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알려진 간류지마 결투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사시가 코지로에게 시합을 요청했고 후나지마에서 싸우기로 약속했으나, 무사시는 고의로 약속시간 보다 늦게 결투장에 도착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초조해진 코지로가 애검 모노호시자오를 뽑고 칼집을 던져버리자, 무사시는 "칼집을 버렸으니 그대는 졌다!" 라고 도발을 하였고 이탓에 집중력이 흐트러진 코지로는 무사시의 목검에 맞고 패배하여 죽었다라는 내용이죠.
이 내용이 유명해진 계기는 요시카와 에이지가 무사시의 문하제자들이 기록을 남긴 무공전과 니텐기를 원사료로 삼아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집필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역사 기록에서도 약간씩 상이한 부분은 있지만 대체로 후나지마에서 무사시가 목검으로 코지로와 싸워 이겼다라는 내용은 일치하지요. 최근에 발견된 누마타가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비슷합니다.
분량 관계상 역사 기록 별로 차이나는 서술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으니 표로 정리해 봤습니다. 본문을 읽을 때 참고해주세요.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가 시합을 벌인 시기는 강해풍범초와 병법사범전기에 무사시의 나이 18세라고 적힌 기술대로 년도를 계산하면 1601년이 됩니다. 병법대조무주전래기의 19세를 따르면 1602년, 무공전과 니텐기의 29세로 계산하면 1612년이 되겠네요.무공전과 니텐기의 기록을 제외하면 간류지마 결투는 무사시가 요시오카 일문과 싸우기 전인 10대 시기의 일이 됩니다.
무사시의 니텐이치류 후대 문하제자들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탄지호킨필기, 병볍대조무주전래기와 다르게 니텐기의 원사료 무공전은 무사시가 말년에 받아들인 제자들이 생전에 증언했던 내용들을 종합하여 작성된 기록이기에 다른 무사시측 사료들 보단 신뢰성이 높은 편입니다. 그런 이유로 정설은 무공전의 기록대로 간류지마 결투가 무사시의 나이 29세에 벌어진 일로 받아들이고 있죠.
사사키 코지로는 기록에 따라 부젠국 고쿠라 번 호소카와 가문의 검술 사범이란 설과, 나가토국 쵸슈 번의 검술가란 설로 나뉩니다. 개인적으론 고쿠라와 나가토가 지리상으로 붙어있기에 빚어진 혼동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무공전(武公伝)에 기록된 간류지마 결투의 상세한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간류 코지로는 토다 세이겐의 제자로, 항상 세이겐의 장검 연습상대를 맡아 삼척의 장검을 다룰 수 있게 되었고,18세에 유파를 세워 간류라 칭하였다. 그 후, 고쿠라 성주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마음에 들어 고쿠라에 머물렀다.
1612년, 무사시가 부친 무니와 친분이 있는 호소카와 가문의 가로 마츠이 오키나가(나가오카 사도노카미)를 찾아가서 코지로와의 시합을 청탁했다. 오키나가는 무사시를 자택에 머물게 하고 타다오키공에게 아뢰어 후나지마에서 시합을 성사 시켰다. 시합날 섬에 외부의 출입은 금지 되었다.
시합 전날, 시합의 허가가 떨어지고, 익일 코지로는 호소카와 가문의 배로 무사시는 마츠이 가문의 배로 섬에 도착하도록 전해졌다. 무사시는 기뻐했지만, 곧 고쿠라를 떠났다. 사람들은 고쿠라에 머무는 동안 무사시가 간류의 대단함을 깨닫고 도망쳤다고 수근거렸다. 반면 무사시는 시모노세키 도매상 코바야시 타로에몬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무사시는 오키나가에게 편지를 보내어 폐를 끼친단 이유로 고쿠라를 떠났다고 사정을 밝혔다.
시합 당일, 약속 시간을 알리는 고쿠라 번 측의 전령이 몇 번이나 방문해도 무사시는 늦게까지 자고 있었다. 겨우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한 후, 무사시는 타로에몬으로부터 받은 배 노를 깎아 목검을 만들었다. 그 후, 타로에몬의 가노(무라야 간파치로)를 뱃사공으로 삼아 배를타고 후나지마로 향했다.
