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우울증(공식명칭 [우울장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의학적 전문지식은 없이 개인적인 경험에 의거하여 작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고만 하시고 반드시 의사와 상담하실 것을 권장합니다. 소심한 성격이라 개인적인 이야기는 가능하면 안 하려 하는데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으로 적어보려합니다.
1. 몸(정신)의 이상을 느낀건 작년 여름이었습니다. 아니, 그 전부터 이따금 찾아오는 허탈감, 무기력함, 분노, 슬픔, 자괴감 등은 있었지만, 다들 그런건 종종 느끼면서 산다고 생각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죠. 처음에는 한 달에 몇 번 찾아오다가 추석 전후로는 일주일에 하루도 기분 좋게 보내지 못했습니다. 연휴에 부모님 앞에서 한껏 즐거운[척] 연기를 하고 나니 극심한 허탈함과 자괴감이 밀려옴과 동시에 어떤 선을 넘어버렸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2. 그래도 추석 이전까지는 거친 욕설을 내뱉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폭식을 하는 등의 과격한 행위를 통해 어찌어찌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추석 이후로는 제 몸에 고통을 주기 시작했죠. 네, 자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칼로 긋고 이런건 아니고 벽에 머리를 박는다거나 머리카락을 쥐어 뜯는다거나 뺨을 후려갈긴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불안증세가 나타났거든요. 확실히 사람은 머리가 육체를 지배한다는게 맞는 말인게 머리가 미쳐버릴 것 같으니 육체를 손상시켜서라도 안정을 찾으려고 하더군요.
3. 사람이 그렇게 되니 여기서 선을 하나 더 넘으면 TV에서 보던 장정들 여럿이 나를 병원에 끌고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성이라는게 작동하고 있을 때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갔습니다. 11월부터 가려 했는데 저도 문외한인 사람인지라 알 수 없는 공포감과 거부감이 있어 인터넷과 유튜브를 찾아보며 공부를 하다 12월 첫 주에 처음으로 방문했고, 아직도 다니고 있습니다.
4. 병원 진료에 대해 간략히 말하자면 일단,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환자의 심리 내면을 파헤쳐서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건 없습니다. 상담심리학이라고 따로 있다고는 들었는데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병원들은 대부분 해당되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감기에 걸려 내과나 이비인후과에 갔다고 생각해봅시다. 의사는 증상을 물어보고 몇 가지 진단을 하고 약을 처방하면서 물을 많이 드시라 하고 진료가 끝나겠죠. 정신과도 마찬가지로 증상을 물어보고 여러 질문을 하고 약을 처방해주며 약에 대해 설명하는게 전부입니다. (물론 설문지로 심리검사도 하고, 진료시간은 내과보다 깁니다.) 그러니 뭔가 드라마틱한걸 상상하지 말고 약 받으러 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감기 걸렸을 때 솔직히 주사랑 약 받으러 병원 가는거잖아요.
5. 어쨌든 약의 효과는 좋습니다. 이게 개인차가 커서(효과가 1달 이후부터 나타나는 경우도 있음)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저는 약을 먹은 후의 삶이 그 전과 비교하여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음... 달라졌다는 표현은 조금 부정확하고, 예전의 평범한 삶에 가까워졌다 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 약을 먹는다고 무슨 뽕 맞은거마냥 세상이 아름다워지는건 아니거든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거지같고, X같은 일은 여전히 X같습니다. 코로나 종식된다고 해서 이전과 비교하여 업무가 일사천리로 해결된다거나 직장상사가 천사가 되는건 아니잖아요?
6. 덕분에 걱정인 부분도 있습니다. 지금 약을 먹음으로써 예전과 비슷한 삶을 흉내내고 있는데 약을 줄이거나 끊는다면 바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고요. 또한 평생 약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나, 나는 원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가 등. 일단 의사 선생님께서는 상태가 안정이 되면 약을 서서히 줄이는게 기본적인 치료과정이라고 해서 믿고 진행중이긴 한데, 약간의 불안감은 갖고 있습니다.
