시로 종막에서 크립티드의 출현을 받아들이는 부분 (주인공은 희귀동물 탐사자들의 의뢰를 받아 대벌레라는 크립티드를 추적하게 됨. 희귀동물 탐사자들은 비현실적인 꿈을 쫒아 인생을 내버리는 이상주의자들)에서 주인공의 감정 표현은 플레이어의 선택과 분리된 채고 고정된 각성 스토리만을 내놓게 되거든요. 플레이어가 생각 캐비닛으로 알콜 중독을 막는 기능을 선택하고 게임 내에서 알콜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다거나, 공산주의나 파시즘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표현한다 한들 NPC의 반응대사 몇줄 말고는 결말이 전혀 바뀌는 것이 없고 주인공의 인격적 변화나 인생의 변화도 거의 표현되지 못합니다.

플레이어가 공산당스러운 선택지를 아무리 고른다한들 게임의 본질적인 서사와 사건 해결 과정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주인공이 심심하면 발작적으로 던져대는 우스개성 헛소리에 그칠 뿐이죠.[주석4] 캐릭터를 공산주의자로 표현할 경우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거나 수사 자체의 방향을 공산주의 용의자에 유리하게 바꾸고 특정인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운다거나 식으로 연관되는 서사가 하나도 없고 파트너 킴의 반응대사가 약간 달라질 뿐입니다.

다시 말해 본 게임의 선택지는 정해진 사건이 주어질 때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하는 수동적 리액션에서 그칩니다. 리액션은 차후의 캐릭터 해석과 연계되지 않는 단발적 상황극에서 끝나버리고요. 플레이어는 능동적으로 추리하여 사건 해결을 수행할 수 없으며 주어진 영화나 연극의 대본을 연기하는 배우 포지션인 것입니다. 연기의 악센트나 톤을 좀 바꿀 수 있는 거고 대사를 다양하게 칠 수 있는거지 정해진 줄거리는 그대로 연기해야 하지요.

게임적 문제 해결에서도 개발자가 A 퀘스트의 답안용 선택지를 1. 수사학, 2. 반응속도라고 설정해 놓았을 때 정해진 답 중 하나를 선택하고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면 정해진 결과를 보는 정도라는 점에서 기존 스킬 시스템과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존의 RPG처럼 플레이어가 먼저 능동적으로 쓰고 싶은 스킬을 사용한다거나, 스킬을 조합하거나, 자유롭게 지형을 돌파하거나 해서 창의적인 답안을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제작자가 1, 2, 3, 4 문항으로 박아놓은 선택지 중 두개 정도쯤 되는 권장답안만을 골라야 합니다. 즉 본작의 시스템은 주어진 선택지에서 해당 스탯과 연동되는 답안을 고르면 재미있는 인격표현이나 흥미로운 힌트가 나오게 되고 텍스트 감상에만 그칠 뿐이라는 것입니다.

서브퀘스트의 문제해결 창의성도 평범한 편이고 후반부로 갈수록, 주요 퀘스트일수록 문제해결방법이 하나로 강제됩니다. 해결책이 2 ~ 3개가 주어진다 한들 힘으로 철문을 뚫고 A 목적지로 가느냐, 관찰력으로 더 좋은 루트를 찾느냐, 교섭이나 탐색으로 열쇠를 찾아내느냐 식의 미세한 차이에 불과하지요. A 목적지로 가는 것 자체는 숙제마냥 반드시 하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문법을 따르는 WRPG였다면 게임이 정해준대로 A 목적지로 반드시 갈 필요가 없으며 A 목적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 등을 다른 B, C방법으로도 얻어낼 수 있는 식으로 거시적인 선택의 다양성이 제공되었을 것입니다. 기존의 정통파적 WRPG에서 게임의 진행방법, 접근방법을 완전히 다르게 가져갈 수 있는 반면 디스코 엘리시움은 일방향적 전개 속에서 난관에 사용되는 스킬만 좀 다르게 쓸 수 있는 것이죠. 즉 디스코 엘리시움의 문제해결 방법은 RPG식 추리와 선택을 통한 해결이라기보단 선택지 어드벤처 게임이나 게임북에 가까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본 게임의 인격형 스탯, 스킬 시스템이 독창적인 것만은 확실하고 차후에 큰 변화를 일으킬만한 포텐셜이 있다는 것에는 비판측과 옹호측이 공통적으로 동의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전 인격형 스킬 시스템이 포텐은 있을지언정 딱히 잘 쓰이지 못했다고 보지만요.

[주석4]

사실 게임의 무수한 정치적 지문이 풍부한 설정을 현학적으로 과시하는 것에 그치고 게임 스토리와 유기적으로 섞이지 못한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숨막히는 설정 텍스트를 끝없이 읊어대는 주입식 교육에 가깝다. 플레이어가 게임 내 주요 사건에서 정치적 대립을 몸에 와닿게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설정 텍스트만 난무하는 것. 특히 게임의 시대가 혁명이 끝나고 공산주의 집권기가 이미 역사시대로 사라져 버린 시점이라는 점이 뼈아프다.

전함 포템킨이나 레 미제라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같은 작품들은 작중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정치가 밀접하게 연관이 있고 생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주인공들의 선택과 정치적 신념이 매우 중요해진다. 예시의 작품들은 정치적인 사안을 다룸으로서 대단히 뜨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감상자의 가슴을 격동하게 한다.

그러나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정치는 주인공과 겉돌고 있으며 주인공의 수사, 그리고 기억 탐색 이야기와 시대적 모순, 정치적 혼란이 크게 연관이 없다. 본작에선 핵심 용의자 등장 후 그의 회한을 나타내는 장면에서 특유의 정서와 분위기 전달이 되긴 한다. 하지만 해당 인물이 사건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복선이나 단서, 기승전결적 고조가 거의 없는 것은 둘째치고 게임의 주요 서사에서 공산주의가 비판하는 시대적 모순을 잘 버무리지 못했기 때문에 뜬금없는 등장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노조와 기업측이 대립하거나, 게임 무대가 빈민가라거나, 도시에 내전이나 총살형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식의 배경이 존재하긴 하고 고유의 분위기 표현은 그럭저럭 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다 주인공과는 별 상관이 없고 설정으로서의 재미는 있을지언정 서사적 감흥은 약하다. 좀 특이한 스팀펑크풍 배경일 뿐이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 혹은 플레이어가 정을 붙이게 된 NPC가 내전의 비극 속에서 총살당하거나 구체제의 모순에 핍박당해 고통받는 것도 아니고 역사속의 사람들이 죽은 얘기를 들었다고 감정이 흔들릴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현실의 스페인 내전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어갔다는 정보를 습득한다고 저절로 슬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나마 파트너 킴이 인종차별을 당하기는 하는데 지나가는 대사 한줄일 뿐 게임이 그 소재로 서사적 감동을 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정치적 대립과 옛 비극들은 작중에서 르네 같은 NPC가 과거 이야기를 전해주는 식으로 말해주기로만 전달이 될 뿐 사건과 캐릭터로 전달이 안된다. 플레이어는 게임 내의 그 어떤 정치적 이슈에도 분노하거나 불합리를 느끼며 자신만의 신념을 세우기 어려우며 그냥 예전에 치열하게 싸웠나보다 정도로만 인식하게 되는 것. 현실역사와 유사한 사건들을 목도한 플레이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정치성향을 표현할 수는 있겠으나 게임을 통해 충격을 받거나 새로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게 아닌 것이다.

퀘스트와 정치를 엮는 과정에서도 '판잣길을 재개발하면 사람들이 내쫒기니 불쌍하다' 식으로 피상적, 상투적으로 다뤄지는 양상이 강하다. 대립하는 양측의 입장이 입체적으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으며, 플레이어가 세력 간 치열하게 대립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고민하며 한쪽에 진지하게 이입할 수 있게끔 드라마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저 퀘스트의 배경 정도로 기능적으로 다뤄질 뿐이다.

즉 레 미제라블처럼 주인공들의 삶과 정치가 밀접하게 닿아있는게 아니라 단지 특이한 배경 스토리에서 그치게 된다. 비슷한 예로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사 주인공이 민주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목숨을 걸어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전개와, 이미 군부세력이 몰락한 후 그럭저럭 먹고사는 평범한 변호사가 노조와 기업, 정부간의 대립을 중재하는 전개는 이야기의 힘이 크게 다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정치적 주장을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룬다 한들 주인공의 뼈에 사무치는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어찌 보면 본작의 접근법은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같이 나이가 들어버린 옛 혁명가들이 과거의 회한을 되새기는 식의 터치, 국문학의 '후일담 문학' 과 흡사하기도 하다. 그러나 주인공이 짓밟힌 이상, 퇴락한 현실에 좌절한 옛 혁명가 출신인 것도 아니니 역시나 배경설정과 주요 서사가 겉돈다.


3. 게임 클리어 소감과 대략적인 인상 평가

클리어 후 소감을 말하자면 좋은 게임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가치를 담은 유니크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RPG 코덱스니 뭐니 하는 꼰대들처럼 이건 RPG가 아니야라고 말하지도 않겠지만 아무래도 이 게임을 하면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같은 인터랙티브 무비로서의 즐거움을 많이 느꼈던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게임에 6~7점을 주겠지만 RPG로서 매기는 건 아니고 인터랙티브 무비, 인터랙티브 노벨로서 점수를 매기고 싶습니다. 작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엔딩까지 따라가볼만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게임이 딱히 발더스 게이트 류의 아이소메트릭 게임들에 비해 RPG로서의 측면이 심하게 약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발더스 게이트류의 스토리 전달방식이 기존 WRPG 작품들보다 비주얼 노벨에 가깝다는 부분이 있죠. 그래서 WRPG라고 해서 무조건 비선형적일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을 뿐더러 그 게임들에서 말하는 '선택과 결과'라느니 '당신이 만드는 이야기'라느니 하는 뻥을 믿지도 않습니다. 즉 애초에 요즘 게임의 비선형성을 높게 치지 않으니 RPG를 표방하건 말건 기대를 안 했다는 거죠.

시스템적으로 볼 때 디스코 엘리시움의 인격형 굴림 시스템은 확실히 독창적이고 뛰어났습니다. 굴림 하나하나에 긴장감이 있는 편이었고 인격스탯이 말을 거는 텍스트도 대체로 재미있으며 고민하는 맛을 줍니다. 물론 선택지를 고르고 나면 고민의 의미는 없다는 걸 알게 되지만요.

게임의 문제해결이 전부 선택지에 몰아넣어져 있다보니 RPG적인 문제해결이라기보다는 어드벤처 게임의 성격에 가깝긴 했습니다. 굴림 시스템 잘 만들어놓고 게임적 활용이 안되는 점이 아쉬웠지요. 그래도 흔히 말하는 '고티식 스토리겜'에 못미칠 정도의 게임성은 아니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내가 뭐를 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은 주니까요. 물론 정석적인 CRPG를 기대한다면 게임이 아니라고 느끼는 부분이 많겠지요. 하지만 평소에 콘솔로 나오는 스토리겜들 재밌게 하셨던 분들이라면 재밌는 스토리겜을 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또 페이트 코어 같은 TRPG 시스템을 많이 해본 사람으로서 이 게임이 서사형 RPG식으로 뛰어나게 서사를 전달하는 부분을 일부 캐치했기도 하네요.

