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위해 희생한다는것 만큼 경이롭고 힘든일은 없다.
애시당초 희생이 필요할 정도로 커져버린 문제는 분명 단순한 일이 아닐테니까.
여유로운 자신의 무언가를 나누어준다는게 아니라
여유롭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무언가를 포기해야한다는 소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낳은 아이조차도 하루종일 돌봐주는게 버거워 시부모를 부르는 마당에, 답답한 방호복과 마스크를 쓰고 그 어느 장소보다 가장 죽음과 가까운 공간에서 싸운다는게 어떤 심정일지 경험하지 못하고서는 감히 이해 한다고 말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떨어지는건 토끼처럼 빠른데, 회복되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하다. 피로감에 휩싸여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은 끈임없이 도착한다. 그리고 종종 마주할지도 모르는 '죽음'을 마주할때면,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에 대한 깊은 무력감과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슬픔에 자책하고 괴로워할 틈도 없다. 새로운 환자들은, 문제들은 끈임없이 들어올테니, 그러한 감정마저도 사치라고 여기고 스스로를 깍고 마음을 얼린채 머금고 꿋꿋하게 나아가야 한다.
문제는 때때로 그들의 치열한 사투와 노력은 너무나도 쉽게 잊혀지곤 한다는 것이다.
추락해보지 못한 사람은 지금 있는 자리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가 없다. 길고 긴 어두운 밤을 보내지 않는 사람은 다음날 아침해가 얼마나 눈부신지 알 수 가 없다. 기나긴 병에 걸려서 생명의 불길이 작디 작은 촛불처럼 느껴지는게 아니라면 "평범"하게 보내는 일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부신지, 뚜렷하게 와닿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것들은 애초에 당연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평범함"에 지나지 않는 것들일테니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먹고 현관문을 나서면서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먹고 두발로 현관문을 나선다"는 점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는 분명 극악무도한 냉혈한은 아닐지언데, 일상의 건강함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죽음"에 직접적으로 대면하기 전까지는 그 소중함과 고마움을 잊고지내곤 한다.
물론, 일선에 나가서 묵묵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분명 어떠한 보상이나 이득을 생각하고 달려나간것은 아닐것이다. 선의의 마음이라던가
종교적인 신념이라던가, 온정과 공감의 마음이라던가.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응답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달려나간 그들의 행동은 무척이나 고귀하기 때문에, 때때로 그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말하는 것 조차도 어쩐지 조금 속물처럼 느껴질때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나처럼 글로만 감사하다 고맙다고 생색내는게 아니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열심히 노력하고 헌신한 의료진들을 위해서 도움을 주려는 손길들 또한 많이 있었다. 연예인부터 시작해서 누군가의 응원메시지,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아이가 꼬깃꼬깃 써내려간 손편지와 막대한 성금들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보고 있노라면 각박한 일상속에서 아직은 긍정적인 나선이 조금은 남아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기적인 나는, 돈을 준다고 해도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장소로 달려가지는 않을테니깐 말이다.
그렇기에 짤방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조금 아쉽다.
금일봉 까지는 아니였더라도 고생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작별을 하는 미담을 남기는게 정치적으로도 조금 더 똑똑한 행보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것을 탓할수도 없는 노릇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들은 "건강한 일상"을 전제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수면 아래 발버둥이 얼마나 절박하고 힘들었을지 우리는 쉽게 쉽게 망각해버리곤 하니깐. 퇴원하고 나면 병원에서 보냈던 일상은 너무나도 흐릿하고 그냥 잊고싶은 과거가 되어버릴 뿐이다. 과거가 아닌 일상으로 마주하며 사투하고 있는 의료진들은 충분한 수입을 얻고 있으니 괜찮은게 아니냐고 변명하면서. 3교대를 뛰는 간호사의 나이트 근무가 어떤지, 나는 알 수가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피드백은 항상 계절이 느리게 온다.
언제나 그 타이밍은 다시는 되돌리기 힘든 상황때 돌아온다.
언제나 투정을 들어주던 애인과 헤어지고 나서야 묵묵히 감내하던 고마움을 깨닫고, 결혼하고 애를 낳고 나서야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이 얼마나 거룩한것인지 깨닫고만다. 솔선수범하던 장군들과 충직한 병사들이 모두 전멸하고나서야, 바보같은 사령관들은
그제서야 자신의 바보같은 점을 깨닫게 된다.
학교에서 "미친개"들이 촌지를 받으며 신나게 학생들을 패고 다녔을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신나게 맞고 자란 학생이 교육현장을 바꿔보겠노라며 임용고시를 치고 선생이 되었을 무렵에는, 더이상 학부모들은 선생을 믿지 않는다 .
저축통장을 깨고 신나게 사치를 부릴때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텐데, 문제가 터지고 무언가 돈쓸일이 찾아올때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섭섭함은 단순히 의료진들만 누리는 '특권'은 아닐 것이다. 야근수당은 커녕 코로나를 이겨내자며 무급출근을 나서는 회사원들이 있다. 사랑하니까 조금만 참으라면서 마음속에 다이너마이트의 심지를 만지작거리는 사람들도 있을것이다. 딱히 애국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2년 남짓한 시간을 나라를 위해서 춥디 추운 강원도 산골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청춘을 보낸 젊은이들도 있지 않은가. 모두가 힘들고 지치고 피로하기에,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사치스러운 사춘기적 감성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
코로나의 기적이 단 한번의 "기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따뜻하게 이어지는 온정의 불빛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면
타인을 위해 기꺼이 달려가서 싸우고, 힘을 내던 사람들이 피곤함함에 지쳐 쓰러진채, 아무도 깨워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 기적을 위해 일어설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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