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에 나는 정복군주이고 프랑스황제였던 나폴레옹1세를 세계위인전기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나폴레옹1세에 대한 세계위인전기를 10번이상 읽으면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준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앞으로의 닥칠 일에 대해 어떻게 하면 꼼꼼하게 대처할 것인가를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황제였던 나폴레옹1세와 같은 능력자와 실력자도 모든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하다가 나중에 가서 어느 시점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마지막 전투인 워털루전투에서 참패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이후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1세는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되어서,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죽게 된다. 어릴적에 나는 생각하기를 이것은 나폴레옹1세 자신이 대관식에서 절대권력을 가진 가톨릭 교황이 나폴레옹 1세의 머리에다 황제의 관을 씌워줘야 하는데 나폴레옹 1세가 직접 쓰고 교만하게 행동한 것에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지 않았나 그런 의심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은 어떻게든 교만해서는 안되다는 그런 교훈을 가졌다. 100%의 확신을 가졌는가하면 그렇지 않았고, 절반 가까이의 확신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성장하면서 나는 어떻게든 겸손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었고, 능력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위에서 안좋게 찍히고 밑보이면 매우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마흔이 넘은 지금에는 어릴적의 결론과는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것을 최종적인 결론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앞으로는 바뀌지 않을 것같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1세는 1769년 8월 15일 프랑스가 다스리던 코르시카섬의 아작시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코르시카섬은 나폴레옹1세가 태어나기전인 1768년까지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제노바에서 다스리던 섬이었다.
나폴레옹1세는 이탈리아 혈통이었고, 프랑스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고, 나폴레옹의 이름의 뜻은 '황야의 사자'이다. 이탈리아 이름은 나폴레오네 부오나파르테이고, 나폴레옹은 한문으로는 음차하여 나파륜(拿破崙)이라고 표기한다. 코르시카는 지중해에 있는 작은 섬으로서 몇 백년전부터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인 제노바의 통치를 받았었는데, 코르시카사람들은 제노바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였다. 코르시카섬과 제노바의 싸움은 몇 년씩이나 계속되어 많은 사람이 죽고 피해가 점점 커지자, 결국 도시 국가 제노바에서는 코르시카섬을 프랑스에 팔아넘겼다.
화가 난 코르시카섬에서는 땅을 사들인 프랑스와 전쟁을 했지만 패해서 완전히 코르시카섬이 프랑스땅이 되고 말았다. 나폴레옹의 아버지인 카를로 보나파르트는 변호사였는데, 어린 나폴레옹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코르시카의 독립을 위해서 싸운 영웅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 주었다. 나폴레옹은 어릴적에 유난히 큰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친구들과 전쟁놀이를 할때마다 대장역할을 했었다. 나폴레옹이 11살이 되었을때 아버지가 나폴레옹에게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묻자 나폴레옹은 용감한 군인이 되어 적들을 물리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프랑스왕이 코르시카섬의 우수한 아이들을 뽑아서 프랑스에서 공부를 시켜주는 길이 열려있다고 말했고 어린 나폴레옹을 프랑스로 보내게 된다. 코르시카의 소년 나폴레옹은 프랑스 브리엔 육군 유년 사관학교의 학생이 되었는데, 학생들 대부분은 프랑스 귀족의 아이였다. 코르시카섬에서 온 나폴레옹은 곧잘 놀림을 받았고, 아무도 사귀려 하지 않아서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친구가 없던 나폴레옹은 책을 친구삼아 언제나 나무밑에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제일 좋아하는 책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정치가, 작가이고 '도덕론'을 저술한 플루타르크가 쓴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다. 나폴레옹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으면서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코르시카를 위해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아이들은 혼자서 책을 읽고 있는 나폴레옹을 비웃었지만 나폴레옹은 꾹 참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학교성적은 항상 귀족출신인 프랑스 아이들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어느날 선생님이 나폴레옹을 반장으로 임명했는데 프랑스 아이들의 불평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의 선생님은 훌륭한 지휘관은 모든 부하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하고 또한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나폴레옹에게 충고하였다. 나폴레옹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고,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려고 노력했고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기도 했다. 이런 나폴레옹의 변화에 아이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그리고 이후 나폴레옹의 평가가 완전히 바뀌는 일이 발생했다.
