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929년의 정세변화와 일본의 위기의식
* 본인은 『8월의 폭풍』의 역자이자 연재소설 『경성활극록』의 저자임을 독자분들에게 먼저 알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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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을 통일할 기세로 기세등등했던 장쭤린의 봉천군벌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2차 북벌을 하며 북진하자, 국민혁명군에게 전투에서 여러 차례 패하고 베이징까지 위협받은 처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때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장쭤린이 궁지에 몰린 틈을 타서 만주에 5개 철도를 일본이 부설하고 운영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약속을 지키라고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지원을 받았지만 과도한 간섭은 경계하던 장쭤린은, 차일피일 핑계를 대며 일본과의 약속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이때 관동주(요동반도)의 조차지와 일본이 만주에서 운영하는 철도의 경비 및 수비를 담당하고 있던 관동군이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관동주에 배치된 관동군은 분명 일본 육군의 일부였지만, 관동군 장교단에는 일본 정부와 동떨어져서 자기들 멋대로 정세를 판단하고 병력을 움직이고 공작을 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관동군의 고급참모인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장쭤린을 제거해야 만주에서 일본이 가진 특수권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휘하 장교 몇명과 함께 장쭤린을 폭살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고모토 대좌의 음모에 따라 장쭤린은 전용열차를 타고 봉천으로 가다가 봉천 인근 황고둔에서 관동군의 폭파공작에 폭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황고둔 사건이라 합니다.
이는 다나카 내각이 의도한 것이 아닌 관동군의 독단행동이었기에, 일본 정부는 매우 당황하였습니다.
다나카 내각은 황고둔 사건이 일본의 행각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고모토 대좌를 예편시키는 것 외에는 따로 행동을 취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기회로 만주를 차지하려는 위험한 기도를 하진 않았습니다.
봉천군벌은 장쭤린의 아들이자 만주의 황태자로 불리던 장쉐량이 계승하였습니다. 장쉐량은 장쭤린의 죽음을 계기로 1928년 12월에 국민정부에 봉천군벌이 귀속된다는 동북역치를 감행하며 전 중국이 일단은 난징 국민정부의 손에 통일되었습니다.
다나카 내각은 반일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국민정부가 중국 전체를 장악하자 매우 우려했지만, 그렇다고 장쉐량이 일본을 상대로 노골적인 반일 행동을 보여주진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사태를 관망했습니다.
한편 동북의 지배자가 된 장쉐량은, 1929년 1월부로 소련이 운영권을 가지고 있는 중동로 철도의 회수를 계획했습니다.
본디 소비에트 러시아는 중국의 지지를 얻고 피압박민족의 해방이라는 이상을 표명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가 중국에서 가진 모든 제국주의적 이권을 반환하기로 선언한 바가 있습니다. 반환하기로 한 이권 중에는 만주의 중동로 철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전 종결 후 피폐해진 국민경제 상황에서 소련은 중국에 가진 이권들을 반환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속 중동로 철도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장쉐량은 장쭤린 암살과 중국 통일로 만주에서 열기를 띄게 된 민족주의 열풍을 무시할 수 없었고, 또 계속된 전쟁과 군비확충으로 엉망이 된 재정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중동로 철도의 회수를 노리게 되었습니다.
장쉐량은 소련 정부에 중동로 철도의 이권회수를 주장했습니다. 이에 소련은 중동로 철도 운영 부서장에 중국인들을 배치하고 직원도 60% 이상을 중국인으로 기용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하였으나, 장쉐량은 중동로의 완전한 회수를 원했고 난징의 장제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외교적 타협을 보지 못하자, 봉천군벌 병력이 7월 11일에 중동로 철도를 무력으로 접수하고 소련 직원들을 추방하였습니다. 이를 중동로 사건이라 합니다.
만주에서 벌어진 소련과 중국의 긴장 사태에, 다나카 내각은 양국 사이에 중재안을 제시하면서도, 은근히 소련의 입장을 편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소련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면서도 중소갈등에서 소련의 편을 들어주는 이유는, 소련이 중동로 철도의 이권을 중국에 돌려준다면 중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을 회수하는 선례가 되어 일본의 만주철도 이권 또한 중국이 돌려달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봉천군벌의 병력은 수십만인 반면, 소련의 극동특별적기군은 2개 사단 남짓한 병력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은 봉천군벌에 유리해 보였고, 일본은 봉천군벌과 소련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련을 지지하여 양측이 장기전으로 가서 서로 소모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소련군이 봉천군벌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만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7월 교섭에서 외교적 해결을 못보자, 극동특별적기군이 투입되어 8월부터 교전에 들어가며 밀산과 왕칭을 비롯한 만주 동부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소련군은 9월부터 공세를 확대하여 보름도 안되는 시간 안에 중동로를 무력으로 회수하고 만주 서북부의 만저우리와 쑤이펀허를 비롯한 요새와 도시들도 2달 만에 장악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장쉐량의 봉천군벌은 군벌 펑위샹과의 전쟁 때문에 바쁜 상황이었던 장제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소련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렸습니다. 봉천군벌은 결국 중동로 철도를 1929년 7월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라는 소련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는 일본에도 적잖은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제까지 소련과 식민지 조선 사이에 믿을 만한 완충지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봉천군벌은 알고 보니 덩치만 큰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존재였으며, 병력이 적은 관계로 큰 위협은 못된다고 생각한 소련군은 봉천군벌 쯤은 숫적 열세에도 얼마든지 박살내 버릴 수 있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는 소련이 마음만 먹는다면 단기간에 만주 전체를 무력으로 차지하고 한만국경에서 소련군과 일본군이 대치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말과 다름없었습니다.
더 이상 봉천군벌은 안정적인 완충지대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이 소련에 더욱 두려움을 품게 만드는 사태가 터졌습니다. 바로 1929년 11월의 경제대공황이었습니다.
미국 뉴욕 증권시장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를 경제 대폭락의 시대로 몰고간 경제대공황에 광풍에서, 산업기반이 타 열강에 비해 취약하던 후발 국가인 일본은 더더욱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일본의 효자 수출종목인 생사(비단실) 수출은 급하락했고 1차 세계대전으로 성장한 해운업 또한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미 1차 세계대전의 전쟁특수가 끝나자 만성적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 경제는 1927년의 금융공황에 겹쳐서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국제적인 금융 시스템 바깥에 있던 소비에트 연방은 스탈린이 1928년부터 시작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통해 농업 국가에서 본격적인 산업 국가로 전환되며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가 대타격을 입은 와중에 홀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서양 열강들도 그랬지만 일본에 특히 두려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일본 육군성에서는 소련의 경제성장과 일본의 경제적 대타격 상황에서 소련과 일본의 군비가 역전되고, 무기 생산량에서 일본이 소련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됨과 동시에 소련이 극동 무력을 확충한다면 일본이 과연 견딜 수 있을지 회의적인 견해를 보이며 공포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때 육군, 특히 관동군의 장교들은 이 사태를 관망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에 밀리지 않도록 일본의 산업능력을 발전시키려면, 일본과 현 식민지의 힘만으로는 한계에 부딛칠 수밖에 없으니, 결국 자원이 풍부한 만주를 장악하여 일본의 산업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허약한 봉천군벌을 치워버리고 제대로 된 완충지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소련과의 관계개선이나 여타 외교적 해결책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의 독단적인 만주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만주사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