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는 기나긴 로마의 내전을 종식하고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실상의 독재 권력을 쥐었지만 겉으로는 공화정의 형식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길 원했습니다. 그의 강력한 권력 기반은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대였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그의 집권을 정당화하고 시민들의 인정을 받고자 했습니다.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아 평화의 시대를 선포하고, 측근 아그리파 등을 통해 공공시설을 보수, 신축하고 수도 로마를 화려하게 꾸몄으며, 베르길리우스를 비롯한 시인들을 후원해 아이네이스(Aeneis)와 같은 서사시를 쓰게 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문화를 증진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권을 위한 프로파간다를 삽입했습니다.
1. 카이사르
옥타비우스의 정치적 기반은 그의 양부 카이사르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그를 자신의 양자로 들이고 재산 대부분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때 옥타비우스는 공직에 나설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명예로운 경력(Cursus Honorum)의 첫 번째인 재무관(Quaestor)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서른 살이 되어야 했으나 옥타비우스의 나이는 열아홉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양자가 됨으로써 카이사르에게 충성했던 군대의 지지를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카이사르의 정적들과도 타협하여 정계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안토니우스 등 카이사르파의 지도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등장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키케로 등의 원로원파는 카이사르파를 거느린 안토니우스에게 대항할 방법으로 새로운 카이사르와 손을 잡았고, 옥타비아누스는 전직 법무관 임페리움(Imperium propraetore)을 부여받았습니다. 재무관과 조영관(Aedilis)을 거쳐야 오를 수 있는 법무관의 권한을 획득함으로써 옥타비아누스는 합법적으로 군단을 지휘할 권한과 집정관에 출마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대적했던 안토니우스와 다시 손을 잡고 원로원파를 공격했던 것도 그들이 카이사르의 이름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고, 훗날 이집트를 정복한 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을 제거한 것도 또 다른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점이 작용했습니다.
(물론 이 시점에서 단순히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 카이사리온이 옥타비아누스의 지위를 위협할 수는 없었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처럼 반대파들이 카이사리온을 내세우는 것을 경계했을 것입니다.)
<파르티아 원정을 발표하고 종신 독재관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과 작별하는 카이사르>
이렇듯 카이사르의 후광은 아우구스투스의 중대한 정치적 자산이었지만, 카이사르의 이름이 영광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카이사르를 긍정하는 사람이든 부정하는 사람이든, 모두 그가 스스로 종신 독재관에 취임했다는 것과 공화정을 무너뜨리리라 경계한 반대파에게 살해당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카이사르의 시대에 로마 공화정은 막을 내렸습니다. 공화정의 회복을 선언하고 독재자라는 인식을 피하려던 아우구스투스에게 양부의 이름은 부담스럽게 다가왔습니다. 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인간 카이사르보다 추존된 신격 율리우스(Divus Iulius)를 강조해 독재자의 인상을 지우는 한편, 자신은 신의 아들(Divi filius)이 되었습니다.