어느날 겨울날 아침에 눈이 펑펑내리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편을 갈라서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한쪽 편의 대장이 되었고 곧 눈뭉치를 던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머릿속에 좋은 전략이 떠올랐고 작전을 짜서 지시를 내렸다. 아군을 두편으로 나누어서 한편은 눈덩이를 뭉쳐서 진지를 쌓고, 다른 한편은 공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진짜 장군이 된 것처럼 지휘했는데, 나폴레옹의 공격부대가 앞에 나가 싸울 때 뒤쪽에서는 부지런히 눈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처음에는 나폴레옹의 공격부대가 밀렸다.
나폴레옹과 싸우는 적에 해당하는 상대편은 모두 한꺼번에 공격해오는데, 나폴레옹 편은 둘로 나누어 절반만이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부대가 진지 앞까지 밀려오자 나폴레옹은 돌격을 명령했다. 뒤에서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몰려나오며 눈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뒤에 있던 아이들이 눈덩이를 많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던질수 있었고, 나폴레옹의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상대편은 항복을 했다. 아이들의 눈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선생님들은 저마다 나폴레옹을 칭찬했다.
그리고 이후로는 나폴레옹을 업신여기는 아이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브리엔 유년 사관학교는 원래 6년을 다녀야 졸업을 하는데, 나폴레옹은 성적이 매우 좋아서 4년만에 졸업을 했다. 그리고 또 뛰어난 성적으로 인해서 파리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귀족 아이들에게 촌놈이라고 놀림을 받던 나폴레옹이 당당하게 상급생들을 물리치고 거둔 성과였다. 한편 파리의 육군 사관학교는 파리의 교외에 있었는데, 너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의 수재가 다 모이는 곳이었다.
코르시카의 역사를 배우는 시간에 수업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코르시카는 프랑스에 의해 정복당해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하자, 나폴레옹은 벌떡 일어나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가 코르시카를 무력으로 강제로 빼앗은 것이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코르시카는 코르시카 사람들의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폴레옹이 또박 또박 말하자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우수한 성적으로 파리의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1785년 16살의 나이에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의 육군 포병 소위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하루는 무척 힘들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16시간동안의 고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부하 사병들은 모두 나폴레옹보다 나이가 많고 거친 사람들 뿐이었는데, 나폴레옹은 부하들을 매우 엄격하게 다루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모든 일을 부하들과 함께 나누려 했고, 지저분하고 힘든 일이라고 부하들에게만 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다른 장교들도 나폴레옹을 비웃었고, 다시 따돌림을 받게 된 나폴레옹은 근무가 끝나면 책만 읽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군대에서 받는 돈이 너무 적어서 책을 사서 보려면 먹는 것을 절약해야 했다.
근무하는 동안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터지자 나폴레옹은 휴직한후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지원병대대의 장이 되었고, 휴직기간이 경과되도록 복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규군 대위로 승진했다. 나폴레옹과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는 코르시카섬 사람들을 설득하였고, 코르시카가 완전히 독립은 아니지만 프랑스의 작은 도시로 인정받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다시 프랑스의 부대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프랑스 귀족 출신인 장교들도 새 정부편인 나폴레옹을 헐뜯고 욕을 했다. 어느날 밤 프랑스 귀족 출신의 장교들은 술집에 모여 나폴레옹의 욕을 해댔다.