기다리다 지친 코지로는 무사시를 보자마자 분연히 「오는 것이 늦다!」라고 말했다. 목검을 들고 무사시가 가까이 다가오자 코지로는 3척의 칼을 뽑아 칼집을 물 속에 던져 버렸다. 무사시는 「코지로, 패하였도다. 이기려면 소중한 칼집을 버리지 않았을터!」라고 말했다.코지로는 화가 나서 무사시의 이마를 베었고, 무사시의 머리띠가 잘렸다. 동시에 무사시도 목검으로 코지로의 머리를 가격했다. 쓰러진 코지로에게 무사시가 다가가자 코지로는 몸을 일으켜서 칼을 휘둘렀고, 무사시의 무릎 위쪽 옷자락을 잘랐다. 무사시는 목검으로 반격하여 코지로의 어깨를 내리쳤고 뼈가 부러진 코지로는 기절했다.
무사시는 손을 코지로의 입가에 대고 숨이 붙어있는 지 확인한 후 심판측에게 인사하고 배를 타고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코지로의 제자들이 화살을 쏘았으나 붙잡히지 않았다.
이 기록은 간류지마 결투 때 무사시가 탄 배를 몰았다고 하는 고쿠라의 상인 무라야 간파치로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내용입니다. 다만 무공전에선 간파치로가 1712년에 이런 증언을 했다고 하는데, 상술된 간류지마 결투 시기가 1612년인 걸 감안하면 무려 증언자가 100년넘게 생존했단 이야기가 되어 모순되는 점이 있지요. 또한 시합을 주선했던 마츠이 오키나가의 마츠이 가문 기록에선 이런 내용이 없고 고쿠라 번과 관계 없는 외부자의 증언만을 원출처로 삼고 있기에 진위를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나중에 발견된 호소카와 가문의 신하인 누마타 가문의 기록과 다르기에, 미야모토 이오리가 세운 고쿠라비문의 내용에 살을 붙여 만든 창작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중이죠. 무사시와 요시오카의 대결을 적은 기록들에도 결투 약속 시간에 일부러 늦게 오거나, 동시에 검을 휘둘러 머리띠를 베였단 내용이 나오는걸로 보아, 그런 기록들을 참고하여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닐까란 시각도 있습니다.
그럼 무공전의 주장과 상반되는 누마타가기(沼田家記)에 적힌 간류지마 결투 기록을 봅시다.
미야모토 무사시 하루노부가 부젠국에 와서 이도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이미 코지로라는 자가 간류 검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제자들끼리 다툼을 벌여 무사시와 코지로가 시합을 하게 되었고 쌍방 모두 시합장소에 제자를 데려오지 않기로 결정했다.
시합 결과 코지로가 패했다. 코지로는 약속을 지켜 제자를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지만, 무사시의 제자는 섬에 미리 도착하여 숨어 있었다. 무사시와 승부에 패해 기절하고 깨어나려는 코지로를 무사시의 제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때려 죽였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코지로의 제자들이 무사시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무사시는 모지성까지 도주, 성주 대리 누마타 노부모토에게 의지했다. 노부모토는 무사시를 모지성에 보호했고, 이후 철포대를 동원하여 분고국에 거주하는 무사시의 부친 무니에게까지 무사히 호위했다.
모지성은 부젠국 고쿠라 번의 번주가 된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가신 나가오카 칸가이유에게 관리를 맡긴 성입니다. 나가오카 칸가이유는 누마타 노부모토와 동일 인물로 여겨집니다. 그 누마타 가문의 기록에서 기존에 알려진 간류지마 결투의 내용과 다른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지요.
누마타 가문의 기록을 보면 시합이 발생한 원인은 의외로 사소해 보입니다. 제자들끼리 우리 스승이 더 세네, 아니다, 우리 스승이 더 강하네하고 다투다 유파 당주끼리 맞붙게 된 것이죠. 개인적으론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연걸이 주연한 영화 '무인 곽원갑'이 떠올랐습니다. 영화 작중에서도 오만했던 곽원갑이 제자 말만 듣고 큰 문파의 수장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승부 끝에 상대 문파 수장을 죽이고 스승의 복수를 하려는 제자에게 가족들이 살해당하는 참혹한 사건을 겪게 되고말죠. 이 모든 일의 원인이었던 곽원갑의 제자는 사실 상대보다 먼저 시비를 걸었었고, 사태가 커지자 도망가 버렸습니다. 헛된 명성만 쫓다가 가족을 잃게된 곽원갑의 충격 받은 표정이 참 인상적인 장면이지요.
