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극렬 민족주의자 샤를 드골은 서독의 총리 콘라드 아데나우어와 정치인으로서의 유대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깊은 우정을 형성하였습니다. 국가 간의 관계는 물론 [국익]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일종의 자연법칙처럼 작동하지만,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인지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통하는 감정, 요즘 말로 하면 [케미스트리] 없이는 쉽지 않습니다. 여하튼 양국의 지도자가 놓은 초석이 오늘날 유럽연합의 엔진 [프랑스-독일] 축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 드골은 아데나우어의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사로잡은 것일까요?
먼저 당시 객관적 상황을 따져보자면, 유럽대륙을 좌지우하던 것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이었고, 여기에 프랑스가 낄 자리는 없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사회주의자들의 시위, 인도차이나에서의 패퇴, 그리고 알제리에서의 전쟁으로 위신이 추락할대로 추락하여 제4공화국이 붕괴하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정치적 계산이 빠르고 독일인 특유의 냉철함을 가졌던 아데나우어 입장에서 프랑스가 미국과 소련 또는 영국의 대안으로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미국이 독일의 안보를 '무한정', '무조건적'으로 지켜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고, 소련은 더욱 더 믿을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에 운신의 폭을 넓히려면 어쨌든 대안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냉전의 화약고였던 베를린의 운명에 대해서 미국과 소련은 서독의 의중은 무시하고 자기들끼리만 쑥덕쑥덕 거렸고, 또는 독일의 운명에 관한 문제를 미국과 영국이 자기들끼리만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는 가끔 초대되는 정도...)
이런 시기에 아데나우어에게 손을 내민 자가 바로 샤를 드골입니다.
드골은 1958년 9월 14일 아데나우어 총리를 자신의 개인 별장으로 초대하여 하룻밤 묵게 하였습니다. 콜롱베 레되제글리즈(Colombey-les-deux-eglises)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위치한 별장으로 국가 수반 간 만남을 개최하는 장소로는 아주 소박하기 그지 없는 곳이었습니다.
콜롱베레되제글리즈에 위치한 드골의 별장
이곳에서 드골은 아데나우어를 환대하면서 아주 사적인 분위기에서 담소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정상들을 포함하여 프랑스-독일 측 수행원의 숫자도 단 14명. 두 국가의 수반의 만남 치고는 아주 간소한 규모였습니다.
만찬도 대통령궁의 셰프가 아니라 샤를 드골의 부인이 직접 준비하였고, 국가 정상 간 만남이라기보다는 일반 가정에 초대받은 손님과 집주인 같은 만남이었습니다. 드골과 아데나우어는 하룻밤 동안 본인들의 경험담에서부터 시작해서 유럽의 미래와 국제정세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데나우어는 한편 측근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 다르게 드골이 의외로 부드럽고 민족주의적 환상에 빠져있지 않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데나우어는 독일로 떠날 채비를 하면서 드골에게 나무로 된 성모마리아 조각상을 선물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양 지도자 간의 교감을 재확인할 수 있는 선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62년 드골과 아데나우어는 유서 깊은 도시 랭스(Reims)에서, 역대 프랑스 국왕들의 대관식이 열리던 랭스 대성당에서 같이 미사를 보았습니다. 사실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프랑크 왕국의 성지이기 때문에 큰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랭스 대성당에서 같이 미사를 보는 드골과 아데나우어
같은 해 드골은 독일에 국빈자격으로 초청되어 수많은 도시를 순회하면서 각 도시에서 독일 국민 앞에 연설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유창한 독일어로 "독일인들이 위대한 국민"임을 언급하고 "본 만세!, 독일 만세!, 프랑스-독일 우정 만세!"를 외쳤습니다. 사실 이는 아주 재미있는 일화인데 왜냐하면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프랑스인들은 보통 외국어를 정말 못하거든요. 배우려고 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도 유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드골의 독일어는 정말 아주 유창했습니다. 그는 장문의 연설을 전혀 막힘없이 했고, 독일과 유럽의 미래,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의 우정을 얘기했습니다.
드골의 독일어 실력은 유튜브 동영상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의 대독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프랑스의 지도자가 독일어로 연설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일 수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연설을 하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지 않게 반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 이외에도 드골은 정치가로서, 아데나우어의 신뢰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베를린 위기가 한창일 때 드골은 워싱턴, 런던, 파리 사이에서 논의되는 제안들에 대해 아데나우어에게 간략히 알려주면서, 그가 미국/영국/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소외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베를린을 두고 미국과 소련이 독일의 의중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협상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을 때, 유일하게 아데나우어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은 프랑스의 드골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데나우어는 본인 나름대로 영국과 미국을 불신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데나우어가 보기에 영국은 여전히 점령군 행세하면서 서독을 점령국 취급했고, 독일의 자주적 의사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노골적으로 영국 편을 들면서, 아데나우어에게 "프랑스 편을 들면서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어렵게 만든다면 서독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위협했는데, 이는 미국이 다른 동맹국들, 아니 심지어 소련에게도 사용하지 않는 가혹한 언어였습니다.
때문에 아데나우어는 드골 말마따나 앵글로색슨인들이 대륙(유럽)을 깔본다는 것을 재확인하였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이 1962년 영국과 은밀하게 만나 폴라리스형 핵미사일을 제공하는 합의를 하면서 독일은 물론 프랑스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이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 되었습니다.
드골은 아데나우어의 이러한 상황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고, 그와 교감을 이용하여 새로운 유럽을 위한 반석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산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