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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6/07 23:41:00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1963년 프랑스-독일 화해조약의 뒷이야기

1963년 1월 22일, 프랑스와 독일(서독) 사이 역사적인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궁인 "엘리제궁"에서 조인되었다고 하여 "엘리제 조약"이라고도 알려져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 샤를드골과 독일 총리 콘라드 아데나우어는 이 조약을 반석으로 삼아 프랑스와 독일 백년 간의 갈등을 마무리하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갔습니다. 

 

해당 조약은 크게 (1) 정치/외교, (2) 국방, 그리고 (3) 문화 분야로 나누어져있어, 양국 정상 및 장관급 간의 만남을 상설화, 정기화하여 정치분야와 국방분야에서 협력하고 문화분야에서 특히 교육분야에서 협력하는 것을 명시한 최초의 조약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조약은 프랑스와 독일 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위대한 첫걸음으로 알려져있고, 또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데, 사실 이 조약 체결 뒷배경에는 아주 복잡하고 치열한 음모와 파워게임이 있었습니다. 

 

드골은 원래 2차대전 이후 독일을 철저히 파괴하고자 했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어했습니다. 독일을 조금이라도 이롭게 하는 조치는 강력히 반대하였고, 영국과 미국의 상대적으로 "온화한 독일정책"을 방해하면서 독일에 더 징벌적인 조치를 취하고자 했던 스탈린의 입장에 동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독일과 화해와 협력을 시도한 것은 당연 이상한 일이었죠. (사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독일과 파격적인 화해협력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습니다)

 

드골은 "앵글로색슨"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고, 앵글로색슨(미국과 영국)에 맞서, 그리고 소련에 맞서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축"을 건설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독일과 협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따라서 더욱 과감한 "유럽정책"을 집행하고자 했습니다. 

 

독일의 아데나우어는 드골의 구상에 찬동하는 입장이었는데, 그 또한 소련은 물론 영국과 미국을 믿지 못하는 전형적인 19세기형 대륙 정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76년 생이라 그 시대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함). 드골과 세계관이 상당히 유사하였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유럽의 목표는 동쪽으로부터는 안보를 지켜야 하는 것이며, 서쪽으로부터는 독립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한편 실리적으로도, 독일이 유럽에서 재기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고, 프랑스를 발판으로 삼아 유럽에서 "정당한 플레이어"로 거듭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골과 아데나우어 간의 협상 내용이 알려지자마자 미국은 격노했습니다. 왜냐하면 조약 내용에는 NATO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고, 미국이나 영국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심기를 가장 건드린 것은 조약에 국방협력 관련된 내용을 다루면서도 NATO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은 애초에 드골을 불신하고 있었고, 미국의 "유럽정책"을 위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모든 채널을 가동하여 이 조약을 무산시키고자 은밀히 행동합니다. 먼저 당시 미국 외교의 원로 Dean Acheson을 통해 아데나우어를 압박하였고 미국에 우호적인 프랑스 경제인 Jean Monnet와 독일 외교관 Walter Hallstein을 통해서도 압박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연방의원들에게도 상당한 압력을 행사하면서 "프랑스냐 미국이냐를 선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아데나우어는 당시 이미 상당히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못했고(실제로 4년 후 사망), 정치적으로도 야당의 압력 등으로 불안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미국의 압력으로 결국 독일연방의회는 다음과 같은 전문(Preambule)을 삽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1. 유럽과 미국간의 긴밀한 협력 강화

2.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위해 노력

3. NATO의 틀 안에서의 국방협력

4 GATT의 틀 안에서 영국과 미국에 대한 관세장벽 철폐 

 

이 전문을 삽입하는 것은 엘리제조약의 본질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으로, 드골이나 아데나우어의 의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데나우어는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독일은 이 전문을 삽입한 상태로 조약을 통과시켰습니다. (프랑스 국회가 조인한 조약에는 별도의 전문이 없습니다) 

 

드골은 독일이 이와 같은 형태로 조약을 통과시키자 측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독일은 한 때 나의 가장 큰 희망이었지만, 이제는 나의 가장 큰 실망이라네..."

 

드골의 정치적 목적은 전혀 달성되지 못했지만, 이 조약은 프랑스-독일의 우호를 상징하는 조약을 남아 후일 계속 그렇게 선전되고 기념되었습니다. 그런데 본질은 분명합니다.

 

프랑스와 독일과 같은 당시 서유럽 강국들 또한 미국이 반대한다면 본인들 스스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 그리고 미국은 프랑스-독일 양국관계에서 제3자(Bystander)로 결코 남지 않는다.  

 

이는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아주 준수한 첩보조직, 군사조직 그리고 핵무장 등을 자랑하던 프랑스조차 미국의 의지를 꺽지 못하였고, 독일의 총리는 미국을 상대로 쓸 수 있는 카드가 전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입장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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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20/06/08 01:36
수정 아이콘
당시 미국의 힘을 생각하면 그럴 수 밖에 없겠네요.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데브레첸
20/06/08 01:51
수정 아이콘
독일은 몰라도 프랑스는 독자적 영향력을 위해 핵개발까지 하고, 과거사 문제도 없어 유럽을 주도하는 데 거리낌 없었던 나라인데... 자존심이 걸린 문제죠.
브레진스키라는 국제정치학 석학 말로는 프랑스에게 유럽은 과거 자신의 위대함을 되찾기 위한 수단인데,
최근 마크롱의 대담한 언행도 그 연장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선화
20/06/08 08:36
수정 아이콘
프랑스가 NATO에서 탈퇴했던 시기와 혹시 저 시기가 겹치는 건가요?
내설수
20/06/08 09:46
수정 아이콘
오바마가 브렉시트를 반대한 이유가 저거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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