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인정했으며, 본디 러시아가 조차하고 있던 중국 산해관 동쪽의 관동주 및 장춘-뤼순간 철도, 사할린 북위 50도 이남 지역, 동해와 오호츠크해 및 베링해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하고 말았습니다.
그 반대급부로 일본이 요구한 막대한 양의 전쟁배상금 지불은 피했지만, 러시아의 동북아시아 영향력이 급격히 퇴조했으며 전쟁의 승자가 일본임을 입증하게 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반발은 러시아와 일본 양쪽에서 일어났습니다.
조약 자체가 양측만이 나서서 체결된 것이 아닌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구속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동북아 영향력 상실과 남만주 상실에 대한 반발, 그리고 조약 체결 이후에도 일본이 지속적으로 군비증강을 하자 이에 경계감이 군부를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비록 상당한 이익을 얻었지만, 배상금을 받지 못하며 단기적으로는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 많은 전비를 지출하고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바쳤는데도 청일전쟁 때와 같이 막대한 양의 배상금을 받지 못했다는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아예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는 포츠머스 조약에 반대하는 폭동까지 벌어졌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따라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재개 위험성이 커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06년 5월에 이르며 상황이 변하였습니다.
사태 변화를 주도한 인물은, 러시아의 신임 외무장관인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백작이었습니다.
1902년에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를 역임한 이즈볼스키는 대일 온건파로 분류되는 외교관이었습니다.
이즈볼스키는 익히 일본과 협상하여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는 대신 만주에 대한 영향을 확고히 하자고 주장하던 사람으로,
그 때문에 대일강경파에게 공사 자리에서 밀려났던 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즈볼스키는 1905년 2월 혁명 이후 기층민중 사이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혁명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러시아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한 개혁을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10년 정도의 평화 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이즈볼스키는,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영국과의 각축인
그레이트 게임을 영국과 협상을 통해 끝내고, 러일전쟁으로 대립한 일본과 대립을 완전히 끝낸다는 발상을 하였습니다.
이즈볼스키는 일본의 위협을 제거하려면 오히려 일본에 외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며, 또한 일본의 군비증강은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허세라고 주장하며 대일보복을 주장하는
인사들, 대표적으로 차르의 사촌이자 군사위원회 의장인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을 설득했습니다.
일본의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은 이즈볼스키의 접근을 환영했습니다.
비록 많은 것을 얻었지만 엄청난 군비를 지출했으며, 그 비용을 보상금을 못받아서 금전적 손실을 본 일본이었기에, 러시아를 상대로 협상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러시아와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공고히 하고 관계를 재정립하는 러일협약 체결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사이온지 내각은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에서 보장받은 어업권을 넘어서서, 쑹화강 일대의 어업권까지 러시아에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협상의 허들을 올리자 러시아의 강경 여론이 크게 반발하면서
협상이 지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1907년에 이르며 러시아와 일본이 협상을 채결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영불협상을 체결하며, 오랜 갈등관계를 끝내기로 합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영국과 계속 갈등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영국의 동맹이고,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맹이었기에,
순식간에 러시아와 일본은 동맹의 동맹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변화에서 러시아는 소외될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는 영국과 영러협상을 체결, 영국과의 오랜 갈등인 그레이트 게임을 끝내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일본 또한 영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협상 허들을 낮추며 러시아와 의견일치를 보려 노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대한제국을 희생시켰습니다.
원래 러시아는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명으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참석시킬 예정이었습니다. 이는 러시아가 을사조약의 부당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영불협약과 영러협약이 체결되고 일본과의 협상타결 가능성이 높아지며,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의 넬리도프 백작은 본국의 지령에 따라 헤이그 특사단의 입장을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1907년 7월 30일, 제1차 러일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와 남만주에 대한 영향권을 보장받았고, 러시아는 북만주와 외몽골에 대한 영향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이렇게 영국-일본 vs 프랑스-러시아의 대립구도는 영국-프랑스-러시아-일본이 독일을 상대로 뭉친 '협상국'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차 러일협약이 러시아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다고 주장하는 여론이 제기되었습니다.
