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가정입니다.(마지막 사진은 오늘날 가정의 이름인 진안현 룽청진에서 진안현 공무원들이 직접 찍은 겁니다) 보면 횡댕그래한 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는건 알 수 있지만 연의에서 묘사하듯이 험한 산 한가운데 좁은 길이 있는 지형은 아닙니다. 그래도 대군이 길을 막으면 쉽게 지나갈 수 없는 지형인건 맞지요.
가정의 평지 너비, 이곳 가정 고전장이라고 되어 있는 평지에 지금은 사라진 성이 있었고 주변의 산이 둘러싸는 형태라면 몇천~몇만의 대군이 길을 막으면 길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두번째 짤은 가정평지와 마속이 올라간 남산 일대의 거리고요.
어쨌거나 그래서 제갈량이 마속을 내세웠더라도 밀렸을거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갈량은 굳이 마속을 선봉에 내세우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군대 중 대군(실제 정사 촉서 표현입니다)을 주어거기 있는 악양성(가정성)에 기대어 수비하게 합니다. 이것은 가정이 천혜의 요충지이자 관중에서 농서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제갈량이 마속을 보내 가정을 지키게 한 것은 200년 전 어떤 용감한 남자가 그보다 처절한 조건에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200여년 전, 서기 32년(건무 8년), 광무제 유수는 농서의 외효와 싸우고 있었는데 유수의 장수들 중 외효의 내부 사정을 잘 알기로는 마원과 필적할 정도였던 내흡이 비상한 기밀 정보를 알게 됩니다. 현재 외효의 모든 병력이 외부 전선에 전진 배치돼 있고 내부는 텅 비어 있다는 것이죠.
건무 8년. 내흡은 기습적인 공세에 나섰습니다. 2천에 불과한 부대를 이끌고 지름길을 달린 끝에 전략요충지인 약양성(略陽城)성 아래에 불쑥 나타났습니다. 외효군의 최고 요충지이나 농서의 심장격인 약양성(略陽城)을 함락시키고 수비대장 금량(金梁)의 목을 벤 겁니다. 내흡은 갑자기 방심하고 있던 악양성에 나타났고 공격에서 비교적 좋은 모습을 보였고, 모든 경비를 피해 불의의 기습으로 성 안으로 휘젓고 들어가 수장 금량을 참살한 것입니다.
약양은 외효가 유수를 상대로 싸우는 전선에서 중심부를 맡고 있던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이 대단했는데, 내흡이 순식간에 그 약양을 함락시켰다는 보고가 양측에 들어가자 반응이 아주 볼 만했습니다. 외효는 자신이 급보를 받을 틈도 없이 빨리, 그리고 얼마 저항하지도 못할 만큼 맥없이 약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그놈(내흡)은 무슨 귀신이라더냐?' 라며 경악했고(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외효는 약양에서 불과 30Km 거리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반대로 유수는 "외효가 의지하고 있는 중심부를 파괴했으니, 남은 무리를 제압하는 것은 쉬워질 것이다" 라며 한결 여유로워진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흡이 약양을 함락시킨 했지만 그 휘하에 있는 병사는 2천 명이 전부였고, 외효가 전력을 다해 탈환하려 한다면 위기가 닥칠 것은 뻔했습니다. 이에 유수의 대장 오한이 다른 장수들과 함께 병력을 모아 내흡을 지원하러 출진했고, 외효는 외효대로 약양을 되찾기 위해 농산 외곽에서 광무제를 상대로 경계를 지키고 있던 병력들을 비롯한 병력을 집결시켜 직접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나섰습니다. 공손술이 파견한 장수들인 이육(李育)과 전감(田弇)의 5천 군대도 외효를 지원했으니, 이로써 세 세력이 엉켜 싸우게 된 격전의 첫 무대는 약양성이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있던 내흡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처지에 떨어졌습니다. 외효는 치열하게 공성을 시도하는 것 외에도 산을 깎고 제방을 쌓아 수공을 가하기도 했는데, 비록 내흡과 그 휘하 2천의 병사들이 일치단결해 막고 있다고는 해도 누적되는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한참을 싸우다 화살이 다 떨어진 그들은 성 안의 집을 헐고 나무를 베어가며 무기를 조달했다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버티는 게 몇 달, 일설에는 4개월이나 갔다고 하니 그야말로 장렬한 공방전을 치른 겁니다. 외효는 필사적으로 공격에 공격을 거듭했지만 끝내 내흡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런 장렬한 전설의 악양성은, 200년후 제갈량에게 큰 믿음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곳은 농서 최고의 요충지이며 여기는 비교적 소수의 병력으로도 지킬수 있다.' 이백 년 후에 이 약양성이라는 곳은 가정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과연 왜 이 자리가 중요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제갈승상이 이곳에 선봉을 둔 것일까? 왜 더 이상 동쪽으로 똑바로 가지 않는가? 왜냐면 악양성, 즉 가정이야 말로 농서와 관중을 나누는 경계선이자 농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죠. 농서로 들어오는 모든 농산제도(陇山诸道)의 합류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즉 농서로 가는 모든길은 약양성을 지나게 됩니다.
