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배우던 모 선생님께서 진중권과 당시 잘나가던 몇을 평하면서 말씀하시기를,
걔는 두 가지를 하니까 잘 버티는 거야. 정치 얘기 하다가 쫄리면 미학으로 튀고, 미학 깨작거리다 안 풀리면 정치 썰 풀고.
지금이야 무슨 미학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땐 오딧세이가 꽤 팔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걸 듣고 저는 생각했죠. 아, 미천한 내가 버틸려면 두 가지 무기를 갖춰야겠구나. 일명 투트랙 전략.
지금 보면 원트랙도 안 되는 뭐하는 사람인가 싶긴 합니다만.
한 가지로만 구성된 건 은근히 바닥이 보이는 것도 빠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짧은 관점에서 그렇단 거죠.
근데 사람이 얽히면 달라집니다. 브루드워에서는 그 적은 경우의 수로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낼 수 있었는지.
사람과 게임, 동료와 상대방, 두 트랙인가 싶습니다. 3:3헌터...
다른 건 비교적 답이 쉽게 나온다고 착각하는데, 예를 들면 음식이나 오디오 같은 게 저한텐 그렇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던 세월이 언제였나, 지금은 그냥 적당하게만 먹으면 됩니다.
산해진미를 먹어봐도 그냥 특이한 음식일 뿐, 지린다는 맛집을 가봐도 아 맛있네.
음식을 크게 좋아하는 사람과 만난다면 모를까, 짬뽕 땡기면 딱 그만큼만 저를 만족 시켜주면 됩니다.
최상과 최고를 찾아 해매던 시간들은 최상과 최고가 별 게 아니라는 걸 계속 확인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극복하기 어려운 게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신발입니다. 신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오체가 편해 죽겠고 온몸이 막 안 아프고 피곤을 모르고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습니다.
신발을 통해 전해지는 지구의 느낌, 느껴지는 걷는 행위에서 느껴지는 다리와 발바닥의 감각은,
우리가 살면서 쓰는 오감 중에서 가장 단일하면서도 하루 하루의 정신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가장 근간에 있는 감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피곤함, 다리, 발, 신발.
어쩌면 인생살이의 고단함을 그대로 받아주는 매체이자 그 대상으로서 체현하는 대상이 아닐까요. 아 신발.
결국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한 가지 결정적인 개념에 도달하게 됩니다. 편한 신발이라는 이데아 말이죠.
그런데 잠시 편한 신발에 대해서 파고 들어가기 전에, 신발이 갖는 다른 트랙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게 바로 신발을 오묘하고도 요물단지로 만드는 것인데, 뭐냐, 신발은 편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저한테는 수십 가지 컴플렉스가 있는데, 컴플렉스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꺼내면 글을 몇 개는 써야할테니,
컴플렉스는 의식 무의식적으로 없애고 싶어 하는 자기의 요소, 정도로만 하고 넘어가야 될 거 같습니다.
아무튼 저는 발볼러에다가 평발입니다. 평발이니 발이 눌려 당연히 발볼이 넓어지는 거겠죠? 아 아닌가.
암튼 모르고 저는 평발에 발볼러입니다. 게다가 발도 작지 않습니다. 키도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운동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운동화를 신으면 옆으로 푹 퍼진 게 제가 봐도 못났거든요.
그래서 저는 10대 중반부터 워커만 신었습니다.
제가 주로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제일 좋아했던 부분이 아무 신발이나 신어도 되고 교실에서도 실외화를 신는다는 거였습니다.
실내화 없어서 좋고, 워커를 신고 있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렇게 20대 후반까지 거의 워커만 신었습니다.
친구들 중에는 이상한 신발을 신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애도 있었는데,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됐습니다.
이렇게 완벽하고 강한 신발을 신지 않는 게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한 달 넘는 배낭여행을 다닐 때도 당연히 동행했습니다. 다른 신발을 신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뭐 이미 추측하시는 분이 많으시겠지만, 제대하고 워커를 다시 신으려니 예전 같은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무겁다는 느낌이 강했던 거죠. 군화보다야 훨씬 가벼운데 말이죠.
운동화를 한 켤레 신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예쁘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제가 발볼러이기 때문입니다.
별 생각 없이 싼 운동화를 신었고, 별로 예쁘지도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조금씩 업그레이드가 진행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은 운동화가 그렇게 못나지 않았다는 걸 말이죠.
남들은 제 신발을 대부분의 경우, 제가 운동화를 보는 시야각인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칼발러에 비하면 테가 안나지만, 정말 몇 가지 칼발러 전용 신발을 제외하면, 옆이나 앞에서 보는 앞옆에서 보는 모습은
그리 큰 차이가 없다, 봐줄만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알게 되어갔습니다.
갑피에는 재질이 있다. 밑창에도 재질이 있다. 깔창에도 재질이 있다. 중창에는 높이가 있다. 시원한 운동화도 있다.
높은 운동화를 찾기도 하고, 편한 운동화를 찾기도 하고, 깔끔한 운동화를 찾기도 하고.
예쁜 운동화를 찾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 일입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이라는 기준이 생긴 것도 비교적 최근입니다.
소득에 여유가 생기면서, 결정적으로 본가에서 나와 살게 되면서 쇼핑의 1순위가 운동화가 되었습니다.
다른 장비들은, 제 경험에서는 필요한 수준을 채우면 멈추는 지점이라도 있는데,
운동화는 필요가 채워지지가 않는 느낌입니다. 예쁜 운동화가 너무 많고, 지금 운동화에서 끊임없이 아쉬운 점,
지금 제 라인업이 갖추지 못한 것들이 발견되거든요.
브랜드에 대한 취향도 갈수록 넓어지는데, 제 인생에서 세운 신조 중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한 가지가
나이키 신발은 신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워낙 1등 브랜드를 기피해서 그런 건데, 이것 때문에 인생 많이 편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추가) 저는 걷는 건 비교적 잘하는데 서 있으면 죽음인 평발입니다. 군데 군데 서게 되는 쇼핑도 그렇고,
서서 타는 지하철 같은 건 바로 허리까지 아작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여러 궁리를 해왔는데,
단단하면서도 적절한 쿠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발 공간도 편해야 합니다. 불편한 인생 속 편한 신발이지요.
하루를 마칠 때쯤 발과 다리, 허리가 괜찮았고 디자인 면에서도 마음에 든 몇 가지 모델을 찾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프로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너무 주절주절 댔더니 슬슬 글을 정리하고 싶어지네요.
예뻐서 눈에 들어오고, 편하다니 귀가 솔깃하고, 불편해서 찾게 되고, 이제 안 예뻐 보여서 다른 거 찾게 되고,
운동화 말고도 신을 건 많고. 신발장 캐파 안으로는 마무리 해야 할 것 같고.
명품까지는 생각 없지만 이지까지는 갖고 싶고, 콜라보 제품이 예뻐 보일 땐 어찌해야 하는지.
예쁘고 편한 것의 투트랙 사이에서 채워지지 않는 소유욕으로 무간지옥을 겪으며, 막상 신발 신을 일도 별로 없는데!
그러면서 요즘 얻은 중간 결론은, 예쁜 신발은 많지만 편한 신발은 없는 게 아닌가, 불편한 신발은 분명히 있지만,
편한 신발이라는 것 자체가 제가 세상에 부질없이 기대하는 헛바람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인생 신발을 찾아 가고는 싶은데, 그냥 헛되이 살다가 헛되이 죽을 것 같습니다. 피곤하게요.
워커 한 켤레만 신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지금 신발장에서 딱 한켤레만 남긴다면, 글쎄요. 이 신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