러일협약이 성립되었음에도 일본은 자국의 해역에서 러시아 선박의 조업을 금지한 반면 러시아해역에서는 조업을 확대함으로써 어업협정을 위반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남부 사할린 연안에서 러시아 어선들을 억류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은 그것도 모자라서 동정철도의 정거장 쿠안청쯔(寬城子)가 협정에서 논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역을 양도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일본의 이런 도발적인 행동 때문에 제1차 러일협약에 대한 회의감이 러시아 조야에서 고조되었으며, 연해주 지방에 새로운 철도를 건설하여 일본에 맞서자는 주장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극동지역 방위는 러일전쟁 이후 변변찮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주를 순방한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는 현지를 시찰한 후 극동에서 무력으로 일본을 상대할 수 없다는 비관론을 제기하였습니다.
이것 말고도 만주에 접근하는 미국에 대한 견제 필요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로 러시아 외교의 무게중심은 다시 일본과의 협상과 새로운 협약 체결로 넘어갔습니다.
일본에서도 을사조약의 주역이자 조선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의 외교적 협상을 주장하던 터였습니다.
이토는 러일전쟁 발발 전부터 러시아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러일협상을 넘어선 러시아와의 동맹조약 체결이 필요하다고까지 주장한 사람이었고, 1909년 당시에도 그러한 관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토는 러일동맹 문제를 마침 만주에 체류중인 코콥초프와 당시 러시아가 조차하고 있던 하얼빈에서 논의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돌발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내리자마자 안중근의 총탄에 사살당한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일본측 협상 대표인 이토가 사망하자 협상은 잠시 늦춰졌습니다.
그러나 대세는 새로운 러일협약으로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토 사망 이후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내버려 두는 것에서 아예 합방으로 노선을 바꾼 일본 정부는, 러일협약의 조건으로 일본의 한반도 병탄 묵인을 러시아에 요구하였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한반도가 완전히 일본의 세력권이 되는 것은 우려하고 현상유지를 주장하며 2개월의 시간을 더 씨름을 벌였지만, 결국 협상 결렬 시 일본의 군사력을 당장 당해낼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1910년 8월 4일, 제2차 러일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러시아는 협약의 비밀조문에서 향후 일본의 특별 이익을 강화하고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어떠한 반대도 하지 않기로 결의하여 일본의 대한제국 합방에 사실상 동의하였습니다. 그 대가로 일본은 몽골과 북만주가 러시아의 특수이해 지역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제정 러시아는 피후견국인 대한제국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편 중국 신해혁명으로 인한 외몽골의 독립과 몽골 전역의 혼란을 배경으로 1912년에 제3차 러일협약이 조인되었습니다.
이 협약으로 러시아는 외몽골에 대한 배타적 이권을 재보장받고, 일본은 내몽골에 대한 배타적 이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제3차 러일협약으로 결정된 러시아와 일본의 경계선은, 현재의 몽골인민공화국과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국경선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14년 8월,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하였습니다.
일본은 협상국의 일원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중부열강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엄청난 이익을 누렸습니다.
동맹 국가들이 유럽의 대규모 충돌에서 큰 피해를 보는 동안, 지구 반대편 동아시아의 일본은 최초의 총력전을 겪으며 물자부족에 허덕이는 동맹국에 막대한 물자를 수출하였으며, 독일군이 주둔하고 있는 중국 칭다오와 남태평양의 독일 식민지 섬들을 공격해 점령하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통해 일본의 물자를 제일 빠르게 수송받던 러시아는 일본과 더욱 가까워 질 수밖에 없었지요.
이를 배경으로 러시아와 일본은 1916년에 별도의 동맹조약인 제4차 러일협약을 체결하여 이토 사망 이후 주춤했던 러일동맹 논의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러일동맹의 목적은 전후 동북아 이권에 대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타국의 개입을 배제하고, 동북아시아를 러시아와 일본이 배타적으로 독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러일전쟁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기까지,한때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싸고 전쟁을 벌였던 러시아와 일본은 국제질서의 변화로 인한 전후처리 과정에서3차에 걸친 협약을 맺으며 동북아시아에서 서로의 영역을 나누고 이권을 보장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별도의 동맹조약인 제4차 러일협약을 체결하며 명실공히한 동맹까지 되었습니다.
아마 이 시기는 2020년 현재까지 통들어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밀월관계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최고조였던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1917년 11월에 이르며 한 방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레닌이 등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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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제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은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순식간에 한반도에서 밀려나고 바로 조선을 요즘말로 '손절'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일본하고 협약을 맺고 조율하면서 역사의 톱니바퀴가 움직였군요... 미처 몰랐던 내용,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