급기야 장교들은 나폴레옹을 강물에 던져 죽이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술집 주인은 깜짝 놀라서 몰래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자 잠시 후에 키가 작은 장교 하나가 급히 뛰어왔다. 그리고 그 키가 작은 장교는 장교들을 도망가도록 시켰는데, 경찰들은 어떤 누구도 잡을수가 없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경찰들이 오는 것을 알린 사람은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이 어디선가 이야기를 듣고 달려와 자기를 죽이려고 한 장교들을 구해준 것이다. 나중에 귀족 출신의 장교들은 나폴레옹에게 잘못을 빌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밤 프랑스왕 루이16세가 가족과 함께 튈리르왕궁을 탈출하여 마차로 외국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 동부 국경 근처인 바렌에서 뒤쫓아온 군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 1793년 1월에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서 프랑스의 왕인 루이16세는 처형되었고, 유럽의 여러 군주제국가들은 위협을 느끼게 되어서 대(對) 프랑스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프랑스는 홀로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등의 군사강국과 싸우게 되었는데, 이때 나폴레옹은 눈부신 활약을 하였고 크게 급부상하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왕실을 지지하는 왕당파는 영국 해군을 등에 업고 프랑스 해군의 주요 기지이자 항구도시인 툴롱에서 발란을 일으켰다. 프랑스 정부는 군대를 급히 모아 툴롱으로 진격했는데, 각국 여러 나라에서 무기를 지원받은 반란군은 매우 강했다. 영국에서는 큰 군함 여러 척을 보내어 툴롱의 프랑스 군함을 모조리 부숴 버렸다. 툴롱에서 가까운 니스라는 도시의 포병 부대에서 근무하게 된 나폴레옹은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포탄이 쏟아지는 싸움터를 말을 타고 달리며 부하들을 지휘하였고, 부하들로 하여금 적진의 주요한 곳을 공격하게 했다.
밤낮없이 싸움이 계속되었고 나폴레옹은 부하들과 함께 싸웠고 힘을 북돋워 주었다. 마침내 반란군은 무릎을 끓었고 나폴레옹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프랑스정부에서는 싸움을 승리로 이끈 나폴레옹을 치하하고 계급을 올려 주었는데, 나폴레옹은 25살의 나이로 장군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후 나폴레옹은 니스로 돌아왔는데, 얼마후 이번에는 다시 왕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려는 왕당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황한 정부는 나폴레옹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나폴레옹은 힘이 없는 반란군을 매우 쉽게 물리쳤다.
그당시에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이었다.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국민이 주인이 되어 새로운 정치를 펼치는 프랑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를 쳐들어가기 위해 프랑스와 가까운 이탈리아에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나폴레옹은 27살의 나이로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를 향해 떠났다. 프랑스군을 이끄는 나폴레옹은 뛰어난 전략을 사용했고 마침내 오스트리아군은 달아나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넓은 롬바르디아 평야를 빼앗고 다시 밀라노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은 싸울때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병사들을 지휘했다. 나폴레옹의 정확한 지휘로 프랑스군은 밀라노도 차지하고 결국 유럽에서 가장 강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였다. 나폴레옹은 병사를 거느리고 당당하게 돌아왔고, 프랑스 국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또다시 이집트로 떠났다. 왜냐하면 이집트를 손에 넣으려는 영국의 계획을 막고, 영국보다 먼저 이집트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함대는 툴롱 항구를 떠난지 한달만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닿았고 카이로로 진격하였다. 이집트에 온지 1년이 지났는데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터키군대와 싸워 이겼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져서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남아 있던 프랑스함대는 영국함대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프랑스군은 단지 두척의 작은 배만이 남게 되었다. 영국함대가 프랑스함대를 격침시킨 것은 나폴레옹을 이집트에 묶어두기 위한 것임을 간파한 나폴레옹은 남은 작은 배를 타고 돌아온다.