가정, 그러니까 악양성의 입지입니다. 왜 제갈량이 이곳을 막아야 한다고 마속에게 대규모 병력과 부장 4명을 딸려 보내 공격시켰는지 알 수 있죠.
따라서 제갈량이 악양성, 그러니까 적이 이 곳으로 올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 가정을 점거한 것은 다음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1, 농산에는 여러 관문이 있고 통로가 매우 많습니다. 서쪽에서 적이 오면 사방으로 소란스러워 지고 모두 장수를 관문마다 배치해야 합니다. 농서군 태수 유초의 항복조건은 '위나라의 원군이 단절되면 항복하겠다'였습니다. 즉 농서를 차지하는 필수 조건은 지원군의 단절입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확실한 농서의 단절을 확보하려면 이 길을 모두 지켜야 철저한 단절이 가능합니다. 일단 제갈량이 도착했을땐 상규에 포위한 곽회와 양주의 서막을 빨리 쳐서 없애야 했습니다. 제갈량의 군대는 현지주민들의 협조로 보급이 돌아가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이곳에서 빨리 위군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되도록이면 많은 병력으로 여길 쳐서 없애야 했고 따라서 이렇게 많은 농산의 요새를 막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최고의 관문에 지원군을 모두 집결시키는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조건을 충족하는 것은 농산에서 뒤로 물러나 있지만 농산제도에서 남하하는 총집합이 되는 길인 약양성, 즉 가정뿐이었습니다.
2. 내흡의 예를 들었지만 악양성은 그렇게 약한 성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농서 최고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악양성은 농서에 소란이 일어날때를 대비해 단단한 방어력을 갖춥니다. 안에 가천정이라고 불릴 정도로 샘도 있어서 적어도 물 부족으로 말라 죽을 일도 없습니다. 이전 하후연도 이 성을 의지해 대군을 주둔시키고 강족과 양수를 토벌했습니다. 이곳은 2천 명 정도의 병사들이 능히 지킬수 있고 설령 수공을 당해도 지휘자의 재량에 따라선 충분히 버틸수 있는 성이었습니다. (수공을 당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가정은 오늘날의 건조하고 횡댕그래 한 모습과 다르게 주변에 물이 풍부하고 수풀이 우거졌을 겁니다.) 약양성은 결코 장안같이 대규모 성이라고까진 할 수 없지만 관동에서 농서로 들어오는 첫 관문으로 교통을 정확하게 막고 있습니다. 그곳의 기능은 단지 대군의 진로를 가로막는 것만이 아니라, 약양은 모든 갱도가 결국 남쪽으로 내려와 합류하는 지점이므로, 이 곳에서 적의 양도(粮道), 즉 보급로를 끊을 수 있는 지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은 결코 악양성을 그냥 지나 감히 남하해 공격하지 못합니다. 내려오는 즉시 보급로가 끊기니까요.
이래서 동쪽에서 대군이 몰려오면 장합에게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1. 이 성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직진한다.
그럼 후속으로 보급로는 분명히 약양 수비군에 의해 파괴되고 장합의 대군은 기병이 탄 말이 먹는 마초와 병사가 먹는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당시 천수, 안정, 남안의 관리들과 주민들은 현재 모두 제갈량의 협력자들이므로 실제 사실상의 홈그라운드는 제갈량이고 어웨이는 장합인 상태이기도 합니다.
2. 일부 병력의 포위를 남겨 두고.주력 대군이 은밀히 남하한다. 그러면 약양성 수비군은 장합이 남겨준 포위망의 포위군을 잡아먹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장합은 병력을 그냥 가져다 바치는거죠, 그러므로 기각입니다.