공중전화기 앞에서 주인공이 헤어진 연인의 진실을 알기 위해 판정을 계속할수록 멘탈이 더욱더 악화되는 부분, 상처받은 상태로 NPC 아셸을 찾아가서, 권위 체크에 실패하면 모자 가지고 시비를 걸면서 추하게 울부짖으면서 개지랄을 떠는 부분, 아셸이 '모자 때문이 아니죠?' 하면서 위로해 주는 부분은 대단히 서사적 울림이 뛰어났습니다. 페이트 코어 같은 TRPG에서 플레이어가 수치적 이득을 보려고 기계적 플레이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굴림 실패를 통해 실패의 이야기를 성취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시를 들어 보자면, 겁스나 D&D 등에서 효율충들이 룰의 맹점을 파훼해 온갖 기괴한 꼼수를 썼던 기존 RPG와 다르게, 페이트 코어라는 TRPG에서는 주인공이 좌절하는 서사를 보기 위해 잠입 굴림 실패 이후에도 주인공이 잡혀간다거나 식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꾸미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부분은 주인공의 심리묘사에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주인공의 맛간 인생과 기억을 수습하는 이야기들, 파트너 킴과 주인공이 그네에 앉아서 썰물이 오기를 기다리는 순간 같은 장면들이 뛰어났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게임의 세계관 묘사와 정치적 현학적 지문들은 제겐 정말 매가리가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는 다음 장에서 설명해 볼게요!


4-1. 게임의 포스트모던적 속성에 대해서 - 숨겨진 심층 서사와 서브텍스트- 여기부터 스포일러 강함. 어떤 게임인지 느낌만 아실 분들은 3번까지만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이 게임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형사가 범죄 추적을 하는 추리물로 이해하기 쉽지요. 그러나 이런 장치는 모두 페이크적 성격이 강합니다. 작중 서점에서 구입해 읽어볼 수 있는 딕 멀렌이라는 추리물 패러디 소설에서, 작가는 이게 대체 무슨 의미냐며 추리물과 범인 찾기 자체를 조롱하고 있지요. 당연히 이 패러디 소설에서 범인의 정체 따위는 대충 얼버무려지고요. 이런 측면은 작가가 숨겨놓은 진짜 메시지를 찾을 수 있으면 찾아보라는 식의 도전을 던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본작의 작가는 이 게임을 하면서 추리물로서 왜 이리 형편없냐고 따지는 사람들을 조롱할 거라고 짐작이 됩니다.

딕 멀렌 소설에서 주장하는 말마따나 작중의 범인 찾기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게이머의 참가가 전혀 불가능한 일방통행식 전개부터, 추리물로서 지켜야 할 기본기가 완전히 무시되고 있지요. 범행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증거는 무엇인가 같은 논리적 요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게임 도중에 탄착군의 각도를 간지나게 추적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건 그냥 멋부리기용 코스프레입니다. 범인의 정체를 특정짓는 과정에서 유저는 아무 것도 개입할 수 없어요. 작중에서 한 번도 안나온 인물이 갑자기 범인이랍시고 등장하는 것부터 추리물로서의 근간을 파괴하고 있지요.

이 작품의 서사는 추리물이라는 표면적 서사와, 플레이어의 정치적 각성을 유도하는 서브텍스트들, 주인공의 내면적 각성을 유도하는 숨겨진 사이코드라마로 촘촘하게 삼중 서사가 짜여 있는데요. 저는 정치 드라마와 사이코 드라마의 전달을 위해 작가가 추리물을 낚시 떡밥으로 썼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같은 장르문법의 의도적 해체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던적 작법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존 문법을 해체하기 위해선 인문학적, 철학적 소양이 상당히 필요하고, 작가 스스로도 그런 영역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아요.

하지만 저는 본작의 접근법에 대단히 불만이 많았습니다.

게임 무대를 뉴욕이나 파리로 바꿔놓는들 달라지는게 있었을까요? 평범한 알콜중독자 형사가 정치 따위 신경끈 채 자기 기억에 대한 추적을 진행해 나가는 내용이라도 제가 느낀 감흥에는 전혀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위 주석 4에서 지적한 것처럼 게임의 정치적 내용과 주인공 개인의 서사가 정말 빌어먹게도 맞물리지가 않습니다. 게임의 정치적 텍스트는 다 껍데기 같습니다. 진지하게 고민한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너무도 들었고요.

'카트'라거나 '변호인'같은 영화가 아무리 신파라도 그 영화들은 진지하고 사람의 감정을 때리는 힘이 있습니다. 진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대해 일갈하는 진실된 분노, 억누르지 못하는 억울한 감정이 터져나오지요. 작품이 무엇에 대해 분노하는지가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 게임의 파업 장면들은 대단히 기능적인 배경에 불과할 뿐 진짜라는 생각이 안 듭니다.

작가가 록밴드 출신의 공산주의자라는데 전 이 부분에서는 그냥 자기 개성용으로 남의 사상과 고뇌를 훔치는 힙스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건조하게 연출한다 한들 정치적 매체는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게임의 정치 묘사에서는 고민할 것도, 깊이 생각할 것도 딱히 없었습니다. 진지하게 몰두하기엔 묘사가 너무 얄팍해요. '얘네 도와주면 경험치 주겠지?'같은 생각만 들었어요.

작가가 이 주제에 관심과 애정이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에브라트 클레어 같이 체제에 순응하여 변질된 혁명가에 대한 묘사, 사민주의자의 배신을 다루는 부분도 뭔 말하는지는 알겠고 악당으로서의 위압감도 꽤 잘 묘사되었죠. 작가는 공산주의의 역사나 모순에 대해서는 분명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레바숄이라는 국가의 역사 설정도 상당히 치밀하게 잘 짜여졌지요. 그러니 디스코 엘리시움이 정육점 테러하는 채식주의자 식 극단적 포스트모던의 산물마냥 통찰의 수준이 낮다,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무지성 추종한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나름대로 파시즘이든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모두까기를 하려고는 하고 있죠.

그러나 과감하게 말하건데, 작가는 관심은 있을지라도 실력이 부족해 잘 하지 못했습니다. 게임 내의 무수한 정치적, 이념적 텍스트들은 그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기이하게도 드라마로서의 힘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전달력이 나쁘단 얘기지요. 게임의 얕은 묘사로는 도무지 사물의 실체를 알기 힘들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의 세계가 왜 문제인지, 어째서 돈키호테처럼 이상을 쫒아 대벌레라는 크립티드 생물 찾기를 추구해야 하고 돌로레스(작중에서 모더니즘 또는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여신)을 잊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요. 이 게임은 추적 끝에 크립티드를 갑자기 만나는 강제 이벤트를 제시합니다. 그 장면에서 게임은 돌로레스를 잊어야 한다며 주인공이 울부짖는 감동적 연출을 강제함에도 그 전모를 이해시킬 노력을 하지 않지요. 따라서 게임의 전반적인 스토리텔링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 않았습니다. 설정이 우리 현실의 모사에 그치고 기존 역사를 베껴쓴 내용과 상징을 줄줄 읊어대는데 바쁩니다. 이미 아는 사실을 가지고 그걸 재료로 알아서 감동받는 식입니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자체적 묘사로는 도통 뭐가 뭔지를 알 수가 없어요. 인물이 자기 사상이 파시스트,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한다는 결과만 알겠고 이유는 모릅니다. 모더니즘이 뭐가 문제인지, 파시즘은 뭐가 추악한지 잘 몰라요. 사람들이 총살당했다느니 교전이 있었다느니 코뮨이 몰락했다느니 결과적, 사전적 텍스트만 나열하고 끝이거든요. 캐릭터들이 하나의 인간으로서 왜 파시즘을 원하고 왜 공산주의, 자유주의를 원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어요. 그나마 종장에서 공산주의자 노병의 묘사가 입체적인데 혁명가들이 파시즘과 똑같은 인간적 욕망과 추악함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러나 노병의 좌절과 회한도 게임 내의 개연성과 기승전결이 구멍난 상태에서 현실의 역사 지식, 공산주의의 모순에 대한 게이머의 사색을 끌어와야 성립되는 장면입니다. 작중의 복선 없이 갑툭튀한 노병 이야기는 결함투성이예요. 작품이 스스로의 이야기로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기승전결을 충실하게 구축하려 하지 않고 묘사를 건너뛴 채 자꾸 현실에 기대네요. 사건 없이 캐릭터의 회상을 빙자한 설정 늘어놓기로 때우고 있습니다.

비유로 설명해보자면 이런 이치죠. 이방인이라거나 이상의 날개, 카프카의 변신처럼 여러 상징이나 사상을 사물화, 인격화하는 소설이 많이 있지요. 그런 소설들에 실존주의적 본질이라거나 인간의 근본적 자아 탐구, 삶과의 투쟁 같은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디스코 엘리시움은 그런 소설들의 해설서를 다이렉트로 뱉어버리는 느낌입니다. 작중 돌로레스 여신을 섬기는 교회를 방문하면 그런 해설 멘트를 무자비하게 쏟아붓고 있죠. 메시지를 이야기로 풀어냈을때 가치가 있는거지 해설서의 'XX는 YY를 상징한다.' 같은 문장들이 걸작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디스코 엘리시움의 코스프레에 가까운 수사극 컨셉, 주인공의 심리에 대한 좋은 묘사 장면을 벗겨내고 나면 설정 텍스트 투하와 상징 보여주기만 남는데 그 부분은 이야기가 아니라 해설서 같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연출의 부재라고 하겠습니다.


4-2. 게임의 포스트모던적 속성에 대해서 - 연애담과 돌로레스, 대벌레라는 상징

게임에서 몇 안되게 사건으로 묘사되는 장면도 깊이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작가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장면은 거의 전부 다가 그렇습니다. 특히 주인공의 근본적 트라우마와 연결되는, 연인과의 이별 관련된 부분이 그렇지요. 떠나가는 연인 도라를 이념의 구현화인 돌로레스로 받아들이건 실제 연인으로 받아들이건 설득력있는 행동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연인이 주인공이 변변찮다는 이유로 그저 떠나갔다' 로 묘사가 끝납니다. '헤어진다는 상황'만 있고 거기에 인간은 없습니다. 연인은 그저 막연하게 사랑스러운 인물로 그려지고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결함이 있는지, 왜 사랑하고 헤어지게 되었는지 장면만으로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네가 가난해서 떠나갔다는 너무 값싸고 얕은 이유 아닌가요? 세상에 그런 이유로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걸 서사로 다루려면 설득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서사는 주제만으로 완성되는게 아니고 어떻게 풀어나가는지가 더 중요하지요. 문학에 기승전결과 이야기의 흐름이 괜히 있는게 아닌데 이건 불친절한걸 떠나서 나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이별 이야기에는 몰입하고 감정이입 할 수 있는 지점이 있어야 하거든요. 근데 이건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했고 이별해야 하기 때문에 이별한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 이별로 정신이 붕괴되고 몰락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 컨셉이 필요했기 때문에 무조건 이별을 했어야 하는 거요. 혹은 은유적 측면에서는 돌로레스라는 구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만' 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별을 해야만 하는 거지요. 이건 꼭 2000년대 초 K-뮤직비디오 같습니다. 슬퍼야 하니까 슬프려고 노력하는 거.

도라가 실제 연인이 아니라고 치죠. 이념의 구현화라고 치자고요. 그렇다 하더라도 플레이어나 주인공이나 그렇게 절절하게 돌로레스가 뜻하는 가치를 사랑하고 미워했는지도 모르겠고 게임에서 그걸 묘사로 깨우쳐 주지도 않습니다. 합의한 기억이 없음에도 그런건 기본값으로 치고 넘어가는 것인가요? 우리는 당연히 돌로레스를 사랑하는 족속들임에 분명하니 게임으로 근대 문명의 모순을 뉘우치라고? 왜 사랑했는지, 진짜 사랑하는게 맞는지도 모르겠는데 왜 헤어져야 하나요? 추억이 하나도 떠오르질 않는데. 누구도 그런 식으로 신념을 버리진 않을 것입니다. 돌로레스가 모더니즘의 상징이라는 걸 인지하기만 하면 아무 서사가 없어도 버리고 싶어질까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는데?