7. 그리고 약 자체도 정신계통에 작용하는 약이다보니 아무래도 부작용이 있습니다. 역시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속이 울렁거리는 사소한 것부터 졸음이 오거나 두근거림이 있는 중간 정도의 것, 그리고 성 기능이 다소 하락하는(!!) 무시하기 힘든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이런 부작용은 의사에게 이야기 하여 약을 바꿈으로서 어느정도(전부는 안 됨) 해결이 가능합니다. 성 기능 하락은 직접적으로 말하면 지루(사정지연)가 되는건데 제 경우는 약을 바꿔도 완벽히 해결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지루가 되는게 절대 좋은게 아닙니다. 간단한 비유로는 술이 만취한 상태와 비슷한데 사정만 안 되는게 아니라 감도도 떨어집니다.
8.(의료보험 적용 시) 진료비는 처음에는 2만원 정도, 이후에는 1만원 내외입니다. 약 값도 몇 천원~1만원 내외 정도라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습니다. 의료보험 적용과 불이익에 대한 것은 인터넷에 자세히 나와있으니 관심 있다면 찾아보시면 됩니다. 판단은 스스로 하는 것이니 따로 뭐라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9. 우울장애의 증상은 굉장히 다양해서 딱 잡아 어떤 행동을 보이면 우울장애다 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제가 우울장애인줄 몰랐고, 단순히 강박성 성격장애(ex.완벽함을 추구)나 분노조절장애 정도로 생각했죠. 우울장애는 무기력하고 자살충동이 일어난다 정도의 막연한 지식만 갖고 있었으니까요. 따라서 만약 최근에 이전과 비교해서 달라졌음을 느끼신다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느끼신다면 꼭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아보시길 권장합니다.
10. 마지막으로 우울장애는 절대 스스로 치료할 수 없습니다. 왜 흔히 목 앞에 칼을 들이대면 뭐든 못 하냐는 말 하는데, 의지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월급, 진급, 섹스, 덕질(?), 승급전 승리(??), 가챠 성공(???) 등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못 합니다. (뒤의 3가지는 농담입니다. 실제로 힘든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흥미를 주지 못 하더군요.) 가족의 위로, 친구의 조언, 유튜브의 명상 컨텐츠 역시(어느 수준까지 치료되기 전까지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병원을 찾아가시길 다시 한 번 권장하며 글을 마칩니다.
p.s. 주변에 힘들어 하는 분이 있다면 다른 말이나 행동 대신 병원을 같이 가주세요. 병원갈 의욕조차 없어져 포기하거나 정신과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주저하지 않도록.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저도 몇년째 다니는 중입니다. 예전에 먹었던 약은 부작용이 굉장히 심했는데, 약을 바꾸고 나서 부작용은 적어지고 증세도 많이 호전됐네요.
저 같은 경우엔 공황증이 동반되는 불안증이었는데, 이게 진짜 X같습니다. 아무 전조도 없이 갑자기 세상이 지옥도로 변하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어떻게 견디면서 살아왔나 싶을 정도에요.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어려움이 있다면 정신과를 꼭 가보시길 권합니다.
(수정됨)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만 하기에 이런 후기가 매우 귀합니다. 정말 고마운 후기
저같은 경우에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친구들 만나서 밥 먹고 산책 잘 하고, 좋아하는 아이돌 cd도 사고, 좋아하는 게임도 하고 하면서 살고 있거든요. 잠도 잘자구요. 그저 가끔씩 미래의 대한 불안감이 크고,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있는 것 뿐 같은데... 부정적인 생각을 하긴 해도 실천할 용기는 없고. 그냥 의지박약이고 근성이 썩어빠지고 게을러서 그런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커서 가야하나 고민을 몇년 째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얼마전 tv보니 '나 분노조절 장애야' 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실제 그렇다기 보다는 본인이 못 참는 걸 병으로 도망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그런가하고 고민만 하는 나날입니다.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