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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5/17 0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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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죄와 벌』 기억에 남는 인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 초반부에 주인공 로쟈는 술집에 들어가 자신을 9등 문관으로 소개하는 한 남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남자의 이름은 마르멜라도프입니다.

[그의 시선에는 감격과 같은 것이 빛나고 있었으며 어쩌면 사려와 분별도 들어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동시에 광기와 같은 것도 번득이고 있었다. 그는 낡아서 누더기가 다 된, 단추도 떨어져 나간 검은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단 한개의 단추만이 아직도 간신히 달려 있었는데, 그래도 예의에 어긋나고 싶지는 않은 듯 그는 이 마지막 단추를 꼭 잠그고 있었다.]



가난은 죄악이라며 입을 연 마르멜라도프는 자신이 닷새째 네바 강의 건초 운반선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기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의 아내 카체리나는 나름대로 명망있는 집안 출신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하여 집에서 도망쳤고 언제나 삶이 흘러가는 방식이 그렇듯 남편은 일찍 죽어버리고 혼자 남아 지독한 가난에 못이겨 마르멜라도프 자신처럼 천한 사람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또한 마르멜라도프에게는 카체리나와 결혼하기 전에 얻은 소냐라고 하는 딸이 있는데 계모에게 갖은 구박을 받고 있다고도 합니다.

마르멜라도프는 소냐가 계모의 등쌀에 못이겨 생활비를 벌기위해 처음 매춘을 하고 들어온 날의 처연한 밤을 술에 퍼질러 누워있으면서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는 결핵증세를 보이는 아내와 배곪아 울 힘도 없이 골골대는 아이들을 보다못해 다음 날 자신의 옛상관을 찾아가 복직을 허락받기에 이릅니다.
그 다음에는 갑자기 모든것이 다 잘풀리는 것 같았어요. 첫봉급을 넘겨주자 카체리나는 다정하게 속삭여 주었고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지요. 소냐는 비록 노란딱지가 붙어 같이 살지는 못했지만 먼거리에서나마 응원해 주었고요.
그런데 말이지요. 어찌된 영문인지 어느 무서운 밤, 마르멜라도프는 금고를 열고 집안의 전재산을 훔쳐나와 벌써 닷새째 술을 퍼마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술집에 오기 전 소냐에게 들려 돈을 뜯어냈는데 하는 말이 소름이 끼칩니다.

[이 술도 그애 돈으로 산 것이오. 30코페이카를 꺼내 주더군요. 자기 손으로,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말이오. 내 눈으로 보았소... 그 애는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소... 이 세상이 아니고, 저 세상에서나 그렇게 하지요.. 거기서는 사람들에 대해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 뿐, 비난하지 않아요. 비난하지 않아요! 그래서 더 괴롭소, 비난하지 않는 게 더 괴롭소...! ]



이 인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그는 그저 구제불능의 술주정뱅이인 것일까요?
저는 처음 마르멜라도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이 결론내리고 있는 인생의 원형과 같은 느낌을 그에게서 읽었거든요
제가 그동안 써왔던 수많은 문학적 메타포들이 이미 이 사람에게서 모두 나온 것 같았습니다.
인생의 최고조를 달리고 있는 순간, 모든 것이 순풍처럼 흘러갈때, 어째서인지 도망쳐 버리는 인물에 저는 어릴적부터 매혹당해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제 인생도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했고요.
마르멜라도프의 파멸에는 는  알 수 없는 진리가 숨어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의 진절머리나는 구렁텅이 삶에는 결코 떨어져나가지 않을 마지막 단추 한알과 같은 응축이 느껴졌습니다.

[불쌍히 여겨? 뭣 땜에 나를 불쌍히 여겨! 뭣 때문에 불쌍히 여기느냐고? 그래! 날 불쌍히 여길 건 조금도 없지! 나 같은 놈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돼, 십자가에, 불쌍히 여길 건 없어! 십자가에 못박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러나 재판관,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는 불쌍하게 여겨다오!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내 발로 찾아가리다. 왜나하면, 내가 목말라 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슬픔과 눈물이니까...! 여보게 주인 양반, 이 작은 술병이 나에게 달콤함을 주었다고 생각하나? 나는 술병 바닥에서 슬픔, 슬픔을 찾았던 거야, 슬픔과 눈물을 찾았던 거야. 그리고 슬픔과 눈물을 맛보았고 찾아냈어....]