은유가 들어가 있기만 하면 그 자체로 좋은 은유가 되는가요? 은유만으로 작품은 위대해집니까?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사랑이라는 소재를 상징으로서 이용하는 꼴 밖에 안되잖아요. 진짜 사랑 이야기에 비하면 너무 공허하고 텅 비어있습니다. 돌로레스나 주인공이나 서로에 대한 예의도 관심도 애정도 없지요. 좋아해본 적도 없으면서 코스프레만 하고 있다고 봐요. 인간, 국가, 이념, 예술 그 무엇에 대한 사랑 이야기라 한들 이렇게 비어있어선 안 됩니다.

내 잘못된 정치적, 인간적 선택에 의해 세상이 나빠지거나 주인공이 몰락하거나 하는 것도 아닙니다. 메시지가 생동감있는 이야기로서, 캐릭터들이 살아숨쉬는 사건으로 전달되지를 못 합니다. 때문에 선형적 강제전달을 통해서라도 작가가 강하게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인위적, 작위적으로 느껴져요. 왜 작가의 메시지대로, 대벌레라는 이상 찾기라는 메시지대로 살아야 하는지 잘 이해를 못하겠다구요.

게다가 왜 주인공은 내가 동의하고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대벌레와 정신적으로 파장이 잘 맞고 각성하나요. 어째서 지들 맘대로 죽이 맞아서 돌로레스를 'Bad Bitch' 취급할까요? 그저 비치임에 마땅하고 비치여야 하니까? 누군지도 모르겠고, 설명도 안 해주는 사람을 어떻게 미워합니까.

전 제가 생각하는 주인공을 열심히 연기하고 선택했어요. 근데 왜 제 선택을 다 무시한 채로 캐릭터를 빼앗아가는 것일까요. 세계의 변화는 포기할지언정 주인공의 인간적 변화를 왜 지들 맘대로 해치우지요? 역할 연기는 제 몫인데 그것마저 작가가 할거면 활자가 완벽하게 고정된 출판문학을 써야지요.

크립티드가 등장하는 게임의 클라이맥스에서 저 대신 작가가 감동하고 있으니 좀 웃기는 부분이었습니다. 딴건 선형적 일방통행이라고 토를 달지 않겠지만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 들었죠. 그런식으로 지적 놀음을 할거면 이 게임의 극단적 선형성과 일방통행적 전개를 가지고 이건 규격화된 수직적 모더니즘이다, 폭력적으로 작가의 정답을 주입한다고 주장해도 되는거겠지요? 허망한 비현실적 공상과 이상을 공산당식 전체주의와 세뇌로 강요하며 개인의 자유를 말살한다고 줘패고 싶어졌습니다.

평소부터 작가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혹은 작중의 전개에 몰입이 가능했던 사람은 대벌레의 등장에서 감동을 받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가와 관점이 달랐거나 생각이 없었던 사람은 설정을 늘어놓을 뿐인 본작의 스토리 전달을 통해 사고가 바뀌고 영향을 받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드네요. 초점이 주인공과 킴을 떠나기만 하면 이야기꾼으로서 재밌게 썰을 푸는게 딱히 없잖아요. 서사 전달이 온전하게 되지 않는다고요.

게임이 돌로레스를 잊으라고 한다는 결과는 알겠는데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근데 강제 이벤트로 감동연출은 오지게 강제하죠. 뭔가 서정적인 터치는 겁나 하고 갈대밭 흔들리고 감동적인 장면인 건 알겠습니다. 느낌도 올 것 같긴한데 결국 실체는 없어요.

돌로레스를 왜 잊어야 되지? 뭐가 문제였더라? 그건 그렇고 돌로레스를 잊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대안은 뭐가 있었을까? 아무것도 생각나는게 없습니다. '아 대벌레는 참 희망차다'는 막연한 뽕만 남죠. 이유 없이 믿어야 한다는 점에서 종교 같아요. 성당의 장엄함, 성가의 아름다움, 종교적 전례의 위엄으로 신성뽕을 돋구는거 같습니다.

작품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있는데 사람과 제대로 된 이야기가 없어요. 굉장히 교조적인 태도지요. 믿어야 할 이념은 있고 인간이 없으니. 기존 장르문법을 열심히 파괴하는 대신 제작자와 감상자 간의 일방적인 위계질서나 파괴하는게 어땠을까요. 유저 손발 묶고 선형적으로 메시지를 줄줄 읊어대는 일방통행 구조는 열심히 지키는걸 보니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5. 게임의 일방통행성과 후반부의 허술함에 대해서

게임의 일방통행성과 무의미한 선택에 대해서 계속 지적했는데... 기존의 RPG를 기대하지 않고 비주얼 노벨이나 인터랙티브 무비, 혹은 GOTY식 컷신 게임으로서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자기 이야기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문학적 가치는 충분히 있지요. 게임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지겠지만요. 사실 본작이 기존 RPG처럼 플레이어가 창의적으로 게임의 목적과 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즐거움을 주지는 않잖아요. 정해놓은 선형적 틀을 따라가는거죠. 특히나 후반부가 그렇고요.

그래도 초, 중반부까지는 꽤 자유로운 필드에서 서브 퀘스트라도 맘대로 수행하니 핵심이 일방향성인걸 눈치채더라도 강하게 의식되지는 않았거든요. 여기서는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마냥 속아줄려면 속아줄수도 있어요. 근데 후반부는 정도가 심했습니다.

위에서 본작의 선형성의 예시를 많이 언급했지요. 3일차의 유저의 게임능력과는 무관계한 강제 지역해금, 핵심 인물들인 클라셰, 루비, 공산당 잔당 너나할 것 없이 전개와 결과가 똑같은 주요 용의자 심문(클라셰나 루비가 도망가건 말건 정보나 대사 몇줄만 바뀌지 핵심 서사는 바뀌는거 하나 없음), 총격전 클라이맥스의 고정성(대화 해결책조차 막아놓고 무조건 강제전투로 귀결)... 하나 더 꼽자면, 후반부 핵심 오브젝트인 조이스의 요트가 있잖아요. 숙련된 RPG 게이머라면 딱 탐정뇌가 발동되는 부분입니다. '아하, 옥상에서 관측한 B1, B2, B3 사격 탄착군 조사할 때 섬에 있는 B3 지점으로 가려면 저 요트를 써먹는게 딱이겠네.' 하고 직관적으로 뭐가 떠오르게 되어 있어요.

근데 아무리 NPC 조이스를 조져봐도 선택지가 안뜨더라고요. 엔딩 보고 알았습니다. 일방향식 선형적 게임이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한방에 거기로 가버리면 스토리 진행이 안되니까 막아놨네 하고요.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선형적 스토리가 매우 강한 작품이다보니 이럴 수밖에 없지요. 보통의 WRPG (폴아웃 1, 2나 모로윈드까지의 엘더스크롤 시리즈)라면 서사가 박살나건 말건 유저가 신들려가지고 갑자기 정답을 찍어버리면 그냥 소드마스터 야마토식 엔딩이라도 보여주게 되거든요.

소드마스터 야마토 하니까 생각난건데, 이 게임 후반부 진행이 확실히 좀 그렇네요. 건성으로 마구 진행하는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종장 무렵 주인공에게 펼쳐지는 사이코 드라마에 강한 정서적 울림이 있다는 건 맞습니다. 최종장의 갑작스러운 크립티드와의 조우는 보르헤스같은 환상문학적 서정적인 감동이 있어요. 하지만 제 취향으론 아주 크게 만족하지는 못했습니다. 구체제의 모순에 대한 전달이 부족했고, 대안적 희망으로서 대벌레를 갈망하게 만드는 동기 부여가 부족한 채 갑작스레 나타났으므로 충돌이 생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승전결 중에 전이 빠진 느낌이었어요.

이 게임의 후반부 자체가 전반적으로 뜬금없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수사물로서야 아예 기본기가 부재하니 클라이맥스에 대한 기대를 안한다고 치자구요. 그러나 사이코 드라마로서의 기승전결도 좀 맥이 빠져 있습니다. 모든 게 갑자기 진행됩니다. 어떤 주인공의 노력과 고민도 없었는데 뜬금없이 낮잠 한번 때리면 나타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식 헤어진 연인과의 꿈 회상 장면이 상당히 이상했어요. 여기서 주인공은 결정적 동기부여를 받게 되는데, 주인공의 삶을 결정하는 핵심장면을 이렇게 인과 없이 우연으로 막 때려넣어도 되나요? 공중전화 멘탈붕괴 장면과 도라의 꿈 장면 사이에 뭔가 중간단계가 2~3가지는 빠진 느낌이지요.

그리고 어떤 단서와 암시도 없다가 갑자기 등장하는 공산당 잔당 노병 등등... 대벌레의 등장도 그럭저럭 찾고 있었는데 뜻밖에 나타나서 기뻤다, 희망을 감지했다로 끝나기보다는 극도의 환희를 느끼게 해야 하는 장면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대벌레 수색을 의뢰하는 휠체어 할머니의 고민 말고는 주인공 자체가 대벌레를 갈구하게 만드는 장치, 동기부여나 추적과정의 서스펜스가 없었으니 포텐이 덜 터진 것 같아요.

그래도 대벌레 등장 장면 하나만 떼서 보면 울림이 강하긴 하지요. 노병의 등장도 기승전결과 개연성은 어긋났을지언정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긴 하고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 뒤의 경찰 동료와의 수사 평가로 끝나는 엔딩 장면은 갑자기 진지하던 분위기가 박살나고 갑분싸되는 농담을 하는 것 같았네요. 초중반부까지 깔아놓은 복선이나 설정들, 주인공의 내면세계나 창백이라는 초현실, 종말의 암시, 교회에서 발견한 이상현상, 정치적 대립, 연인과의 과거사 같은것들이 싸그리 무시되고 싸구려 경찰영화 엔딩으로 짬 때려버리는게 개발비가 부족했나 생각이 듭니다. 거의 이정도면 에피소드 1 완결, 다음 화를 기대해 주세요 아닌가요?

경찰놀이 엔딩은 본 스토리라기보다는 스탭롤 후 쿠키영상 같은 덤이라는 느낌이 매우 강합니다. 경찰놀이 대신 차라리 엔딩은 초현실적인 세카이계 스토리로 강한 정서적 울림 때려주는게 좋았을 거 같아요. NPC들과 수사 과정 평가하는 부분은 클리어 후 특전 개념으로 가는게 맞지 않나요? 엔딩 보고 나면 메뉴화면에서 수사 평가 이벤트 진행할 수 있는 식으로요.

6. 최종 평가

여러모로 결함과 미덕이 서로 강하게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게임이라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겠다 싶네요. 독창적인 면모가 빛나는 한편 일방통행과 독선도 같이 자리잡고 있지요. 메시지 전달에 있어 왜 게임이라는 매체를 선택해야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플레이어의 참여로 완성되는 RPG라는 장르를 선택했는가가 미스테리입니다. 차라리 유럽형 정통 어드벤처 게임이면 합리적인 구성이라고 이해하겠는데요. 그래도 게임 자체가 형성하는 고유의 개성적 정서가 있으니 이 게임에 매혹되는 팬의 입장도 이해가 되네요.

사실 이 게임을 하면서 와! 스릴 넘치는 형사 롤플레잉 즐기며 내가 막 논리적으로 추리하고 선택하고 그러겠지! 하는 기대만 버리면 못 할 정도는 아닌 게임입니다. 그냥 일방향 서사 보여주는대로 보면서 느낌 오는대로 스토리 감상하는 게임으로는 할 만해요. 투 더 문이나 아날로그 헤이트 스토리 같은 작품 재미있잖아요. 그처럼 디스코 엘리시움도 구간별 기복이 심하지만 개성적 세계관 표현과 빼어난 표현이 불현듯 뛰쳐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그러나 개성적이고 유니크하다, 할 만하다를 넘어서 추천한다, 잘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못 말해주겠습니다. 유니크하다는 것과 잘 만들었다는 건 사실 관계가 없거든요. 유니크한데 그지같이 만든 게임 세상에 널렸죠. 유사 게임에 가까운 RPG로서의 결여는 둘째치고라도, 인터랙티브 노벨로서도 잘 만든 작품인지 여부도 좀 비판적으로 보게 되네요. 제 관점으로는 평이한 성취도입니다. 야심에 비해 너무 성취를 못했다, 능력 부족이었다고 느껴요.

