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인은 『8월의 폭풍』의 역자이자 연재소설 『경성활극록』의 저자임을 독자분들에게 먼저 알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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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2월, 하바롭스크에서 제3차 극동지방소비에트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회는 극동지방소비에트를 극동의 유일한 대표자라고 인정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대희를 통해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극동 출신 볼셰비키인 크라스노쇼코프를 수반으로 하는 극동소비에트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 극동소비에트의 외무인민위원으로 선출된 사람이 한인 공산주의자인 김알렉산드라로 유명합니다.
이로서 극동에도 소비에트 권력이 등장했으나, 극동은 백군 세력의 발흥으로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 세력은 체코군단이 1918년 5월에 봉기를 일으키자 시베리아와 연해주 일대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극동소비에트에 맞섰습니다.
이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자 소비에트 러시아에 최대 위협으로 부상한 세력은 7월 11일에 수립된 옴스크의 시베리아정부였습니다.
5인 집정 체제로 구성된 시베리아정부는 집정 중 한 명인 흑해함대 사령관 출신의 알렉산드르 콜차크 해군중장이 11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콜차크는 볼셰비키 정권을 전복한 이후 열강에 대한 러시아의 채무이행을 하겠다고 공언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가이다의 체코군단 또한 시베리아정부를 도와 전쟁에서 이기면 체코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콜차크의 약속에 콜차크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1918년 6월 29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체코군 사령관 데이데리스가 첼랴빈스크에서 있었던 체코군단 본대의 봉기에 호응하여 병력을 일으켜 블라디보스토크 소비에트를 무너뜨렸습니다.
이후 연해주에서는 7월에 중동로철도 사령관 드미트리 호르바트 중장, 우수리 카자크의 아타만(족장, 추장) 이반 칼미코프 소장, 블라디보스토크 체코군 사령관 데이데리스가 회합하였습니다.
이들은 소비에트에 반대하는 극동임시정부의 수립을 선언했습니다.
극동임시정부는 콜차크의 시베리아정부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바이칼 호수 인근 지역인 자바이칼 지역에서는 자바이칼 카자크의 아타만 그리고리 세묘노프 대령이 병력을 일으켰습니다.
세묘노프 또한 시베리아정부에 형식상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극동에 난립한 백군 세력은 하바롭스크를 수도로 하는 극동소비에트를 공격했습니다.
극동소비에트 붉은 군대와 시베리아 백군 세력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으나 간섭군의 시베리아 상륙이 본격화되면서 백군이 급격히 우세해졌습니다.
1918년 8월 12일 일본군의 블라디보스토크 상륙이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에 뒤이어 영국군, 프랑스군, 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일본군은 동원령을 발동하여, 3개 사단의 72,400명 병력을 연해주에 상륙시켰습니다.
그 외의 간섭군 병력은 미군 9,000명, 영국군 7,000명, 중국(북양정부)군 2,000명, 이탈리아군 1,400명, 프랑스군 1,300명이었습니다.
일본군의 이런 파병 규모는 적백내전 전체를 통들어 러시아에 파견된 모든 간섭군 병력 중 가장 많은 규모였습니다. 일본군은 이런 이유를 들어 미군을 제외한 여타 간섭군 병력도 모두 지휘통제를 하였습니다.
오타니 기쿠조 대장이 지휘하는 시베리아 파견 일본군 병력, 정식명칭 블라디보스토크 파견대는 보병 제3사단, 제7사단, 제12사단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제12사단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을 시작으로 열강 군대 및 칼미코프 군대와 함께 우수리 철도를 따라서 하바롭스크로 진격했습니다.
칼미코프 군대는 일본군의 지원에 힘입어 하바롭스크를 점령하고 극동소비에트 정부를 축출했으며 우수리강 연안과 아무르 일대를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크라스노쇼코프는 도주에 성공했지만 김알렉산드라는 칼미코프 군대에 붙잡혀 총살당하였습니다.
한편 자바이칼 일대에서는 세묘노프가 붉은 군대에게 밀려 근거지인 치타를 내주고 중국 국경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일본은 세묘노프를 지원하여 8월 16일에는 제7사단 병력을 8월 24일에는 제3사단 병력을 차출하여 9월 1일에 북만주로 파견했습니다.
세묘노프 군대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치타를 되찾고 자바이칼과 몽골에서 맹위를 떨쳤습니다.
미국의 윌슨 행정부는 일본군의 이런 행동에 공개적으로 반발하였습니다.
윌슨 행정부는 일본군의 출병 범위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제한해야 한다며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미국의 항의를 무시하고 진격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바롭스크에는 제12사단, 자바이칼에는 제3사단, 북만주의 만저우리에는 제7사단이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식민지 조선의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한 보병 제19사단에서도 병력을 차출하여 남우수리 파견대로 편성하여 내친 김에 만주와 연해주의 조선 독립운동도 진압하려 들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일본을 적대시하고 세계 식민지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천명하자, 이에 고무된 이동휘를 비롯한 연해주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여 소비에트를 지지하고 있던 차라, 연해주 무장투쟁 운동은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을 계기로 급격히 소비에트로 기울어지며 홍범도와 김경천을 비롯한 여러 독립군 세력이 붉은 군대에 합류하여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한편 1918년 9월에는, 데라우치 내각이 총사퇴하고 야당인 입헌정우회의 총재 하라 다카시가 총리에 올랐습니다.
하라 총리는 야당 당수 시절부터 시베리아 출병에 반대하던 입장이었습니다.
하라 총리는 미국의 항의와 반대를 수용하며 파견 병력을 26,000명 선으로 줄이겠다고 미국에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미국의 불신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1919년 4월을 기점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300,000에 가까운 대병력을 보유하고 우랄 산맥 서쪽으로 진격하여 페름을 점령하고 볼가 강 연안에 도달해 러시아의 제3 도시인 카잔을 위협하던 콜차크 군대가 패배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