3. 대량의 병사들에게 성을 포위하게 하고, 일부 선봉군이 남하하여 급한대로 지원한다. 확실히 이러면 약양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이러면 제갈량은 약해진 선봉을 보고 감사하면서 장합을 공격해 남쪽에서 231년에 있었던 일을 3년 앞당길 것입니다.
4. 솔직하게 악양성을 공성해 무너뜨리고, 양도를 통하게 하면서 다시 착실히 남하한다. 결국 노련한 장수라면 네 번째를 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이 천수, 남안, 농서, 안정은 다 제갈량 손에 넘어가고 마속은 구원받을 수 있겠지만요.
따라서 장합이 동편에서 왔다면 원래 4와 같이 진행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요약합니다. 시간이 충분하면 많은 병력을 이용해 실제로 농산의 모든 길을 막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거나 병력으로 모든길을 막을순 없다고 생각할 땐, 가장 중요한 곳을 막는게 우선이고 그게 바로 악양성, 즉 가정이라는 거죠. 또 실제로 농산 모든길에 병력이 분산되어 전방 방어를 하면 외효가 당한대로 어느 한쪽의 길이 그냥 뚫려서 장합군이 농서로 들어올 수 도 있었습니다. 악양성은 적의 시간을 빼앗고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 성을 지켜냈던 곳이고, 실제로 지원군을 약양에 가두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적은 아군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만들었죠. 그래서 제갈량은 마속에게 든든하게 병력을 챙겨줘 가정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200년 전에 어느 맹장이 겨우 이천 명을 데리고, 이 성읍에서, 온 농서지역의 포위 공격을 받으면서도 버텼습니다, 마속이 비록 내흡보다야 역량이 딸리겠지만 병력은 더 많으니 내흡이 여러 달 동안을 지켜냈던걸 재현해 주길 바랬던 것이죠. 200년전 내흡이 단지 약양성에서만 악전고투했다면 마속은 악양성을 중심으로 주변 길목에 진지를 구축하고 가정을 완벽하게 틀어막을 수 있게 말입니다.
제갈량의 심정은 이랬을 것입니다.
이곳은 역사의 시련을 경험해서 승리한 곳이다, 마속 너도 할 수 있다!
이것은 내 계획의 포석이며 승부의 관건이 되는 곳이다!
따라서 여러 번 당부한다, 제발 굳이 일 키우지 마!
제발 경솔하게 굴지 마라!
이번 임무는 거북이가 되는 것이다!
바람 쐬러 나가는게 아니라!
내가 너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으면 주겠다, 절도와 병사들도 마련해 줄게!
...아마도 마속은 보통 드라마들이 묘사하듯이 진지를 세운뒤 제갈량에게 대체적인 진지 상황을 보고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원자 기록대로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올리가 없을겁니다.
袁子曰:亮之在街亭也,前军大破,亮屯去数里,不救;官兵相接,又徐行,此其勇也。
(제갈량이 가정(街亭)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 리 떨어져 있었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관병과 서로 접전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이는 그가 용맹했다는 것이오.)
중국에선 이걸 이렇게 해석하더군요. '사료대로 해석하면 마속이 장합에 의해 무너졌을 때 제갈량은 이미 황급히 원군을 파견하여 가정 수리 이내 밖에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마속은 너무 비참하게 패배하여 더 이상 가정을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갈량은 이 원군을 보태어 시간을 끄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합니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은 이렇게 종료됩니다.
여담: 유수는 다시금 친정을 결행하여 외효를 쳤고, 외효와 공손술의 군대를 쫓아낸 유수는 약양과 내흡을 구해냈습니다. 그는 내흡을 불러 상석에 앉히며 그가 목숨을 바쳐 약양을 지키려 했던 공훈을 크게 칭찬하며 상을 내렸는데, 내흡에게 내린 것 외에도 따로 내흡의 처에게까지 1천 필에 달하는 비단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내흡은 계속 정서군을 감독하며 외효와 공손술을 토벌하는 전쟁에서 상당한 공을 세웠습니다.
p.s 이글은, 중국 삼국지 사이트에서에서 좋아요 4300개 받은 삼국지 글을 번역하고 제가 덧붙인 것입니다.(중간중간 간체자가 보이는건 그래서 입니다) 그글에선 장안에서 농산 같은 산맥타고 넘어서 헐레벌떡 기산까지 달려오는것도 이미 한계인데 가정에서 보급 끊기면 장합은 기산에서 끝이다로 결론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