제작 의도는 '크크 수사물인줄 알았지? 하지만 네가 파고 팔수록 더 심층적이고 곱씹어볼만한 주제가 가득 숨겨져 있단다' 로 느껴지거든요. 그러나 그 삼중으로 숨겨놓은 서사는 서로 잘 맞물리지도 않고 따로 놀며, 각 요소의 완성도가 균일하지 못할 뿐더러 중구난방입니다. 파고 들어도 깊이나 묘사력이 얕디 얕을 때가 많죠. 정교하게 짜놓은 세계관과 주제의식을 이야기와 사건으로 풀어 나가는 능력도 국어책 or 동인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성실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수준이고요.

짜임새가 지나치게 산만하고 정교하지 못해서, 딱 할 것만 계산해서 깔끔하게 마무리한 소품보다 완성도가 오히려 못해 보이는 부분이 있어요. 왜 서브텍스트 암호찾기를 했지? 뭐하러? 이래서야 지적 허영쇼밖에 더 되나? 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죠. 산만하고 지루한 묘사 와중에 빼어나게 뛰어난 부분도 있어서 해볼 가치는 있긴 하지만요.

한줄 요약평을 남기자면, 1. 고집쟁이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지나치게 뚜렷하면 게이머는 피곤하다. 2. 포스트모던은 항상 기존 구조에 반항하고 해체하고 싶어하지만, 정작 해체하고 나온 결과물은 좀 그렇다... 정도가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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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13:05
수정 아이콘
저는 이 게임을 잘못샀어요 전혀취향이아니에요.
이게임은 어둡고 칙칙한 뒷골목분위기에 현학적인 이야기, 글읽는거 좋아하시면 추천드리지만...

자유로운거 좋아하시고 서양식 문체 싫어하시면 비추천합니다.
이 리뷰글처럼 자유로운척 하지만 사실 굉장히 선형적이고 답정너 스토리임.

개인적으론 내면의 인격들이 내보내는 문장들이 재미없고 현학적인데다 괴로웠고 마주치는 인물들모두 (무식한 인종차별주의자들조차)현학적인 소리들을 몇십줄씩 해대니까 다 죽여버리고싶었습니다.

여기에 뭔가 힌트가있는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그냥 분위기를 즐기는 게임이라서요. 저는 이걸 대충대충 넘겨야한다는걸 게임시작하고 꽤 뒤에알았어요. 아휴...

이런게 취향이 아님에도 환불을 못한다면 그냥 속편하게 육체찍고 무식하게 다 밀어버리는진행하면 덜 스트레스받습니다. 괜히 뭐 해본다고 지능이랑 감정몰빵하면 스크립트때문에 짜증남
플레스트린
22/01/0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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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신 대로 백과사전 스러운 온갖 복붙 텍스트가 무한히 쏟아지는 게임이죠. 저도 재미가 엄청 없었고 숙제하듯이 읽었어요. 텍스트를 재미있게 전달하려는 노력도 딱히 없이 메모장 복붙으로 일관하고요. 설정충이 설정을 나쁘게 전달하는 전형적인 모양새죠. 제가 비판한 측면 이전에 텍스트 읽는게 곤혹스러워서 포기하는 사람이 무척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22/01/0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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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주신 리뷰글 보면서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았고 지적들 모두 맞는말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아빠는외계인
22/01/0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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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게임이 꼭 게임다워야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게임이기 때문에 게임과 라이트노벨 등 다른 매체의 특성을 동시에 가질수 있을것 같기도 하고요.. 위대한 명작끼리의 우열을 가릴 때 게임다움이라는 가치가 다른 장르에서 볼수 없는 독보적이라는 점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받을수 있을 지언정, 일반 작품들은 플레이어에게 어떠한 경험을 선사해주는지가 중요하지 게임다움이 부족한것은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플레스트린
22/01/05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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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게임으로서는 좋지 않지만 인터랙티브 무비로서는 괜찮다고 적었죠. 두루뭉술하게 '즐거우면 가치가 있는 거야' 같은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치면 D-War나 스필버그 영화나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왜 차이가 일어나는 지, 어떤 요소가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지는 명확히 해야죠.
아빠는외계인
22/01/0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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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누군가는, 특히 게임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에게는 게임다움에 대해서 계속 고민해보고 성찰하는것이 꼭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 플레이어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문제일 겁니다. 분명한 가치가 있는 관점이지만 청자에 따라서는 자칫 자신의 즐거운 경험에 대한 부정, 혹은 뜬구름 잡는 소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할 것 같습니다
22/01/05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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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관심이 많았는데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이 많아서 지켜만 보고 있던 차였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데스티니차일드
22/01/05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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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음...그런데 이런류의 게임이 선형적이고 정해진 결말로 귀착되는건, 현재의 게임이 움직이는 구조상 어쩔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요?
쓰르라미 울적에 같은 게임만 봐도 결국은 무언가 선택을 함으로서 내가 마치 서사에 참여하게 만드는 유사감각만 만들어줄뿐인데...어? 이거야 뭐 2000년대 평론들이 이미 다 지적한 내용이죠. 남은건 이걸 게임이라고 인정하느냐 아니냐 정도의 공허한 이야기인거 같았는데..

저는 올해 곧 나올 일본어 스위치판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플레이는 아직 못해보고 리뷰영상만 좀 봤었던 입장이긴한데,
별 큰 기대는 안하기 때문에 그래도 사서 해볼것 같긴합니다.
플레스트린
22/01/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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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게임이 발전을 못하고 과거의 게임들이 보여준 성취보다 퇴보하기만 하면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젤다 야숨이 극찬받고 사이버펑크 2077이 비판받은 건 소프트웨어의 품질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게임의 방향성과 혁신에서 사이버펑크가 게을렀던 부분도 크다고 보거든요.

삼국지 첫구절이 분구필합 합구필분이듯, 현재의 GOTY식 흐름이 20년쯤 이어져 왔으니, 이런 비판적 여론이 커지다 보면 뭔가 개성적인 게임도 하나둘씩 튀어나오지 않겠어요.

또 선형성이라고 해서 그 수준이 다 같은 것은 아니거든요. 워킹데드와 라리안 스튜디오 RPG간 선형성의 정도는 매우 다르죠. 비선형이 무안단물은 아니고, 필요한 장르에서 적절하게 쓰여야 한다고 봅니다. 또 시장 수요와 개발력에 따라 구현할 수 있는 정도에도 차이가 있겠죠. 그러나 이 게임은 비선형이 필요한 장르에서, 의도적으로 비선형을 깔아뭉갰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다 못해 JRPG식으로 A, B, C 조건을 채우면 멀티엔딩이 다르게 나온다는 식의 천편일률적 선택조차도 안하더라고요.
데스티니차일드
22/01/05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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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이 게임이 어떻게 비선형을 깔아뭉갠건지는 제가 아직 미플레이라 할 말이 없긴합니다만,
저는 야숨도 재밌고 잘만든 게임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게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현 게임 구조상 비선형이라는 말은 20년의 흐름과 관계없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결국은 그걸 구현한다는거 자체가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라, 이 글로 인해 이 게임이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설득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플레스트린님이 무슨 생각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는 대략 이해했습니다만...

아무튼 이렇게까지 말이 나오니 빨리 사서 플레이 해보고싶네요.
플레스트린
22/01/0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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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제가 정의하는 비선형은 플레이어가 하고 싶은 행동을 모조리 하게 해주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라, 제한된 룰 아래서 얼마나 플레이어가 자신의 생각을 구현할 수 있느냐, 그 선택이 게임 진행에 의미와 재미를 가져다 주느냐로 따지고 있습니다. 바둑이 19x19 안에서 제한된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해서 선형적인 게임이라 하지는 않죠. 스타크래프트도 유닛 개수가 정해져 있다고 한들 유저 생각을 구현할 자유가 없는 게임이 아니고요. 문명이나 마인크래프트, 심즈도 그렇지요.

님은 폴아웃 뉴 베가스라거나 하는 게임이 엔딩의 가짓수가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결국 선형성의 일부 아니겠냐고 하시겠지만, 그 엔딩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유저의 생각이 얼마나 구현될 수 있느냐, 스스로의 판단으로 게임의 최종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느냐에 따라 선형성의 정도를 측정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폴아웃 1, 2나 뉴 베가스보다 폴아웃 3, 4가 선형성이 강하고,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보다 5편 스카이림의 선형성이 강합니다.
데스티니차일드
22/01/0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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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과 스타를 예로 드셨는데..그건 지금 얘기하는 게임이랑은 지점이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되네요..

아무튼 "스스로의 판단" 이라는 감각 자체를 현재는 게임이 교묘하게 만들어줄뿐 별 차이는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님 의견이랑 계속 평행선 그을거 같으니 그만 댓글달겠습니다.
내배는굉장해
22/01/05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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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별로 였습니다.
내배는굉장해
22/01/0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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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어쩌다 시작한 건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발더스 게이트 같은 식? 근데 전투 같은 건 없는 거 알고 했고 추리류니까 선택지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뭐 그런 건 줄 알고 시작 했는 데 전혀 관계 없는 거였죠. 인격들 말장난은 보다 보면 재밌는 거 같기도 하고, 배경 설정도 방대했지만 결정적으로 그 모든 게 게임 전개와 게임 결말에는 아 무 런 관계가 없었어요. 총격전 어떻게 잘 해결되나 싶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데 아무 의미 없고 항구에서의 사건, 뭐 기업 이사라던가 그 여자와의 대화 그 모든 게 사건 해결과는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었죠. 놀라울 정도로 완전히요.
물론.. 놀라울 정도로 완전히 관계가 없으니까 작가가 이걸로 뭘 의도 했다는 건 알겠습니다. 근데 그렇다면 이걸 선택지가 의미 있는 종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지.. 게임 하면서 주인공이 활동한 게 전부 싸그리다 아무 쓰잘데기 없는 삽질인데 이게 뭔 의미 입니까..? 이럴려면 게임으로 안 만들었어야..
플레스트린
22/01/0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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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그래서 이 게임은 작중의 추리물로서의 범인 추적이 아니라, 주인공의 심리적 성장과 각성에 중점을 두고 플레이하는 쪽이 더 온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실제상황입니다
22/01/0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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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전 제가 생각하는 주인공을 열심히 연기하고 선택했어요. 근데 왜 제 선택을 다 무시한 채로 캐릭터를 빼앗아가는 것일까요.]

[크립티드가 등장하는 게임의 클라이맥스에서 저 대신 작가가 감동하고 있으니 좀 웃기는 부분이었습니다. 딴건 선형적 일방통행이라고 토를 달지 않겠지만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 들었죠. 그런식으로 지적 놀음을 할거면 이 게임의 극단적 선형성과 일방통행적 전개를 가지고 이건 규격화된 수직적 모더니즘이다, 폭력적으로 작가의 정답을 주입한다고 주장해도 되는거겠지요? 허망한 비현실적 공상과 이상을 공산당식 전체주의와 세뇌로 강요하며 개인의 자유를 말살한다고 줘패고 싶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게 요즘 유행하는 사상의 문제 그 자체이고 본질 그 자체죠.
이해하지 못하겠다구요? 공부하세요!
뭐 '그마저도 의도된 것이다'일지는 몰라도요.
리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플레스트린
22/01/0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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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이런 부류가 교조적인건 참 과학 법칙인 거 같기도 해요. PC와 포스트모던이 꼭 같은 부류는 아니겠지만, 라스트 오브 어스 2 생각도 나네요.
내맘대로만듦
22/01/0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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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야심차게 사긴 했는데 게임의 맨 처음 도입부부터 대화할때마다 퍼센트로 야바위질을 엄청 하더군요.