2. 로물루스
옥타비아누스가 취하려던 또 다른 이름은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입니다. 내전을 종식하고 공화정을 되살림으로써 아우구스투스가 제2의 건국을 이루었다는 이미지를 내세우려던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로물루스는 전쟁으로 로마를 세우고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또 아직 법질서가 확립되지 못한 로마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왕권의 위엄을 강조하고 사람들의 두려움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로물루스는 왕권을 상징하는 도끼와 채찍을 든 릭토르(Lictor) 12명과 호위대 300명을 대동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원로원으로 하여금 로물루스를 심히 경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흔히 알려진 로물루스의 최후는 그가 천둥과 폭풍 속에서 승천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은 로물루스가 원로원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의혹 역시 존재합니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형제는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발견되었고 나중에 로물루스도 이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후 팔라티누스 언덕으로 이사를 갑니다. 훗날 '팔라딘(Paladin)'의 어원이 됩니다.>
건국자 로물루스는 옥타비아누스뿐만 아니라 공화정 말기 야심적인 정치가들의 눈에 매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로마를 재건국했다는 이미지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야심가들에게 로물루스의 이미지를 씌운 것은 그들 자신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적들 역시 로물루스의 부정적인 면을 들어 그들을 비난했습니다. 마리우스와 술라는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새로운 로물루스라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특히 폼페이우스는, 로물루스를 모방하려다간 그와 마찬가지로 군중에게 살해당하는 최후를 맞이하리라는 경고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카이사르가 왕(Rex)이 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았다면, 로물루스는 그 자신이 왕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그 야심을 두려워한 원로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실제로 카이사르를 살해한 브루투스 일파는 로물루스의 사례를 자신들의 경우와 연관 짓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초법적인 권력, 원로원의 불신, 군중의 지지라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더하여 키케로는 내전을 벌인 카이사르를 비판할 때 로물루스의 예를 들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내전을 통해 동료 시민을 살해한 행위는 형제 레무스를 죽이고 홀로 지도자가 된 로물루스의 행위와 같이 신심(Pietas. 경건한, 충성, 헌신, 효심 등)과 인륜을 모두 저버린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오랜 전란을 끝내고 공화정의 회복과 평화의 시대를 선포하려 했음을 생각하면, 전쟁을 통해 국가를 성장시키고 참주, 형제 살해자의 오명을 쓴 로물루스의 이름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여 옥타비아누스는 처음에 그가 원했던 '로물루스' 대신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3. 누마 폼필리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선택한 또 다른 이미지는 누마 폼필리우스입니다. 카이사르나 로물루스에 비하면 생소한 이름일 것입니다. 누마는 로물루스에 이어 로마의 두 번째 왕이 된 인물입니다. 그는 입법자로 불리며 로마 종교를 창시한 인물로 여겨집니다. 첫 번째 왕 로물루스가 전쟁으로 로마를 건국했다면 두 번째 왕인 누마 폼필리우스는 평화로 나라를 안정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물루스가 세상을 떠난 뒤 로마인들은 사비니족의 누마 폼필리우스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거듭된 설득으로 왕위를 수락한 누마는 그의 신심으로 로마에 새로운 법과 도덕을 세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법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자신이 밤마다 여신과 만나 조언을 듣고 법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꾸며냈습니다. 누마는 로마 종교의 여러 사제직을 설치했고 야누스 신전도 건축했습니다. 야누스 신전의 문은 로마가 전쟁 중일 때는 열려 있고, 평화로운 시기일 때는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은 수백 년간 누마 폼필리우스 시기와 1차 포에니 전쟁 종전 후를 제외하면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와서야 세 번째로 닫혔습니다.
<로마 왕정의 두 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로마의 도덕성을 바로잡고자 옛 종교와 관습을 되살렸습니다. 여러 신전을 보수하거나 신축했고 사제직도 복구했습니다. 그 자신도 다양한 사제직을 역임했습니다. 당시의 문학에서도 옥타비아누스의 종교적 업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마 폼필리우스가 로마에 처음으로 법질서를 수립했다면,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되살려냈습니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모든 신전의 건립자이자 복구자'라고 묘사했습니다.
누마가 신들에 대하여 피에타스(Pietas)를 준수했던 것처럼, 옥타비아누스도 신격 율리우스를 향한 신심과 양부 카이사르에 대한 효심이라는 피에타스를 충실히 지켰습니다. 공화파와 싸워 승리해 아버지의 복수를 한 것, 신격 율리우스를 위한 신전을 봉헌하고 이집트에서 가져온 전리품으로 장식한 것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물루스가 전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누마 폼필리우스가 평화와 안정을 수립한 것처럼, 옥타비아누스도 양부 카이사르와 자신의 관계를 그와 같은 양상으로 묘사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이미지는 독재관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내전의 승리자가 아닌, 신격 율리우스의 아들이자 평화를 가져온 자로 변화했습니다.