제가 굳이 본문과 상관없는 영화 까지 끌고온 이유는 누마타 가문 기록에 나오는 간류지마 결투가 무사시와 코지로가 원해서 벌어진 대결이 아닌 유파와 유파끼리의 분쟁 때문에 생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즉, 검호끼리의 시합이 아닌, 유파간에 벌어진 멸망전이었단 이야기죠. 사실 현대의 인식과 달리 에도시대 초기엔 무사수행자들끼리 시합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미 일가를 이룬 유파 당주들끼리 시합을 벌이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도장깨기를 하여 명성을 얻으려는 도전자들은 문하생 선에서 처리하지 당주가 나설 이유가 없었던 거죠. 이겨도 별로 이득이 없고, 만에하나 지기라도 하면 도장 문을 닫아야하는 손해만 가득한 일이었기에 유파 당주끼리 시합을 기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헌데, 누마타 가문 기록대로라면 무사시와 코지로는 이미 서로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각 유파 제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진 상황이었고 여기서 물러나기라도 했다간 고쿠라 번에서 도장 간판을 내리고 짐싸서 야반도주라도 해야하는 것이었죠.
기록을 처음 읽어보면 제자를 동반하지 않고 혼자 오기로 약속해놓고선 몰래 제자를 숨겨 들여온 무사시가 비겁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시합장소에 늦게오거나 트래쉬 토킹을 하는 등 심리전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무사시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제자를 데려온 행동이 이해 갈만도 합니다. 무사시 입장에선 코지로가 제자를 얼마나 데려올 지 모를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코지로는 혼자 왔고, 무사시로썬 마음에 찔리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무사시가 코지로에게서 이기고도 목숨을 거두지 않고 시합장에서 사라진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러나 무사시의 제자들은 생각이 달랐을 겁니다. 상대는 고쿠라 번에서 세력을 크게 키운 유파 간류. 지금 뿌리를 뽑지 않으면 유파간에 벌어진 분쟁은 끝나지 않을거라 생각햇겠죠. 무사시의 지시인지 아니면 제자들의 독단에서 벌어진 행동인 진 알 수 없지만 무사시의 제자들은 아직 숨이 붙어있던 코지로에게 일제히 달려들어 난도질을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코지로의 제자들은 눈이 뒤집혀서 스승의 복수를 하려고 무사시를 찾아 다녔습니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무사시는 모지성까지 도주하여 누마타 가문에 도움을 요청하지요. 누마타 가문은 이에 응답하여 무려 조총부대까지 동원하여 무사시를 아버지 신멘 무니가 있는 분고국까지 호위해 줍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점은 코지로의 제자들이 무사시를 뒤쫓는데도 코지로를 살해한 무사시의 제자들은 코빼기도 안보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누마타가문이 무사시를 보호하려고 조총부대까지 동원했다는 것이죠. 이 말은 즉, 코지로의 문하 제자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무사시의 제자들이 분노한 코지로의 제자들에게 살해당한건지, 아니면 추격하는 인원 수를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스승을 버린 채 도망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사시가 거느린 제자들 만으론 코지로의 제자들을 당해내기엔 중과부적이었고 고쿠라 번의 가신인 누마타 가문의 힘을 빌려가면서까지 도망쳐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음을 알 수 있죠. 기껏해야 창칼과 활로 무장했을 코지로의 제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조총부대까지 나서야 했다는 걸 보면, 수 백에 가까운 인원이 무사시의 목숨을 노리고 뒤쫓았던 걸로 생각됩니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보건데 코지로 유파의 강대한 세력을 보고 무사시가 염려한 나머지 제자들을 간류지마에 숨겨왔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런가요?