(100%성공하는대화선택지)
(실패할수이낮은대화선택지)
(실패할확률이높은대화선택지) 이런식으로 고르게끔하던데

막상 이러면 제가 진짜로 원하는 내용을 볼 수도 없는거잖아요. 나는 좀 과감하게 대화를 하고싶은데, 그럴려면 실패할 확률이 높고, 그게 실패해버리면 그지같은 상호작용이 뜨더라고요. 나는 성공한 과감한 대화를 보고싶은건데... 막상 그렇게 확률을 뚫어도 다른 상황이 발생하는것도 아니고 대사지문 두세개 바뀔뿐. 찜찜함만 남겨서 짜증나더라고요.

물론 복도에서 담배피던 댄서랑 야스한번해보려고 세이브로드질하다가 확률 뚫었는데 똑같은 결과가 나와서 화가난건 아니에요. 그냥 꽁꽁묶어놓고 자유로운척하는 대화선택지가 좀 염증이났을뿐
플레스트린
22/01/0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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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만약 서사적 RPG의 방법론을 따르면, 님이 과감하게 도전해서 실패를 하면 실패를 한 대로 재미있는 결과가 펼쳐졌을 것입니다. 그런 방법론도 분명히 있어요.

그러나 이 게임의 작가는, 작중에 TRPG 개발에 대한 퀘스트를 끼워놓을 정도로 RPG 지식에 정통함에도, 그런 방법론을 의도적으로 택하지 않았다고 봐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했을 것이고, 또한 다양한 선택을 존중하는 게임은 만들기 힘드니까요.

말씀하신대로 이 게임에선 실패를 하건 성공을 하건 별 의미가 없죠. 게임의 그릇에 맞게 세이브로드해서 뚫어보고, 아 뭐야 별거없네 하고 넘어가는 게 가장 괜찮은 접근법 같습니다.
João de Deus
22/01/0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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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정말 좋아하는 게임이고 3회차나 돌린 입장이지만 호불호 엄청 갈리는 게임이죠 크크.. 허무한 엔딩, 나사빠진 추리물, 과도한 선형성 등등.. 스킬체크나 행동 여부에 따라 이야기와 인물관계가 조금씩 변주되는 과정이 인상깊었지만 후반부 갈수록, 특히 섬으로 떠나는 시퀀스부터는 개발비가 부족해서 스크립트로 떼운건가 싶기도 하구요. 선조격인 켄터키 루트 제로나 새너태리엄은 대놓고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를 표방했고, 비슷한 시기의 패솔로직2는 서바이벌 요소의 도입과 (비교적) 명확한 c&c를 선보이며 게임적인 측면을 강조하니 디스코엘리시움의 애매한 정체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느낌..

반대로 누군가에겐 한 남자의 성장물로, 누군가에겐 공산주의를 향한 애증 섞인 답변으로, 누군가에겐 20세기 역사에 대한 코멘트로, 심지어 어떤 이들에겐 환상문학으로 읽힐 수 있는 특성이 팬덤을 끌어모으는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얀쥐 작가의 [복잡한 텍스트의 해독은 이 게임의 본위가 아니다. 오히려 관심없는 내용을 제대로 거를 때 보상을 주는 시스템. (중략) 이 게임의 가치는 바로 이 성격테스트 같은 자기투영에 있는게 아닐까.]라는 코멘트가 어느 정도 공감이 가더군요. 별다른 대체재가 없다고 해야하나.. 선뜻 추천하긴 어려운 게임입니다

여담이지만 바웨식 c&c가 과대평가되었다는 지적에 크게 공감합니다. c&c 자체가 눈속임 아니냐는 지적이 있긴 해도 이 분야 쪽에 특화된 웨이스트랜드-폴아웃 계통 게임들이랑 비교하면 허술한걸 넘어 조악하게 느껴지죠.
플레스트린
22/01/0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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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언급해주신 게임들은 제가 접해보지 않았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시면 소개해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겐 한 남자의 성장물로, 누군가에겐 공산주의를 향한 애증 섞인 답변으로, 누군가에겐 20세기 역사에 대한 코멘트로, 심지어 어떤 이들에겐 환상문학으로 읽힐 수 있는 특성이 팬덤을 끌어모으는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저도 이게 이 게임의 핵심이라고 보는데요. 저는 기승전결이 나사가 빠진 점만 빼면 환상문학이자 성장물로서 감동을 주는, 정서적 울림이 매우 컸다고 봐요. 게임 내에서 미칠듯이 복붙되는 정치적 서브텍스트보다 주인공의 성장담이 가장 몰입되는 부분이었죠.

단 공산주의를 향한 애증 섞인 답변, 20세기 역사에 대한 코멘트 부분은 역시 저는 바보같이 묘사되었다, 설정 텍스트 복붙 외에는 유저 스스로에게 와닿게 하는 연출이 완전 부재하다고 보고 있어요. 판자촌 철거에 대한 퀘스트는 너무나 얄팍하고 깊이가 부족했고요.

본작에서 최종장의 노병 등을 통해 묘사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회한을 느끼려면, 유저가 작가와 같이 공산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의 사색을 한 상태여야 하고, 그래서 저는 현실 역사에 기대고 스스로의 이야기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죠.
플레스트린
22/01/0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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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텍스트의 해독은 이 게임의 본위가 아니다. 오히려 관심없는 내용을 제대로 거를 때 보상을 주는 시스템. (중략) 이 게임의 가치는 바로 이 성격테스트 같은 자기투영에 있는게 아닐까.]

요 평론은 흥미가 가는데, 어떤 연유로 저 글의 저자가 저렇게 주장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솔직히 제 생각에는 빠심에 의한 고평가가 아닌가 싶거든요. 제가 보기엔 성격테스트 같은 자기투영이 전혀 동작하지 않는데, 게임의 정서에 매혹되면 다 이쁘게 보이잖아요. 팬심이 생긴다는 게 나쁘단 건 절대 아니고 작품의 힘이 있다는 거지만, 그래도 평가는 냉정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플레스트린
22/01/0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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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플레이어 스스로가 원하는 자기만의 주제에 꽂힐 수 있다는 점에서 저렇게 주장했군요.

저 작가분과 저는 게임의 한계와 근본에 대해 비슷하게 성찰한 것 같은데 그래도 평가는 갈리네요.

저는 성실하게 게임 대부분의 텍스트를 읽고, 추리극으로서도, 사이코 드라마로서도, 정치극으로서도 많은 요소를 캐치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각 요소들이 독립적으로 훌륭하게 기능했다면 자기가 관심가는 이야기에 집중해서 가치를 발견한다는 주장이 말이 될 겁니다. 이런건 역시 하이퍼텍스트나 보르헤스라거나 하는 창작법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적으로 독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부분이겠죠. 자기만의 이야기와 해석을 만들어 보라는거요.

그러나 본작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은 너무나도 자명해요. 크립티드와의 조우를 통한 환상문학적 몽환적 각성이라는 핵심을 향해, 그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 위해 게임의 대부분 요소가 배치되어 있다고 보거든요. 카마이타치의 밤 같은 선택지 비주얼 노벨처럼 유저가 관심사를 보인 요소의 전개가 강화되는 것도 아니고요.

'돌로레스를 잊으라' 는 최종장 메시지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게임에서 텍스트 복붙으로 지루하게 묘사하는 종교체계와 역사, 여신 돌로레스와 연인 노라가 상징하는 의미에 대한 사전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장면이 성립해요. 이 환상문학적 장면은 강제이고 선택을 통해 보거나 보지 않거나를 결정할 수도 없죠. 아무리 봐도 크립티드나 노병이 핵심입니다.

리뷰 만화에서 작가는 연애담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 연애담은 제가 보기엔 공허하고 사이코 드라마에 비해 그 깊이가 많이 부족합니다. 오히려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상징이자 부속품으로 읽혔어요.

추리물이라는 낚시용 떡밥서사를 버림패로 쓰는 건 이해해요. 그러나 이 리뷰에 등장하는 게이머들처럼, 누구는 연애담으로서 즐거웠고 누구는 정치 드라마로서, 누구는 환상문학으로서 즐거웠다고 주장하려면 각 요소들이 8점씩은 해야 하지 않나 싶네요.

제작자 스스로가 그런 접근을 의도한 부분이 있다고 쳐도, 각 요소의 질적 차이가 많이 심해서 성립하기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João de Deus
22/01/0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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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 연애담과 실연에 나름 이입하던 입장이긴 한데 흐흐.. 각 요소들이 균등하지 못하고 일부는 깊이가 얕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섬의 환상 시퀀스에서 나름 쌓아올린 감정선을 이후 경찰놀이 엔딩에서 주저리주저리 풀어헤쳐서 뒷마무리도 별로였구요. 제작진의 욕심이 과했던건지 아니면 내면세계로의 진입을 그럴듯하게 꾸며주는 양념 수준으로 생각한건지 조금 의문이긴 하네요.
플레스트린
22/01/0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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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글에서 본 게임의 연애담이 K-뮤직비디오 같다고 비판했지만, 사람마다 취향과 생각은 다르니 충분히 거기서 감동할 수 있죠. 신파가 많은 사람들을 울리는 건 뻔해도 힘이 있기 때문이듯이요.
22/01/0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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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모니아 냄새는 화장실 가면 되는데..
여행가요
22/01/0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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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안 읽혀서 접었는데, 놀랍도록 선형적인가 보군요.
일찍 접길 잘했네요 크크
마감은 지키자
22/01/0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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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게임이 자유도가 굉장히 높은 줄(그래서 평가가 높은 줄) 알았는데 반대로 지극히 선형적이라니, 개인적으로는 작년 포함해서 최고의 반전이네요.
모험러형 유튜브 적당히 봐야겠다... 크크크
플레스트린
22/01/0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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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사실 2000년대 이후로 비선형의 전통을 지키는 게임은 씨가 말랐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비선형을 제대로 구현한 웨이스트랜드, 울티마의 전통을 계승하는 게임에 대해 이해가 높지 않은 부분이 크죠. 이건 현대의 게이머들이 안목이나 지식이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게임이 잘 안 나오고 접하기도 힘든데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디트로이트 - 비컴 휴먼 같은 게임 하면서, 선택지 많으니까 자유도 짱많네! 라고 생각하는 게 대표적이겠네요. 텔테일의 워킹 데드를 하면서 그렇게 느끼는 콘솔 게이머도 있었고요. 발더스 게이트 1, 2만 해도 JRPG나 콘솔 게임의 세계관을 상식으로 받아들이던 게이머들이, 와 마을 주민 살해가 된다고! 퀘스트를 자유롭게 받을 수 있네! 하면서 놀라는 것도 그럴 만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는 이 게임을 하면서 자유도가 뛰어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2/01/0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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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되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이 게임을 꽤나 호의적으로 봤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관점에서 다뤄주시니 흥미롭습니다.

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저도 이 게임에 대해서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조이스, 하디, 킴 전부 등장인물들이 미친 성우 열연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반응속도: [어려움:성공]) 중간에 중간에 어떤 행동을 한다... 라고 표현된 부분은 그냥 대사로 퉁치는 면모를 보여주죠 3D 모델은 멀뚱거리고요. 예를 들어, 묘사만 보면 하디는 중간에 맥주를 들이마시는 걸로 주인공 말의 맥을 끊거나, 취한 척 하면서 쎈 척 위세를 부리는데 막상 더빙은 그런 중간의 묘사를 살리지 않고 그냥 잠시 반점처럼 쉬었다가 읽어버리니까요. 오른쪽에 몰려있는 글자들만 정성들여 만들어놓았는데, 그러면 중반부터는 게이머라면 이 게임이 비주얼 노벨이지, 딱히 3D RPG는 아니구나 느끼게 됩니다 크크크크.