나폴레옹이 없는 틈을 타서 프랑스를 공격하려고 했던 오스트리아, 영국등의 나라는 나폴레옹이 돌아오자 포기를 하고 도망을 갔다. 나폴레옹은 이집트로 급히 배를 보내 부하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나폴레옹은 혼란에 빠진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동료들과 의논을 하고 계획을 세웠다. 1799년 11월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정부와 의회를 해산시켰고, 3명의 통령을 뽑아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그중 최고 지도자가 되어 프랑스를 다스렸다. 나폴레옹 중심의 새 정부는 인기를 얻었고, 나폴레옹은 곧이어 종신통령에 취임했다.
나폴레옹과 프랑스정부는 새로운 정치를 펼쳤다.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월급을 주었고, 세금을 공평하게 매겨서 국민을 기쁘게 했다. 또 학교를 많이 세워 누구나 공부할수 있게 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학자를 모아 법률(=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었고, 남자나 여자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모두 평등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00년 프랑스가 안정을 되찾자 나폴레옹은 다시 전쟁을 계획했다. 이탈리아에 가 있던 오스트리아군이 제노바에 남은 프랑스군을 공격하려고 출동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당시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계획을 실행에 옮겨서 알프스산맥을 기어이 넘어서 오스트리아군의 뒤쪽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마렝고 벌판에서 진을 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과 싸웠다. 프랑스군이 알프스를 넘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의 갑작스런 공격에 정신을 못차렸다. 프랑스군은 일제히 쳐들어가서 단번에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나폴레옹은 마렝고전투에서 승리한 후 파리로 돌아왔는데 4년동안은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프랑스를 세계 제일의 나라로 만들고 싶었던 나폴레옹은 1804년 투표를 통해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날에 프랑스 군사들은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훈련 도중에 산더미같은 파도가 밀어닥쳤고, 한 수병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직접 훈련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폴레옹은 보트를 타고서 위험을 무릎쓰고 물에 빠진 수병을 구출해냈다. 그리고 1805년 트라팔가해전에서 프랑스함대는 영국함대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는데, 영국은 위대한 제독인 넬슨제독을 잃었지만 큰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군함은 거의 격침되었고, 에스파냐의 병사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실망하지 않았고 영국을 반드시 정복하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1805년 12월에는 프랑스군은 '전술상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승리하였고 프랑스군은 전유럽을 제압하여 위광을 세계에 떨쳤다.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 21일에 대륙봉쇄령을 내렸는데, 영국은 압도적인 해군력과 식민지와의 무역으로 대유럽 무역중지로 인한 피해를 상쇄할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계속적으로 점령하였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계속 전쟁을 해야 했는데, 1810년 오스트리아의 공주인 마리 루이스와 결혼했다. 이제 유럽에서 나폴레옹의 뜻대로 되지 않는 나라는 러시아뿐이었다. 영국과의 무역에 경제가 좌지우지되던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무시하고 계속 통상에 나서자 프랑스는 보복차원으로 러시아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1812년 5월 나폴레옹은 65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정복하기 위해서 떠났다.