이무렵 무사시의 아버지 신멘 무니는 가신으로 일하던 구로다 가문에서 은퇴하고 분고국에 정착하여 도장을 경영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동시대 호소카와 가문의 가신들에게서 무니로부터 도리류의 면허개전과 인가장을 받았다는 서신이 발견된 사실을 보아 누마타 가문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지요. 어릴 적엔 아버지와 사이가 나빳던 무사시이지만 이 시기엔 화해를 했는 지 아버지가 있는 분고국까지 무사히 피신하고 분노한 코지로의 제자들의 칼 끝에서 벗어납니다. 스승의 복수를 위해 기세등등한 간류 유파였지만 이미 코지로라는 구심점을 잃은 상황에선 숨어지내며 시간을 끌면 자연스레 가라앉을 일이었지요.
무사시는 살아 생전에 요시오카와의 결투를 제자들과 호소카와 가문 가신들에게 자랑스레 자주 이야기 하곤 했었는데, 코지로와 싸운 간류지마 결투에 대해선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대표 저서 오륜서에도 코지로의 언급이 없는 걸로 보아, 무사시 본인에게도 꺼림찍한 경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한편 비참하게 죽은 코지로를 동정하는 여론도 있었는지 서유잡기(西遊雑記 1773)란 기록에선 아카마가세키(현 시모노세키) 지역에서 전해지는 민간전승을 싣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코지로가 결투하러 후나지마로 가려하자 현지 주민들이 무사시가 이미 제자들을 데리고 섬에 건너갔으니 피하라고 만류합니다. 이에 코지로는 "약속하고 가지 않는 건 무사의 수치. 만약 다수로 나를 죽인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쪽은 무사시다." 라고 의연하게 대답한 뒤 후나지마로 갔고 미리 대기하던 무사시와 제자 네명에게 협공을 당해 살해당합니다. 후에 코지로의 의로운 마음을 기리고자 주민들이 무덤을 만들었고 후나지마를 간류지마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지요. 간류지마 결투가 벌어지고 나서 한참 후에야 생긴 시모노세키 지역의 민간전승이기에 역사적 가치는 없는 이야기지만, 누마타 가문의 기록과 부분적으로 일치하기도 하고 최근 무사시의 행적에 비판적인 시선이 많기에 무사시를 깎아 내리는 용도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패자가 아무리 할 말이 많더라도 역사는 승자의 말만을 기록하는 법. 패배한 코지로와 간류는 역사 속 뒷편으로 사라져갔고, 무사시와 니텐이치류는 현재까지 명맥을 남겨 수 많은 창작물들의 소재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혹자는 사료기록 끼리 서술이 다른점을 꼬집으며 무사시와 코지로가 대결한 간류지마가 아예 없었던 거짓이 아니냐고 주장하지만, 글쎄요... 무사시측의 기록인 무공전과 니텐기가 쓰여지기 전인 1737년부터 간류지마 결투는 연극으로 공연될 만큼 유명한 이야깃 거리였습니다. 아무리 무사시가 과장된 검호이고 코지로 또한 별볼일 없는 검객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들 당시부터 간류지마 결투는 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무용담이었던 것이죠.
무사시가 13세부터 29세까지 60여회에 걸쳐 싸워온 시합의 여정은 사사키 코지로를 끝으로 결말을 맺습니다. 생애 한 번 만나볼까 말까한 숙적을 쓰러뜨렸지만 무사시는 허전한 마음을 채우지 못합니다. 검술의 극의를 깨달았는가? 천하에 이름난 야규와 일도류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명성을 얻었는가?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무사시는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지요. 무사시는 요시오카나 코지로 같은 강적들과의 싸움만으론 자신이 원하는 검술의 경지까지 이르지 못할거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수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결말은 새로운 시작을 낳는 것이지요. 무사시의 천하무쌍을 향한 방랑길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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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타 가문의 기록도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사료일 뿐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결투에서 모략을 사용하는 무사시와 다르게 코지로는 정정당당함을 추구하는 멋진 모습으로 나오기도 하네요.
양손검 vs 한손검이라면 양손검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듯이 노다치를 쓰는 코지로를 이기려면 그보다 더 크고 무거운 목검을 쓰긴 했어야 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