그래서 저는 마지막의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중에서 어떤 것만 믿어야하는지, 눈 뒤에 갇혀사는 현대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벌레 이야기라던가, 장 비크마르가 마지막에 갑자기 등장해서 피곤한 목소리로 "어디 있었냐고? 나보고 X까고 꺼지라면서 해리? 기억도 못해?", "네 전 여친? 별거 없었어. 니가 술 쳐먹어서 도망갔잖아. 아니 난 관심도 없어, 니가 맨날 징징거려서 아는거라고." 속사포를 쏟아내는 것에서도 꽤나 즐거움을 찾았습니다. 아 거슬리는게 있다면, 대벌레는 사진이라도 찍는데, 비크마르는 신경질적이고 내려깐 목소리를 가졌으면서 이걸 마지막에 '디브리핑'이라고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갈구는 걸 듣고 있으니 좀 피곤하긴 하더라고요. 대벌레 사진처럼 뭐 감동적인 멘트도 없을거면서... (근데 말투가 되게 웃기긴합니다. 크크크 간만에 더빙으로 이렇게 찰지게 욕하는 캐릭 오랜만에 들어본듯요) 비크마르는 쿠노와 함께, 파이널 컷 패치에서 재녹음된 캐릭터이기도 하니 아무래도 이게 개발자의 의도인가봅니다. 마지막에 '우리 예산 떨어졌어요'하면서 그냥 비크마르 원맨쇼로 끝내긴 했지만, 저는 되게 마음에 들었거든요. 대벌레와 아내 (아내 아니었음요 크크크)로 대표되는 주인공의 양대 사이코드라마에 '꿈께, 너는 그냥 내면이 너무 섬세해서 이상한 소리나 하는 인간이거든?'이라고 접근하는거요.

오히려 그래서 다회차로 진행할 때, 두뇌파가 아닌 주인공으로 진행해도 '아 내면이 조용하군, 역시 체력 (공식 번역과 달리, 저는 Endurance을 내구성, 끈기로 옮기는건 조금 어감이 바뀐다 생각합니다 흐흐)이 중심이 되는 경찰은 참 좋아... 라면서 몰입할 수 있고요. 아 물론 그래도 밤마다 자꾸 죄책감이 몰려드는건 이상하지만, 그냥 알콜성 증상이라고요. 비크마르나 킴이나 둘다 주인공보고 미쳤다고 하잖아요. '알 구울'을 너무 많이 마셔서라니까요.

'알 구울' 이야기 한 김에, 저는 이 이야기의 설정을 되게 좋아했습니다. '지적허영'을 긁어주거든요. 아무래도 이건 별도의 글로 다시 찾아와야겠습니다만, 저는 이런거에 사족을 못 씁니다. 현실의 재배치, 진짜 말 그대로 '생각 캐비넷'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런 이야기 하나 써보는게 꿈이거든요. 라바숄은 러시아 (= 그라드) 혁명 이후 공산혁명이 일어난 뒤늦은 파리이며, 베를린이나 신탁통치 논란기의 한반도처럼 국제사회가 ("이게 왜 국제지역인줄 알아? 한 국가가 책임지기 싫어하거든") 유일한 공권력이며, 그놈의 '서구 도덕주의'를 이식하려는 기묘한 전근대/근대/현대의 동시성입니다. 되게 기발합니다. 주인공이 기억을 잃었다고 하니까, 막 설정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쏟아내는게 아니라, 조이스도 그렇고, 킴도 그렇고, 르네 노인도 그렇고 '혁명이 있었고, 망해서 지금 이 시국이 이렇다니까?'라고 말해주지요. 왜냐면 다들 삶에게 중요한 요소잖아요. 정치병자가 아니어도, 레바숄의 사람들에게는 역사의식이 알아서 생깁니다. '내가 왜 어쩌다가 이런 고통을 받고있지?' 하면서 알아서 변증법적인 인간이 되어가는거에요. 마치 징병제에 고통받는 한국젊은이가 '야, 태평양 전쟁 들어봤어? 북한이 어떻게 만들어진줄 알아? 내가 왜 돈이 없고 화나 있는줄 알아!?'라고 하는 것처럼요. 외국인이 보면 따라가기 힘든 '의식의 흐름'이죠.

저는 그래서 이 게임을 PC주의나, 패션좌파의 게임이 아니라, 그냥 '좌익적'인 사고방식 그 자체의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극우'의 허수아비 치기로 등장하는 '메저헤드'조차도, 그냥 타인종을 두들겨 패는 스킨헤드로 아니라, 민족볼셰비즘 (Nazbol)적인 사고를 보여주거든요. 히틀러의 레벤스라움 이론이 연상되는, '순수혈통'이 농경지와 기타 역사적 거점을 선점하고 경제기반과 이에 따른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지배하다가, 지역적인 역학과 통혼으로 인해서 저열화되고 지역을 상실하고 따라서 세상의 주권도 잃게 되었다는 논리의 흐름이요. 비록 말씀하셨듯이 '마조프주의 사회경제학을 내면해봤자 그냥 대화중에 개드립만 추가가 된다'라는 비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만, 레바숄 아니, '디스코 엘리시움' 자체를 만든 '세상의 논리'에는 마르크스적인 사회경제학이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필리페 3세를 욕하면서도 당시 라바숄의 '주권'을 유지하던 것은 '코카인의 왕국'이라고 부르고, 연합국이 무력으로 상륙작전을 한 것에는 조이스로 대표되는 토착기업의 '초자유주의 (=신자유주의)'가 있었지요.

그런데 결국 이런 시야는, 나름 좌익적인 저도 게임을 하면서 알아서 느끼게 되었듯이, '허무함'에 봉착하게됩니다. 이상하죠? 고대노예, 중세농노, 근대자본주의, 분명 변증법에 따라서 역사와 세계의 주인이 되어야할 좌파들은 '혁명 몰락 이후 수십년'이라는 현실에 갇혀버렸습니다. 저도 사실 현실 속에서는 다른 선택지를 고르고 있고, 이따금 본심을 내뱉어도 '철지나간 개소리'를 하게 되거든요. 아니 어떻게 혁명이 다시 돌아와요? 노병에게 '사실 저는 마조프주의자입니다. 제가 혁명을 다시 잇겠습니다'라고 밝혀도 노병은 그냥 '혁명? 혁명은 끝났어. 니가 느그 아빠 고환에서 꼬물락거리기 전에 끝났어, 핏덩어리야'라고 내뱉죠. 아니 근데 미래에 혁명이 없다면 그냥 우린 모두 패션 좌파, 그냥 지나간 역사의 디테일에 하하거리는 오타쿠에 불과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디스코 엘리시움'의 분위기에, 서사에 압도당했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평상시에 작가와 위기의식이 비슷"한 좌파니까요. 어쩌면 이런 '압도'가 개발자의 동유럽적인 의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막 중간에, 아내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그냥 변연계가 수면의 경계에서 의식이 약해지면 튀어나와서 하고 싶은 말은 '슬퍼하라'가 아니라 "이 세상은 똥이야, 디스코 볼 밑에서 원숭이들이 춤을 춘다, 히히히! 디스코 발사!"라고요.

음악, 일러스트, 등장인물들, 주제의식... 저는 그래서 '디스코 엘리시움' 1회차를 정말 높게 평가합니다. 다시 게임적인 요소를 분해하고 분석한다면 확실히 2회차는 별로 볼게 없긴합니다. 그래도 2만원이 안되는 할인가에 40시간 정도, 정말 '평상시 제 삶의 고민들에게 다가와서 속삭여준 게임'을 즐겼다니, 저는 이 게임을 욕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쉽기는 했지만, 저에게는 인생게임 중 하나입니다.
플레스트린
22/01/05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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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도라가 아내가 아니었군요! 제 기억이 이상했나봐요.

말씀해주신 맥락이 모두 이 게임의 팬들을 매료시키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작가와 세계관이나 문제의식이 맞는 사람이라면 대단히 흥미있게 이야기를 따라갔을 거라고 추론했었죠.

그런데 세상에 그런 작품 많잖아요. 설정은 진짜 요란하고 정교한데 정작 그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라 하면 설정에 치여가지고 국어책 읊기 바쁜 작품들이요. 네이버 웹툰에서 걸핏하면 조롱받는 '신의 탑' 이나, '디스코 엘리시움' 이나 이야기꾼으로서의 스킬은 비슷하게 구리지 않나 하는 감상이 있었어요. 말씀해주신 매력적인 세계관은 설정집으로 출판하면, 오른쪽 몰아넣어진 텍스트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편리하고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나? 싶었고요. 이야기로 너무 못 살렸다고 보는 거죠. (어쌔신 크리드에서 박물관식 시대 체험 컨텐츠처럼, 거리 걸어다니며 분위기 감상하는 용도로는 쓸모가 있긴 하네요.)

그 세계관의 사람이 아니면 따라가기 힘든 의식의 흐름 있을 수 있어요. 당장 봉준호 살인의 추억 같은 것만 봐도 독재와 계엄령을 겪은 한국의 지식인과 90년대 이후 세대나 외국인이 받아들이는 체험의 농밀함이 매우 다르죠. 후자의 감상자들은 수사물로 살인의 추억을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런 간극을 보편성으로 풀어내는 게 이야기꾼의 역량이라고 보거든요. 이 게임의 작가는 역량 부족 아니었나 싶어요.

또한 말씀해주신 대로, 이 게임은 '히히히 오줌발사!' 하는 식으로 니힐하고 쿨한 조롱으로 갑자기 돌변하곤 하는데요. 전 그런 요소가 오히려 비겁하고 도피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진지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과 다르게, 그 시대의 피냄새를 맡지 못한 인간이 사전적 지식으로 코스프레를 하는 것 같았고요. 다시 말해 '아는 척' 으로 느껴졌다는 거죠. 왜 그러는 걸까요? 왜 대벌레나 도라와의 이야기에 대해서 진지한 척 서술하다가, 갑자기 네가 정신병자라 그래. 전혀 의미없어라고 도망을 가 버리는 것일까요. 전 너무 비겁하게 느껴져요. 이거 쿨찐 아니예요?

몰락한 좌파로서 현 시대를 보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 그럼 그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 과정을 이해시키는 게 이야기꾼이 할 일이잖아요. 그런데 작중에는 그런 장치가 하나도 없죠. 최소한 주인공은 완전히 외부인이예요. 좌파의 좌절과 형사 주인공은 완벽하게 따로 놀아요. 형사 주인공은 울 자격 없었어요. 그 순간 무슨 작가의 악령 같은게 강제로 빙의되었으니 울 수 있었던 거고요.

그럼에도 그 순간에 진심은 담겨 있었다고 보는데요. 기승전결 다잘라먹고 갑자기 서순 다빼먹고 감동적인 장면발사! 해놓고, 왜 이런거에 감동받아? 허무할 뿐이네 히히 오줌발사! 하고 도망가는 게 너무 비겁하고 바보같아요. 최소한 작가가 그렇게 조롱할 정도로 무의미한 장면이 아니었고, 거기에 진실한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좋은 부분만 파편으로 던져대는 대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마구 꿈 장면을 던지기보단 성실하게 기승전결을 구축해 나갔다면 더 좋아졌을 거고요.

들려주신 말씀에 대해서 제 생각을 털어놓다보니, 이 작품이 뜨겁지 못하고 겉에서 맴도는 이유도 이해가 되기는 하네요.