4. 아폴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과 아폴로 신의 동일성을 내세웠습니다. 아폴로는 태양의 신이자 의술과 치유의 신이기도 합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폴로와 자신을 연관시킨 것은 우선 카이사르의 생일이 아폴로를 기리는 축일과 같은 날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카이사르를 살해한 공화파들도 아폴로를 정치적 선전에 사용했지만, 공화파에 승리를 거둔 옥타비아누스는 아폴로가 그들을 버리고 자신을 선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궁술과 리라 연주에도 능한 아폴로. 악티움 해전 이후 아폴로는 활이 아닌 리라를 든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전쟁의 승리자가 아니라 평화의 인도자라는 이미지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폴로와 자신을 연관시켰던 것처럼, 경쟁자 안토니우스도 디오니소스 신과의 관계를 강조했습니다. 필리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안토니우스는 에페수스에서 디오니소스 신으로 환대를 받았으며 이후로도 개선식에서 디오니소스로 연출됩니다. 두 사람은 신전을 건축하고 신의 상징물을 차용하는 등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를 통해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동방을 거점으로 한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로마의 새로운 중심지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에 휩싸입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계획도시로 지어진 알렉산드리아에 맞서 로마시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사업에 착수합니다. 이 과정에서 상하수도와 도로를 보수, 정화하고 1년 동안 공공목욕장을 무료로 개방했으며 소금과 올리브를 무상 제공하는 등 다양한 공공서비스 사업을 벌입니다. 그리고 이때 로마시에 있던 동방 출신의 점술가들이 대거 추방당합니다. 이는 모두 옥타비아누스의 수호신인 아폴로의 치유와 정화의 능력을 연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대립을 서방과 동방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설정한 것이기도 합니다. 디오니소스는 아폴로와 같은 예언과 치유의 능력을 지닌 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술(포도주)과 축제, 광기의 신이기도 하며 동방과 인도까지 원정했다고 전해집니다.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동방의 정복자들은 자신을 디오니소스와 동일시했습니다. 안토니우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져!
하지만 전쟁은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기울고...>
옥타비아누스가 아폴로를 수호신으로 강조한 이유 중 하나로 로마인들의 에보카티오(Evocatio) 의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어떤 지역을 정복할 때 그 지역의 수호신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교 제례를 통해 수호신을 불러내어 달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오리엔트 지역은 태양신 숭배가 강했고, 동방을 평정하려던 옥타비아누스는 태양신 아폴로를 대대적으로 내세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필리피 전투와 악티움 해전의 승리가 아폴로의 도움을 받아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훗날 동방을 원정한 로마 황제들의 기념 주화에 태양 상징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안토니우스도 아폴로의 상징을 사용하기는 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대결이 로마 시민끼리의 내전이 아니라,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에게 정당한 전쟁을 선포한 것으로 여겨지길 원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의 승리자가 아니라 외부의 위협을 격퇴한 평화의 인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악티움 해전을 묘사한 장면은 노골적입니다. 서방을 대표해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동방을 대표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맞섭니다. 이마에서 두 줄기의 광채를 발하고 머리 위에는 아버지의 별이 맴도는 아우구스투스의 곁에는 원로원, 인민, 조상신, 위대한 신들이 함께합니다. 반면 안토니우스에게는 동방에서 약탈한 전리품, 그리고 인도와 이집트와 박트리아의 군인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어 넵투누스, 베누스, 미네르바, 마르스 등 로마와 ‘문명’의 신들이 아누비스 등 이집트와 ‘야만’의 신들과 혈투를 벌입니다. 신들의 대결을 통해 악티움 해전의 의미는 그저 내전이 아니라 세계의 운명을 건 싸움으로 확장됩니다. 이 대결은 아폴로 신이 등장하면서 로마의 승리로 끝납니다. 악티움 해전을 문명과 야만, 선과 악의 대결로 규정하고 로마의 강인하고 경건한 문명이 퇴폐적이고 음험한 동방을 물리쳤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이로써 로마는 서방의 중심에서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물론 아우구스투스입니다.
