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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29 22:47
군대 이끌고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든 인물인데 오히려 한국인들에게는 이미지가 좋은 편이라는게 정말 인조의 위엄을 증명하는 듯 합니다.
15/07/29 22:49
뭐 청태종이 명군이기도 했고요. 막판에 고구려갔다 추태부린 당태종과는 달리
청태종은 추태부린것도 없죠. 조선에 와서도 나름 미담을 좀 남기고 갔고. 임경업과의 일화라든지..
15/07/30 00:00
인조를 안내쫓은게 가장 큰 흠이죠;;
쓰레기같은 임금 갈아치우고 인질로 잡아서 청으로 데려가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았으면 조선이 조금이나마 더 나아졌을 것 같네요.
15/07/30 09:51
판타지라뇨? 인조가 조선 역대 왕중에 연산군과 더불어 최악의 왕인데 누가 해도 인조보다 나았을 거라는건 상식적잉 추측이 아닌가요?
소현세자가 된다고 태평성대를 이룰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만? 소현세자의 청나라에서의 행각들을 보면 유교에 얽매이지 않고 상업도 중시하며 백성들을 아끼는 모습이었는데 이런 마음가짐만 가지고 있었어도 인조보다 나았을거라는건 당연한 추측이 아닌가요? 그냥 그 시대의 보통 정도의 사람이 해도 인조보다는 잘했을겁니다. 인조가 개막장인성쓰레기인데 이보다 못하면 사람인가요?
15/07/30 10:00
추후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지만, 광해군 대는 국가재정 수요가 폭증하면서 납세자들의 납세 부담이 급증한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공물납부 및 징수 과정에서의 구조적 폐단으로 존재했던 방납(防納)이 다시금 부활했고, 궁궐 공사가 과도하게 연이어 추진되면서 수많은 백성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야만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는 왕실을 최정점으로 한 지배층의 사치 및 낭비 풍조가 만연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은 광해군 치세 3기인 광해군 10년~15년(1618~1623)의 5년 동안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7)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조정이 '여민휴식'의 기치 아래 국가재정 규모의 감축, 긴축재정의 실시, 세금 부담의 완화와 같은 개혁적 움직임을 추진해왔음을 고려해보면, 광해군 정권의 일탈적 양상은 바로 그 '여민휴식' 정책의 '부작용'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
예컨대 중국사에서는 명ㆍ청 교체기인 1640년대를 소빙기가 가장 활성화된 시기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한국사에서 소빙기의 충격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1670~1700년 무렵이었다. 중국 역사학계가 1640년대를 소빙기의 충격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된 시기로 이해하는 까닭은 바로 이 무렵 왕조 교체를 포함한 대규모의 정치경제적 변화가 수반되었기 때문이다(조영헌,「'17세기 위기론'과 중국의 사회 변화 - 명조 멸망에 대한 지구사적 검토」,『역사비평』107, 2014, pp.183~192). 반면 같은 수준의 이상저온의 충격을 받은 1640년대 즈음의 조선은 도리어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이는 인조 정권이 1636년 병자호란에서의 패배 이후 '여민휴식'을 모토로 긴축재정, 세금 부담의 완화 등을 통해 농민들의 사회경제적 안정을 위해 매진했던 탓이다. 김성우.「光海君 치세 3기(1618~1623) 국가재정 수요의 급증과 농민경제의 붕괴」(『大邱史學』118, 2015 --------------------- 현실은 인조에 대해 인터넷 사관과는 달리 제법 고평가가 내려지고 있다는 사실.
15/07/30 10:05
덤으로 소현세자가 보여준 것은 어디까지나 사업가적인 측면이고, 조선의 군주로서 필요한 여론 조율 밎 적절한 정치적 파워게임과 정책 슬로건 제시. 이를 통해 지방 산림층의 협력을 얻어내는 능력은 보여준 적이 없으며, 귀국후 소현세자가 보여준 걸로 이야기되는 그런 모습으로는 이런 정치적 능력 자체가 부족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게 현실. 보여준 거만 따지면 효종이 훨씬 낫습니다.