그는 자신을 경멸하고 경멸을 갈구하지만 동시에 구원에 대한 확신과도 같은 신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그가 생각하는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폐병에 걸린 계모를 위해 몸을 팔고 아비를 가련히 여긴 그의 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 선한 자, 악한 자, 지혜로운 자, 겸손한 자, 나아가 겁쟁이, 염치없는 자, 돼지같은 자들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그의 삶은 무너질대로 무너져 박살이 났는데 그 모습에서 바라고자 했던 원형같은 모습이 보인달까요. 저는 그렇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이 개차반같은 인간인 마르멜라도프에게 제가 그토록 끌렸는지 설명하기란 굉장히 어렵군요.
좀더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애초에 가난하며 빽도없는 하류인생 마르멜라도프에게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딸 소냐가 집에서 나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마치 저당이라도 잡혀있던 것마냥 돈을 받아오고 그 다음날 아침 마르멜라도프가 그의 옛상관을 찾아가 복직이 된 것은 그저 그가 운이 좋아서였을까요? 마르멜라도프는 그 일에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그저 옛상관을 주님앞에 놓인 양초처럼 녹아내리는 분이라고 표현할 뿐이지요.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상관으로부터 받은 돈을 죄다 들고나와 탕진해버립니다. 직장같은건 이제 다시는 없을 테지요. 입고 있던 제복도 팔아버립니다.

죄와 벌에서 마르멜라도프가 등장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입니다. 기껏해야 스무여쪽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마르멜라도프의 이야기는 충격적일만큼 적나라한 가난의 고통을 보여줍니다.
또한 인간은 결국 비열하다는 것과 인간은 결국 비열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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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고양이
20/05/17 00:21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다가 이 부분에서 멈췄습니다. 너무 처절해서 기분이 저 끝까지 가라앉더라구요...
20/05/17 00:25
수정 아이콘
예.. 저도 피지알에 글이나 한편 써볼까하다가 기분이 울적해서 떠오른 인물이네요.
쓰면서 저도 몇년만에 다시 읽어보았는데 아니 이정도였나? 싶을 정도로 막장이긴 하더군요
도스토예프스키소설이 워낙 길다보니까 날림으로 읽는게 많아서 읽을 때 마다 항상 새로워요.. 이런 구절도 있었나 충격적이군.. 하고요
20/05/17 00:40
수정 아이콘
저도 죄와 벌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데 혹시 어느 출판사 버전 추천하시나요?
20/05/17 00:47
수정 아이콘
저는 그 정도 내공은 없지만 제가 갖고 있는 것은 을유문화사 것이고요.
예전에 러시아문학 교수님이 추천하신 판본이니 괜찮을 겁니다
20/05/17 00:49
수정 아이콘
추천 감사합니다..
쿠키고기
20/05/17 09:05
수정 아이콘
아 그 죄와벌이 아니구나....
(딱 제 수준을 보여주는 생각)
20/05/17 09:48
수정 아이콘
꽤 오래 전에 읽었는데 신기하게도 님 글을 보니 최근에 읽은 것처럼 기억이 나네요. 같은 작품을 읽고 다른 생각을 공유한다는 건 참 즐거운 일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강미나
20/05/17 10:36
수정 아이콘
극심한 도박중독이었던 작가 본인의 모습을 담은 캐릭터라 묘사가 소름돋을 정도로 정밀하고 현실적이죠.
나중에 치프킨이 쓴 '바덴바덴에서의 여름' 한 번 읽어보세요. 도박중독이었던 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룬 소설인데 얇고 문장이 아름다워서 금방 읽힙니다.
20/05/18 08:23
수정 아이콘
제목만 보고 마르멜라도프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들어왔네요...
분량이 저리 적은지는 몰랐네요 기억에 아주 강렬하게 남아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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