[ 노병에게 '사실 저는 마조프주의자입니다. 제가 혁명을 다시 잇겠습니다'라고 밝혀도 노병은 그냥 '혁명? 혁명은 끝났어. 니가 느그 아빠 고환에서 꼬물락거리기 전에 끝났어, 핏덩어리야'라고 내뱉죠. 아니 근데 미래에 혁명이 없다면 그냥 우린 모두 패션 좌파, 그냥 지나간 역사의 디테일에 하하거리는 오타쿠에 불과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디스코 엘리시움'의 분위기에, 서사에 압도당했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평상시에 작가와 위기의식이 비슷"한 좌파니까요. 어쩌면 이런 '압도'가 개발자의 동유럽적인 의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 부분에서 말씀하셨듯 본작의 작가는 패션스러운 부분이 분명 있는데, 역사의 디테일에 덕질하는 오타쿠로서 접근한 부분도 굉장히 많이 느꼈어요. 밀덕후가 나치독일 탱크 생산량 보고 하악거리는 거랑 다른 게 뭐냐 싶었고요. 그러나 그럼에도 일말의 분노 정도는 진심이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걸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어야 했다고 보고요. 알아들으려면 알아들어라 하고 딴청 부리는 대신요. 그래서야 오타쿠 서브컬쳐가 설정이 치밀하고 방대하다고 탄복하는 꼴밖에 더 되겠습니까.

무성의하게 만든 레고 같아요. 부분부분은 기가 막히게 정교하게 뛰어난데 어떤 부분은 그냥 유아용 대형블럭 하나 끼워놓은 듯 하고요.

토가시 요시히로같이 불성실한 크리에이터가 제멋대로 만든 작품같기도 하네요. 아, 제가 이 덧글로 달아놓은 비판점은 모두 RPG나 게임으로서가 아니라 이야기로서 무책임한 부분을 토로한 것입니다.
22/01/0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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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처음에 수사노트를 쓰레기통에서 꺼낼 때만 해도 도라가 비극적으로 사별한 아내 같은 분위기는 다 풍겨놓으면서 내내 빌드업하다가 (고맙다 '소름' 녀석) 마지막에 비크마르가 "해리, 너 결혼 안했어! 그냥 잠깐 사귄 여친이었어! 이 알콜 치매 환자야!"라고 갈구면서 진실이 밝혀지죠. 아니 도대체 그러면 전화기랑 비디오 가게는 뭐랍니까 크크크크.

음, 확실히 말씀해주신 이야기를 읽다보니, 이 작품이 되게 특정한 사람에게나 뜨거운 게임이 될 수 있었다는걸 알게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중후반에 해리가 자기 나이를 기억하면서, 혁명이 망하기 1년 전에 죽은 사람들로 가득찬 병원에서 태어났다는 나레이션에서 전율을 느꼈거든요. 저도 태어나니까 소련이 망하고, 너무 어릴때 광우병 사태가 있었으며, 남들이 대통령을 자신의 힘으로 바꿀때 군대에서 '휴가 중에 특히, 그리고 근무 중에도 항상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습니다'라고 선서하고 다니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주인공이 기억을 잃고, 과거를 찾아서 어떤 이념들이 있었는지, 사건들이 있었는지를 검토하고, 의견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저랑 되게 겹쳐보였어요.

하지만 글을 써주시면서 멋지게 말씀해주신 이 게임 특유의 '포스트모너디즘'적인 서사는, 그걸 일부러 비틀었지요. 스카이림을 한다면 예를 들어서, 막 스톰클록 편에 설거냐, 제국편에 설거냐 퀘스트를 막 진행하잖아요. 자유성이라기보다는 그냥 두개의 별개의 서사지만요. 그래서 암살길드가 맘에 안들면 공권력을 소환하거나, 고위 감찰관을 암살해서 반대편 퀘스트라인을 진행하거나 그러는데, 이 게임은 되게 짖궂어요. 말씀한것처럼, '내가 좌파요'하면서 에브라트나 하디에게 모든걸 내어줄 순 없지요. 기업편을 내내든다고 해도, '좋은 방법입니다'하고는 조이스는 떠나버리고요. 에브라트는 어떤 의도로 접근해도 결국 판자촌 용역깡패짓을, 본래 사건과는 상관도 없는데 주인공에게 짬처리시키죠.

그래서 대벌레의 이야기를 알 것 같더라고요. 우리가 뭔가 사상을 가지고서, 한쪽 편을 들면 뭔가 해결이 될 것 같잖아요? 특히 게임이라면 다 그렇잖아요. 현실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고요. 하지만 '레바숄'은 정치사상의 무덤이에요. 이데올로기들에게 날리는 쌍뻐큐에요. 지금 21세기랑 똑같습니다. 왕정/국수주의도 해봤고, 왕 죽이고 혁명도 해봤고, 거대한 글로벌 자본주의 체인의 그냥 한 지부가 되보기도 했고... 이건 한반도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 저는 거리에 나가서 '혁명 한번 더해봅시다. 이번에 한 오백만명 쯤 죽여봅시다. 이번엔 버전업이라 제대로 할거에요!'라고 못하겠어요. 이미 끝난 일이니까요 (조이스랑 대화하면서 같은 말을 할 수 있죠. '내가 혁명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사람을 더 죽였을 것이다', 그런데 조이스의 대답이 더 웃깁니다. '암요. 역사는 자물쇠 뒤에 잠겨있고, 누군가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열려고 구는 법이지요.' 자물쇠 뒤의 역사에는 디스코의 발명도 있고, 컴퓨터 게임도 있지만, 폐허 속에서 마약에 찌든 애들로 가득찬 현대, 외세의 통치를 받는 레바숄 점령지역도 있지요. 하, 좌파들이란...

그런데 대벌레는 처음으로, 해리에게, 아니 학자의 부인을 포함한 레바숄의 사람들에게 최초로 '믿고 나아간다면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대벌레를 보러 섬으로 떠나기 전에, 카페 앞에서는 레바숄의 주권반환을 알리는 그래피티에 주인공이 불을 붙이지요. '디스코 엘리시움'이라고 제목을 붙이면서요.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항만 노조의 사민주의자 가면, 용병을 고용하는 기업체의 자본주의자 가면이 떨어지고 주도권을 위한 개난장판이, 마치 총격전처럼 이루어질 것이라는거니까요.

하지만 이 게임은 그 와중에 좌클릭을 한번 더합니다. 차라리 '힘의 대화! 역사를 이끄는 힘이지! 스스로 역사를 개척해라' 라면 우파-파쇼적으로 결론내리면 될텐데, 우리가 보는건 뜬금없는 노병이잖아요? 그것도 '정치적 자아' 그 자체요. 인물이라기 보다는, '최후의 당원', 그리고 심지어 대벌레 에너지(?)로 유지되는 괴생명체. 소설 "1984"의 '개인은 유한하지만, 당의 생명은 무한하다'도 아니고 말이죠. 그게 맨날 주인공이 입에 달고다니는 '종말'의 정체라고요. 누구보다 '혁명'을 갈구하지만, 막상 '행동하는 양심'을 보면 겁에 질려버리는 나약한 좌익샌님들. "폭력은 나쁜거야, 힝힝"이러면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길 즐기는 괴생물체들. 이 인간들에게 대벌레의 감동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게 말씀해주신 "너무 비겁하고 바보같아요."의 정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저야 당연히 '마조프주의 경제사회학'을 내면화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이쪽 입장에서 해석해주지만, 개발자의 의도는 다른 입장에서도 볼 수 있게 한 것이라고 봅니다. '동의 안하셔도,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은 지금 이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라는 나름대로의 시국선언을 한 것이라고요, 좌측으로 기울여진 시야이긴 하지만 아무튼 '다같이 보고 즐기라'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노병의 후일담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뇌내보정일지도요. 경찰관들끼리 콩트로 끝나는거보면 그냥 막판에 예산이 떨어진거 같긴한데...), 레바숄, 또는 동유럽, 또는 21세기 전반에선 그런 사람은 이야기거리도 안되니까요. 정치게시판이 아니니 좀 지나치게 추려서 말하자면, 지금 한국의 특정 좌파에 대해서도 비슷한 은유를 할 수 있겠지요.

음 제 생각을 털어놓다보니, 자꾸 작가의 의도, 작가의 의도거리지만, 그냥 저는 이 작품에서 제가 보고 싶은 이야기를 보고 불탄게 아닌가 싶습니다, 크크.

저는 이 게임이 분노가 되게 많고 울적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시작할때 보여주는 인용구가 "거울 속에는 분노가 가득차있다."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확실히, 이게 스토리텔링이 불친절하다보니까, 제가 보고싶은걸 본건지, 이야기가 원래 이런건지 저도 이젠 모르겠네요. 윗 분이 말씀해주신 '성격테스트' 결과지 같은 것일까요, 크크.
플레스트린
22/01/0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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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말씀한것처럼, '내가 좌파요'하면서 에브라트나 하디에게 모든걸 내어줄 순 없지요. 기업편을 내내든다고 해도, '좋은 방법입니다'하고는 조이스는 떠나버리고요. 에브라트는 어떤 의도로 접근해도 결국 판자촌 용역깡패짓을, 본래 사건과는 상관도 없는데 주인공에게 짬처리시키죠.]

이 부분이 게임으로서는 자유의 말살인데, 인터랙티브 무비로서는 좌절과 허무의 학습이라고 해석해줄 수 있겠네요.

[그래서 저는 거리에 나가서 '혁명 한번 더해봅시다. 이번에 한 오백만명 쯤 죽여봅시다. 이번엔 버전업이라 제대로 할거에요!'라고 못하겠어요. 이미 끝난 일이니까요 (조이스랑 대화하면서 같은 말을 할 수 있죠. '내가 혁명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사람을 더 죽였을 것이다', 그런데 조이스의 대답이 더 웃깁니다. '암요. 역사는 자물쇠 뒤에 잠겨있고, 누군가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열려고 구는 법이지요.']

이 게임의 기묘한 점은 미칠 듯한 기복 위에서 가끔 놀라운 대사나 정서 묘사가 펼쳐진다는 점인데, 이 부분도 그런 장면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뒤의 디스코 엘리시움 그래피티 방화에 대한 해석도 되게 재미있었는데요.

안타까운 점은 이런 해석을 사건과 이야기로 묘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냥 조금만 더 솔직했으면, 분노를 분노답게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거요.

철지난 포스트모더니즘 서브텍스트 장난을 하는 대신, 그냥 솔직하게 주인공이 실패한 혁명가거나 그 후손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유저와 주인공의 눈으로 역사를 목도하게 하고, 그 역사를 어떻게 변모시킬 지 비극이건 파국이건 스스로 맞이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전 완곡화법과 돌려 말하기를 싫어하거든요. 주인공이 혁명이랍시고 막나가면 무슨 비극이 일어날 지 보여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모든 사건에서 뭘 하다가 말고 다 불완전연소해요.

그럼 작가와 베이스가 같은 독자들은 역사적 지식을 비춰가며 스스로의 경험과 상상을 덧댈 수 있겠지요. 그래비티 방화라거나 파시즘적 용병의 죽음이라거나, 디스코걸에게 공산주의자가 껄덕댄 사건의 본질 같은 부분 말이죠. 상징이 풍부하면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양가적 감정이 드네요. 창세기전 3에서 용병 시스템이 아무 의미가 없음에도 전쟁게임을 하는 양 코스프레 하는 격이라는 오타쿠 비유가 떠오르는데요. 근본과 뿌리가 없는데 빨아먹을 해석거리가 있으면 그것만으로 괜찮은건가 싶은 감정과, 그래도 저마다의 감상이 있으면 의미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사실 제가 느낀 바로는 주인공이 그래피티에 방화를 하건 뭘 하건 세계엔 별 변화도 없을 거고, 무의미한 개드립이나 치며 술이나 퍼먹을 거 같았단 말이죠. 암시나 복선은 다 맥거핀이 될 거 같고요.

왜 그런 조롱을 하고 싶었을까? 에 대한 짐작은, 작가가 실감나게 아는 게 그것 뿐,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뇌피셜이 떠오르네요. 스스로가 뭘 바꿀 수 있는 인간이 아니므로, 바꾸지 못하고 정체하는 이야기가 나온 게 아닌 가 싶어요.
22/01/0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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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크크, 그리고 마지막의 뇌피셜에 동의하기 위해 저도 이런 장광설을 했습니다.

