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마음이 허하고 텁텁합니다
아니, 어제도 아니고 그저 한시간 전만 해도 저는 T1의 패배가 분해서 기분이 팍 상했을 뿐이었는데요
그런데 그런 의식의 흐름이 저를 작년 롤드컵으로 인도하고 갑자기 그 친구의 자취방에서 경기를 보던 순간이 떠오르면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파박 몰려오는 이 기분은 뭘까요
아주 우울한데 이 우울감속에는 정다운 기억들이 가득해서 싱겁도록 이상한 느낌이 드는거에요
우리의 행복은 많은 부분 내일은 더 멋진 날이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과 맞닿아 있는데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치사하고 샘통맞은 어제의 옛이별이 오히려 저를 단단하고 외롭게 만드는 것이지요
또한 놀랍게도 그런 감정에게서 제법 기쁜 마음도 든답니다
파노라마처럼 늘어진 어떠어떠한 행복과 불행들에 대하여 어떤 일도 있었다... 어떤 일도 있었다... 라고 혼자 주억거리고 있으면 내일같은 것 없이도 잘 살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요.
그래서 오랜만에 시집을 꺼내어 읽어보았답니다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나를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문태준, 바닥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는 부분은 항상 기가 막힙니다
그런 친구가 있었지.. 지금은 어디 어디 살겠지.. 뭐 뭐 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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