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인은 『8월의 폭풍』의 역자이자 연재소설 『경성활극록』의 저자임을 독자분들에게 먼저 알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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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만주국의 건국과 소일긴장의 격화
1931년 9월 18일, 당시 2개 사단과 2개 혼성여단으로 구성된 관동군이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 하얼빈특무대장 도이하라 겐지 대좌, 그리고 작전주임 이시와라 간지 중좌 등 일련의 중견장교들의 음모에 따라 무단으로 월경해 봉천군벌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만주사변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들은 혼조 시게루 관동군사령관에게는 사후보고만 하고, 멋대로 일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특기할 만할 인물은 작전주임 이시와라 중좌로, 그는 서양의 패도를 대표하는 미국과 동양의 왕도를 대표하는 일본으로 세계가 재편되고 미국과 일본의 세계최종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한 이단아였습니다. 그는 만주의 자원지대를 차지해 미국과의 최종전쟁을 대비할 산업능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다닌 사람으로, 만주침공 작전계획은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식민지 조선에 주둔한 조선군사령부도 관동군과 협조하여 장쉐량의 소극적인 대처를 틈타 만주 전체를 휩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무단월경은 내각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은 관동군의 독단행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면서 관동군을 지원할 특별예산이나 편성하는 꼴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중국 측의 강력한 발발을 무릎쓰고 만주 전체를 손아귀에 넣은 관동군은 만주가 중화민국의 고유영토가 아니며 만주에 만주인의 독립국가를 세운다는 명목을 내세우며, 만주 전체를 다스리는 괴뢰국가를 세웠습니다.
관동군은 도이하라 대좌의 공작으로 베이징에서 비밀리에 내려온 청나라 최후의 황제 선통제인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괴뢰국가 만주국의 국가원수인 집정으로 내세웠습니다.
1932년 3월 2일, 만주국의 건국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고, 푸이는 얼마 후 집정에서 만주국의 황제에 올랐습니다. 만주 전체를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이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일본이 만주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는 소련의 극동 안보에 있어서 큰 위기였습니다.
소련 극동군은 얼마든지 처리해 버릴 수 있는 봉천군벌의 허약한 군대가 아닌, 훨씬 훈련되고 조직된 관동군을 국경에서 마주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스탈린의 대응은, 일본에 유화책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냉전과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스탈린이 세계적화에 광분하는 침략적이고 팽창적인 독재자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 스탈린의 전간기 외교정책은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스탈린은 소비에트의 최종 목표인 세계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단 소련이 안정되고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시기에는 제국주의 열강들과의 정면충돌을 회피하며, 5개년 계획을 통해 소련을 산업화하여 내실을 다지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스탈린은 현행 국제질서에서 먼저 긴장관계를 형성하거나 국제질서를 무너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만주사변의 주동자들도 스탈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침략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비록 블라디보스토크 라디오 방송이 1932년 1월에 있었던 이봉창의 쇼와 덴노 폭살 의거를 "이는 천황의 신성성을 아무도 믿지 않는 증거"라고 조롱하자, 관동군이 극대노하여 소련을 반드시 응징, 박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등의 신경전이 있긴 했지만, 소련은 대체적으로 극동의 긴장완화를 우선시하며 대일 자극을 피했습니다.
국제연맹의 가맹국들이 일본의 만주 강점을 비판하면서 만주국을 불승인하고 만주에서 외교공관들을 철수하는 반면, 소련은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불승인하지도 않으면서 만주의 외교공관을 유지하였습니다.
1935년에는 문제의 중동로 철도를 일본에 매각하면서 만주의 이권이 일본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기까지 했씁니다. 중화민국 정부는 이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스탈린은 무시했습니다.
1937년에는 일본과의 잠재적 충돌요소라고 파악한 연해주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키며 충돌요소 자체를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관동군은 이러한 유화 제스처를 모두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관동군은 소련의 유화적 태도를 기만에 위장평화공세로 치부하며 소련이 보내는 외교적 신호보다는 관동군의 무력증강에 대비하여 소련이 극동 무력을 증가하는 상황만 보고 이를 과장하면서 소련의 외교는 모두 거짓이고 실상은 남진하여 만주를 적화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관동군은 소련의 위협을 나날히 강조하며 더 많은 예산, 더 많은 인력, 더 많은 권한을 보장받고 만주국을 사실상 영지처럼 경영했습니다. 괴뢰 황제 푸이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실상 만주국의 정치는 관동군 사령부에서 결정되고 있었습니다. 푸이는 만주국의 정책을 입안하는 관동군 참모부 제4과 과장보다도 권한이 없었습니다.
또한 관동군은 1931년부터 국경지대에서 무단월경과 소대-중대급 무력 도발을 수백번을 자행하면서 스탈린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관동군은 만주국을 완충지대로 둔 것도 모자라서, 중국 화북지방의 5개 성을 중화민국에서 분리시켜서 만주국과 같은 괴뢰정부를 세워 더 거대한 완충지대를 만들려는 화북분리공작을 1935년부터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중일간 긴장이 격화되던 1937년 7월 7일, 베이징의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일본군 병사의 일시적인 실종 때문에 이를 중국군의 공격이라 판단한 일본군이 갑작스럽게 무력행동을 개시하며 중일간 충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악명높은 무다구치 렌야가 이 사태를 확대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노구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 육군성과 관동군은 중화민국의 배후에 소련이 있으며 이 사건은 소련이 계획한 의도적인 도발이라는 지대한 오판을 했습니다. 육군성은 이번 기회에 중국과의 전면전을 통해 화북 전체를 손에 쥐어서 만주국보다 더 거대한 완충지대를 만들자는 음모를 진행시켰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벌어지자, 소련의 스탈린도 다급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비해 약한 중국이 무너진다면, 소련의 동북아 안보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소련은 중화민국의 멸망을 막기 위해 Z작전이라 명명된 대대적인 중국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였습니다.
소련은 중화민국에 2억 5천 달러 상당의 원조자금, 군사고문단, 공군 전투기 및 조종사들, 그리고 수천 문의 화포와 수만 정의 총기를 지원하였습니다. 소련에서 파견된 군사고문단 중에는 훗날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되는 바실리 추이코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중국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결정적으로 일본을 무너뜨릴 도움은 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지원을 통해 중화민국이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수 있더라도 중국이 일본을 단기간에 몰아내지 못하고 약해지며 양측이 다 소모되면 소련에게는 최상의 결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관동군은 소련의 중화민국 지원은 역시 장제스의 배후에는 스탈린이 있다는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다는 자기확신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소련의 유화 제스처를 일본, 특히 관동군은 모두 깡그리 무시하며 무력도발로 일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만주국 건국 이후 소련과 일본의 긴장수위는 갈수록 높아지게 되었는데, 1938년 7월 말에 드디어 크게 폭발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