["작가가 실감나게 아는 게 그것 뿐,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뇌피셜이 떠오르네요. 스스로가 뭘 바꿀 수 있는 인간이 아니므로, 바꾸지 못하고 정체하는 이야기가 나온 게 아닌 가 싶어요."]

제 정치적 입장에 대한 정리와 선언문을 겸하기도 하는군요. 정말 간만에 해보는 게임의 줄거리에 대한 지적인 대화였습니다. 저는 무슨 게임을 해도, 뇌내보정으로 재미있게 하려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라서, 어쩌면 이런 힙스터 포스트모더니즘을 빨아준 것 같습니다. 말씀해주신 내용도 깊게 생각하면서, 나중에 한회차 한번 더 해봐야겠습니다. 게임에 깊이를 더해주는 글이랑 말씀!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RapidSilver
22/01/0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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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현학적 허영과 깊이있는 고찰은 작품의 장치가 얼마나 잘 구성되어있느냐에 따라 사소한 차이로도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말씀해주신 여러 문제점들 - 선택지와 해결방법, 그리고 그것이 세계관에 미치는 영향력, 상징물과 주제의식의 괴리 등 - 덕분에 제가 받아들인 디스코 엘리시움은 전자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저는 복잡함 complexity 혹은 더 나아가 난잡함 disorder 도 단순함에선 추구할 수 없는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게임디자인에서 단순명료함만이 정답이라 생각하는 많은 게임 평론가/개발자/수용자들에 대하여 상당히 불만이 많기도 하고, 복잡함/난잡함에서만 우러나올 수 있는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한 게임계 전반의 이해도가 상당히 떨어져서 '좋은 복잡함'을 가진 작품을 무시하고 '어긋난 복잡함'을 어긋난 이유로 고평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 디스코 엘리시움에 대한 (제가 납득하기 힘든) 지나친 평론가들의 고평가는 이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플레이어의 수단이 다양하고 능동적인 플레이가 보장된 액션게임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런 복잡성을 추구하는 액션게임들은 적들이 망부석처럼 아무리 때려도 꿈쩍도 안하기 보다는, 플레이어의 장단에 맞춰서 적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거나 랙돌이 되어서 날아가버리는 편이 훨씬 게임플레이 구성에 도움이 될겁니다. 그래야 내가 가진 '수단'이 의미가 생기니까요. 이와 비슷하게, 디스코 엘리시움의 아무말 대잔치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 대잔치에 장단을 맞춰줄 놀이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느낀 디스코엘리시움의 패턴은 붕어빵을 어느부위에서 먹는가에 따른 심리테스트 지문부터 시작해서 팥의 종류, 강력분과 약력분의 차이, 붕어의 분류학적 특징 등등의 쓸데없는 정보를 전부 다 보여준 뒤에 '타코야키 먹어야지'로 끝맺음을 하는듯한 허무함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게임의 컨셉인 난잡함과 플롯 전반의 컨셉인 선형성이 크게 어긋나있습니다.

제가 이 게임의 내러티브에 대한 고평가를 부정하는 이유도 이 '복잡함의 미학에 대한 몰이해'가 바탕이 되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산발적인 텍스트가 산발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사고방식이지, 굉장히 대단하고 새로운 개념이 아니거든요. 산발적으로 발생한 수용자의 감정을 게임이 다시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측면에서 보면, 디스코 엘리시움은 사실 그런게 없죠. 그냥 계속해서 산발적인 담론을 보여주며 정해진 이야기로 달려갈 뿐. 이점에서 '무시되는것도 고려하여 설계한 것'이라는 해석도 이해는 가나 의도된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스탠리 패러블이나 언더테일같은 게임들도 그 장치들이나 은유가 상당히 독특하고 산발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들 게임의 내러티브가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플레이어의 산발적인 감정에 의한 돌발행동까지 전부 계산 아래 넣고 설계했다는 점이죠. 이 점에서 보면 니가 짖든 기든 난 내 할말이나 할란다 식인 디스코 엘리시움은 독특한 스타일이라고 평할 수는 있어도 혹평도 감내해야 하는 스타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나쁜 게임이다라고 평할 수는 없고, 취향따라 성향따라 충분히 고평가 할수 있는 요소는 풍부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가끔 평론가들이 이 게임을 패러다임 시프트급, 레전드급으로 꼽는 광경을 보면 좀 의아합니다. 새삼스럽진 않지만 게임 평론계는 선대 게임들의 업적이나 기술적 성취를 쉽게쉽게 머릿속에서 지우는 경향이 있는것 같아 좀 착잡합니다.
플레스트린
22/01/05 19:12
수정 아이콘
(수정됨) 디스코 엘리시움의 게임적 측면과 내러티브적 측면을 모두 평가해 주셨네요. 저와 동일한 시각이라 크게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쓸데없는 정보를 전부 다 보여준 뒤에 '타코야키 먹어야지'로 끝맺음을 하는듯한 허무함] 은 완벽 동의하는데, 전 그런 부분이 무의미한 코스프레인걸 알면서도 은근히 재미가 있었습니다. 재능있는 기획자가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인격형 스탯은 더 재미있는 시스템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선형적 선택지나 지문이 아니라 룰과 메커니즘으로 가동되었으면 얼마나 재밌었을지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내러티브에 대해서는 저도 '무시되는 것도 고려되어 설계한 것' 이라는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작가가 추리물이라는 떡밥에 숨긴 연애담과 사이코드라마, 정치 드라마에 대해 강한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추리물로서의 기만은 딕 멀렌 소설을 통해 조롱과 힌트를 주려고 안달이 났죠. 크립티드 서사와 연애담 역시 숨겨놓고 능력껏 찾으라기보단 강제 이벤트로 깔아두었고요. 이 게임을 클리어한 후의 감흥은 제작자가 의도한 것, 제대로 플레이하는 방법 외의 영역으로 가기 힘들다고 봐요. 플레이어 스스로 답을 찾는 식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 전달이 나빴다, 전달하려 했으나 버려지는 게 많았고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숨겨두면 찾기가 힘든 게 당연한 거죠. 그걸 두고 못 찾은 네가 하수라고 하면 오만한 거고요. 숨길 거면 찾도록 유도하는 것, 숨긴 만큼 찾았을 때 더 기쁘게 만드는 게 실력이거든요. 산만하고 난잡하다 보니 작가가 전달하려 한 것들이 배송 오류가 났고, 그 끝에 플레이어들은 3개 받아야 할 박스를 1개만 받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해할 수 있고 관심 가는 것만 겨우 이해했다는 거죠. 그나마 박스 간의 크기나 품질이 같지도 않고요. 그걸 두고 플레이어마다 각기 다른 답을 찾았다고 하면 좀 그렇지 않나 싶어요. 이 게임을 고평가하는 사람들은 박스를 1개만 찾아도 재밌고 더 찾을 욕구가 생긴다고 평가하겠지만요.

추리물에 숨겨진 생뚱맞은 서브텍스트 서사와 강제 이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숨겨진 상징들을 깊게 해석해야 하죠. 그걸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이 무성의하다는 점에서 '니가 짖든 말든 내 할말이나 할란다' 라는 스탠스가 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이 듭니다. 고평가하는 게이머들 말대로 관심 안 가는 것을 버리고 챙길 것만 챙기면 반쪽짜리 불완전한 이야기 밖에 안 나오거든요. 이 숨겨진 상징이나 각종 설정의 나열은 말씀하셨듯 대단히 산발적이고 교회 장면이 그렇듯 마구 쑤셔박은 형태이죠. 이런 산발적인 텍스트를 부지런히 숙제해오지 않으면 플레이어는 불만족스러운 이해를 하게 되는데, 이게 정교한 내러티브라고 보긴 어렵지 않나 싶어요. 흩어진 서사를 플레이어가 얼마나 능동적으로 재조립하게 만드느냐, 세계의 비밀과 게임의 목적을 파헤치게 만드느냐가 RPG 게임의 실력이고 역량인데, 이건 메모장 복붙인거죠. 또 텍스트 해독만으로 이뤄지는 암호찾기식 독자 참여가 왜 게임으로 나와야 하는지 모르겠고요.

다만 이 게임의 설정과 역사적 측면에서는 산발적으로 기복 있는 요소들을 마구 충동적으로 뿌려댄 결과물이지만, 놀랍게도 그런 무성의한 결과물이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해석을 끌어내고 있더군요. 역사 그 자체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산발적으로 뿌려진 텍스트를 (숙제를 해서) 재조립한 결과, 그 결과물에 대한 감상은 취향의 영역인 거 같고요.
22/01/05 20:16
수정 아이콘
(수정됨) 극찬과 실망이 많이 갈리는 게임이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중반까지의 살인사건과 암울한 세계관이 어우러진 분위기랑 20가지 넘는 스탯이 스토리 곳곳에 잘 사용되었던 점 때문에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했었습니다.
지나치게 선형적인 후반부랑 특히 그 엔딩만 아니였어도, 엔딩이 허무해서 2회차 플레이는 못하겠더라구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강조되어 있어서 폴아웃3처럼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 그냥 도시를 말아먹는 뭔가 극단적인 선택지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건 없어서 아쉬웠네요.


그리고 선택지가 많은 듯 하지만 결국은 선형적인 진행이라는 RPG의 한계는 인공지능이 서사를 써주는 단계에 이르지 않고서야
진짜로 게이머의 선택에 의해 스토리가 나비효과처럼 분기되는 게임이 나오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고 느껴지더라구요.
애초에 그렇게 스토리의 다양성에 신경쓰는 게임이 마이너하기도 하고, 그래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정도만 해도 그저 감지덕지하죠

그리고 [주석1]에 적힌 문장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혹시 어느 글을 참고하신 건지 알 수 있을까요?
플레스트린
22/01/05 20:19
수정 아이콘
(수정됨) 주석1은 제가 나무위키의 디스코 엘리시움 평가 항목에 쓴 적 있을 거예요. 주석 1에서 제시하는 정보 자체는 껍질인간이라는 반골 게임 리뷰어가 블로그에서 발더스 게이트를 까면서 적은 내용과 일치하고요.

플레이어의 의지가 서사에 반영되는 게임의 경우 들 예시가 많지는 않습니다. 80년대의 웨이스트랜드부터 폴아웃 1, 2까지의 계승, 혹은 울티마 4가 성취한 비선형적 서사구조가 대표적인데요. 웨이스트랜드 1이나 폴아웃 초기작은 스팀을 통해 한국어로 즐겨볼 수 있습니다. 단 이런 작품들은 절대로 영화 같이 잘 짜인 서사가 펼쳐지지 않으며 서사 그 자체의 감상만이 목적도 아닙니다. 게임 내 서사는 최종 목적 수행을 위한 플레이어의 상상과 판단, 능동적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측면이 더 큽니다. 영화가 아니라 게임이니까요.

게임을 통해 잘 짜인 이야기를 보고 싶으면 집요하게 분기 트리며 선택지를 깔아놓는 카마이타치의 밤 같은 비주얼 노벨을 하는 게 더 나을 거예요.

그나마도 90년대 후반 이래로 성우 보이스와 3D 컷신이 도입되면서 비선형 서사는 씨가 말랐지요. 심즈처럼 완전히 서사를 추상화해서 플레이어가 알아서 자가발전하게 만드는 형태로 약간의 혁신이 일어났고요. 수요가 적은 영역에 아웃풋이 부족한 게 당연한 이치겠지만요.

서사적 비선형이 제대로 구현되는 혁신은 AI 던전이나 AI 노벨리스트 같은 툴을 기대해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3D 그래픽에 중점을 둔 게임은 결국 코지마 히데오가 개념을 잡은 콘솔형 컷신 게임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기발한 혁신은 텍스트 쪽에서 나오리라 기대하고 있어요. AI로 이야기를 만드는 툴에 관심있으시면 나무위키 검색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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