15/07/30 10:41
효종이 과연 북벌을 계획했느냐부터 좀...
효종이 북벌론 슬로건을 내걸고 행한 것은 청의 간섭으로 제약받았던 방어체계의 복구, 군사력의 복원, 대동법으로 대표되는 제도개혁안의 실시, 지방 산림층으로 하여금 조정에 출사할 명분을 제시하여 이들을 인재풀로 활용. 즉위명분의 보강 등. 북벌론은 굉장히 다방면에서 유용하게 활용된 슬로건이였고 이는 단순히 전후복구를 넘어서서 오늘날 조선의 경제는 17세기에 가장 부흥했다고까지 평가되기도 하는 기반을 제공. 근데, 행한 정책을 보면 북벌을 하기 위해 공격역량을 키웠다기보단 북벌을 명분삼아 방어역량을 복구했다고 보여지는 부분이 월등히 많습니다. 따라서 '과연 효종이 북벌을 하려고 했는가, 아니면 북벌은 정책과 개혁 수행의 대의명분이었는가' 부터 따져야 합니다.
15/07/30 14:24
그게 판타지라는 겁니다...
인성막장으로 따지면 이미 영조가 한수 위고, 내정막장으로 따지면 광해군이 한 수 위고... 님의 막연한 선입견을 아무리 표출한다 하여도 그게 진실이 되진 않습니다.
15/07/30 14:48
누가 진실이랬나요?
그냥 개인적인 생각일 뿐인데 무슨 따지듯, 훈계하듯 계속 댓글 다시나요? if이야기 자체가 싫으면 몰라도 그건 무조건 안될꺼라고 강하게 부정하는 것도 본인만의 선입견의 표출이죠. 말 한번 아주 곱게 하시네요.
15/07/30 15:22
논박은 위에 나이트해머님이 아주 잘 해주셔서 제가 굳이 더 할 필요는 없어 보여서요.
보아하니 해도 알아들으실 거 같지도 않고.
15/07/30 00:30
너는 또 무엇 때문에 너희 변방 신하에게 글을 보내 "사세가 부득이하여 무리한 요구에 얽혔지만, 이제는 정의로써 결단할 때이니, 경은 여러 고을을 깨우쳐서, 충의의 인사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정벌하는 대열에 따르게 하라'라고 했느냐. 이제 짐이 몸소 대군을 통솔해서 싸우러 왔다. 너는 왜 지모있는 자로 하여금 계책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싸우는 대열에 나서게 해서 친히 일전(一戰)을 시도하지 않느냐.
이부분 크크크
15/07/30 01:25
유방부터 시작된 중국영웅들에 대한 글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이제 곧있으면 신불해님의 청태종 관련된 재밌는 일화들이 올라오겠군요(?)
15/07/30 08:31
어... 누구더라? 이글루스의 유명한 역사 블로그에서 봤었네요. 거기서도 평이 '명문이나 글이 지적하는 대상이 우리라서 꽤 씁쓸한 글' 이라는 평이더군요.
저는 [ 우리가 정말로 도적이라면 왜 사로잡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입과 혀로만 욕을 한단 말인가. 속담에 '양의 기질에 호랑이의 가죽(洋質虎皮)'란 실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부분이 정말 통렬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왜 감히 대들어? 라는 건데 국제 외교에서 아주 중요한 감각인데 조선은 그냥 아는 거라고는 사대주의 뿐.
15/07/30 11:27
역만없이라지만 이자성이 북경함락후에 풀어지지않고 확실하게 오삼계를 포섭했다면...
만주족은 다시 조선을 공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전과는 다르게 합병을 위해서
15/07/30 15:47
조선 비판하는데 왜 님이 저에게 인신공격하시나요?
제가 조선 비판하면 본인이 상처받고 피해받나요? 능양군 직계 자손이시면 이해하겠습니다만. 그리고 조선 공격하니 나도 너에게 인신공격하겠다라는 생각이 옳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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