5. 아이네아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승계하기 위하여 그의 가족들, 곧 황실을 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비니족 출신의 누마 폼필리우스 대신 율리우스 가문의 선조인 아이네아스를 본받아야 할 모범 사례로 선택했습니다. 트로이의 왕족 안키세스와 아프로디테(베누스) 여신의 아들인 아이네아스는 트로이가 멸망하자 아버지와 아들을 데리고 트로이를 떠나 이탈리아에 도착해 라비니움(Lavinium)이라는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는 라비니움을 떠나 알바 롱가(Alba Longa)를 세웠으며 율리우스 가문의 시조, 즉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알바 롱가의 왕녀 레아 실비아가 마르스 신과의 사이에서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았고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합니다. 율리우스 가문과 로마의 시조 아이네아스를 가리키는 수식어는 ‘신실한(Pius)’으로, 곧 그의 주된 덕목은 피에타스였다. 가족에게, 그리고 신들에게 신실했던 아이네아스는 누마 폼필리우스를 대신해서 아우구스투스가 모방하고 선전할 수 있는 모범이었습니다.
<로마판 기자조선 + 용비어천가.
카르타고의 디도 여왕과 포에니 전쟁 복선 깔랴, 저승에 내려가서 후손들의 번영을 미리보기 하랴, 힘들다 힘들어>
아우구스투스는 평화의 제단(Ara Pacis Augustae)과 아우구스투스 포룸(Forum Augustum) 같은 건축물을 통해 자신이 가져온 평화를 황실이 이어나갈 것이라 선전했습니다. 마르스 평원에 지어진 평화의 제단에는 율리우스 가문과 로마의 선조들, 아우구스투스와 황실 가족들,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과 어린이들의 행렬 등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제단이 나타내는 주제는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평화와 번영의 황금시대, 그리고 황금시대의 영속을 위해서 율리우스 가문의 세습 계승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를 시침으로 삼아 마르스 평원에 해시계를 설치했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생일인 추분(9월 23일)에 해시계의 그림자 끝이 평화의 제단에 닿았고, 그 부분을 다른 색의 돌로 포장했다고 합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세계의 평화를 가져왔다는 상징입니다.
포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포룸의 중앙에는 복수신 마르스(Mars Ultor)의 신전을 배치했습니다. 과거 아우구스투스는 필리피 전투를 앞두고 마르스에게 양부 카이사르의 복수를 도와주는 대신 신전을 봉헌하겠다고 서약했었습니다. 신전에는 마르스가 곁에 선 베누스에게 무기를 넘겨주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복수의 신이 무장을 해제한다는 것은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의미입니다. 또 마르스와 베누스 모두 로마와 율리우스 가문의 형성에 관련된 신입니다. 마르스 신전 앞에는 사두마차에 타 개선식을 하는 아우구스투스상이 세워졌고, 그 기단에는 원로원이 수여한 국부(Pater Patriae)의 호칭이 새겨졌습니다. 그 주변에는 아이네아스와 율리우스 가문의 선조들, 그리고 로물루스와 공화정의 위인들을 다룬 조각상이 설치되었습니다. 율리우스 가문의 역사와 로마의 역사가 아우구스투스에게로 수렴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단어는 '증대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아우게레(augere)'의 과거분사형이자
'존엄한', '성스러운' 등의 형용사로도 쓰였습니다. '신의 아들'이었던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도 종교적 권위를 갖게 됩니다.>
<참고 문헌>
고경주. 디오니시오스의 로마기원론
김경현(金炅賢).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수도 로마
김경현(金京鉉). 옥타비아누스의 문화정치: 기원전 33년의 공공서비스 사업과 선물 공세를 중심으로
김상엽.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제단
배소연. 기원전 31~27년 옥타비아누스의 모범사례로서의 누마 폼필리우스 활용
안재원. 아이네이스에 그려진 제국 로마와 황제 아우구스투스
최혜영.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아누스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편. 아우구스투스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