넓은 러시아는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었고, 뜨거운 뙤약볕에 프랑스병사들은 지치기 시작했다. 쿠투조프장군은 모스크바를 비우고 후퇴하는 작전을 사용하여 프랑스군을 러시아 국토 내부로 깊숙히 끌어 들였다. 프랑스군은 9월이 넘어서 모스크바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모스크바 도시 전체는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어느날 나폴레옹은 깊이 잠이 빠져 있었는데, 도시 전체에 화재가 나서 잿더미가 되었다. 불은 며칠 동안이나 계속해서 타올랐다. 프랑스군은 길에서 잠을 자야 했고, 식량도 구할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겨울이 닥쳐왔고, 프랑스군은 얼어 죽었다. 나폴레옹은 눈물을 머금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고, 러시아의 쿠투조프장군의 전략에 무릎을 끓고 말았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패배하고 돌아오자, 프랑스에 점령당했던 유럽 여러 나라들은 독립을 되찾기 위해 일어났다.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해서 전쟁에서 지고 말았고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파리까지 쳐들어왔다. 1814년 3월 나폴레옹은 연합군에게 사로잡혀 나폴레옹의 고향인 코르시카섬과 이탈리아의 중간에 위치한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은 엘바섬 사람들에게 포도밭을 가꾸게 하고 소금을 만들게 하는등, 섬 사람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해주었다. 엘바섬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나폴레옹을 매우 존경했다. 영국의 감시병들은 점점 방심하게 되었는데, 1년쯤 지난 어느날 밤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온 샤프롱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엘바섬을 탈출했다. 한편 연합군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는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새롭게 왕이 된 루이18세는 국민들의 생활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고, 영국이나 러시아의 비위를 맞추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국민들은 나폴레옹을 그리워했고,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은 큰 환영을 받았다. 궁전에 들어서니 루이18세는 이미 도망을 갔고 외국의 군대도 떠나서 나폴레옹은 싸움 한번 하지 않고 황제의 자리를 되찾았다. 나폴레옹이 돌아오자 연합국들은 바짝 긴장해서 회의를 열고 전쟁준비를 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되고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델란드등이 합세했다. 연합국은 100만명 이상이 되는 대군대였지만, 나폴레옹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1815년 6월 100만명의 연합군과 나폴레옹의 군대는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싸웠다.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은 '전진원수(前進元帥)'라고 불리우던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의 도움을 받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워털루전투는 간발의 차이로 나폴레옹이 패배했는데, 워털루전투를 분석해보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극초반에 올인을 해서 한번 승부를 했더라면 이길수 있는 전투였다고 생각된다. 결국 승리의 열쇠는 토탈(Total) 즉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가장 빨리 승부를 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워털루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했고,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나폴레옹은 '백일천하'로 끝이 났다. 나폴레옹은 아프리카 서쪽에 있는 세인트헬레나섬으로 다시 유배를 갔다. '죽음의 섬'이라고 불리우던 세인트헬레나섬은 온통 바위만 있는 섬이었다. 6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폴레옹의 몸에는 이제 무서운 병까지 덮쳐왔는데 나폴레옹은 몸이 쇠약해져서 병을 이길수 없었다. 1821년 5월 5일 저녁 나폴레옹은 52살의 나이로 세인트헬레나섬의 보잘것없는 집에서 생을 마쳤다. 이후 나폴레옹의 관은 나폴레옹이 죽은지 20년만에 파리로 옮겨왔다.
나는 마흔살이 넘은 지금에 와서 나폴레옹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나폴레옹이 여러 어려움을 겪고 인생의 후반부에 실패를 경험하게 된 것을 다시 곰곰히 생각해봤다. 어릴적에는 나폴레옹의 실패가 나폴레옹이 가톨릭교황과 가톨릭에 잘못 보인 것이 문제였다는 쪽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최종적으로 나폴레옹의 실패는 배타적인 프랑스 민족주의가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결론은 앞으로 계속적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프랑스의 네원수라는 결론을 함께 내리게 되었다.
프랑스의 네원수는 워털루전투에서 영국군이 총퇴각을 하는 것으로 오인해 프랑스 기병이 단독 돌격을 감행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영국군 방진에 돌격하게 되어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또한 여러 가지 정황을 분석해볼때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1세의 부하였던 네원수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1세를 배신했다고 판단된다. 프랑스의 네원수가 그렇게 한 데에는 네원수는 자신이 프랑스인으로서 코르시카출신인 나폴레옹1세에 대해서 안좋은 감정과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1세는 혈통이 프랑스인이 아닌 이탈리아인이므로, 프랑스의 네원수가 주축이 되어서 벌인 배타적인 프랑스 민족주의에 방해를 받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고 참패를 겪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외에 나머지 현실에서 벌어진 일들은 수면위에서 벌어진 일이고, 그 밑바닥에는 프랑스의 민족주의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즉 역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전쟁의 천재로 평가되던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1세는 1차적으로 아군인 프랑스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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