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제가 수경주를 보면서 5차 북벌을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정사 삼국지와 수경주를 통해 5차 북벌을 한번 재구성해 보려고 합니다.
페이즈1: 한중을 출발해 야곡을 거쳐 위수 남원에 있던 제갈량이 미현을 침공해 일단은 서쪽 오장원에 주둔합니다.수경주 위수주: <위춘추> 왈, 제갈량이 위수 남원에 거하니, 사마의가 제장들에게 말하기를 "제갈량이 만약 무공을 나와, 동쪽으로 돌아 나온다면, 그것은 용기있는 것이다. 만약 서쪽 위의 오장원으로 간다면, 제군들은 무사할 것이다."라 하였다. 제갈량은 과연 (오장)원에 둔하여, 사마의와 서로 막았다. (《魏春秋》曰:諸葛亮據渭水南原,司馬懿謂諸將曰:亮若出武功,依山東轉者,是其勇也。若西上五丈原,諸君無事矣。亮果屯此原,與懿相禦。)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건흥 12년 봄, 제갈량이 큰 무리를 갖추어 야곡으로부터 나왔는데, 유마로 운송하였으며, 무공 오장원을 점거하여, 사마선왕과 위남에서 대치하였다.(十二年春,亮悉大衆由斜谷出,以流馬運,據武功五丈原,與司馬宣王對於渭南。)
자치통감: 제갈량이 미현에 도착하여 위수 남쪽에 진을 쳤다. 사마의가 군사를 이끌고 위수를 건너서 물을 등지고 보루를 만들어 이들을 막으면서 제장들에게 말했다.(이하 위춘추의 말과 동일)
이를 보면 야수, 즉 무공수 바로 남쪽에 있는 오장원은 무공현에 소속됨을 알 수 있습니다. 위수 남쪽은 무공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요. 밑에서도 나오지만 야수는 북쪽 미현에서 위수와 합류하고 바로 그 옆에 오장원이 있기 때문에 이 세 사료를 종합하면 제갈량은 미현과 무공 경계인 오장원과 그 주변에 도착했다고 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아니면 제갈량전 말대로 그냥 무공현 오장원인데 자치통감이 제갈량이 미현에 진쳤다는 진서의 서술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수했다거나) 어쨌거나 사마의는 위남에 진을 치며 제갈량과 대적합니다.
페이즈2: 제갈량이 북원을 노리는것 처럼 보이니 곽회가 사마의에게 북원을 막을 것을 제안한 후 이를 막습니다.삼국지 위서 곽회전: 청룡 2년 (234) 제갈량이 야곡에서 공격하여 나왔고, 아울러 난항에서 둔전을 하였다. 당시 사마선왕(사마의)은 위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곽회는 제갈량이 반드시 북원을 다툴 것이므로 응당 먼저 그곳을 점거해야 된다고 계획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곽회가 말했다.
'만일 제갈량이 위수를 넘어서 (북)원으로 올라와 병사들을 북산에 이어서 농으로 가는 길을 끊어버리고, 백성이나 오랑캐를 동요시킨다면, 이것은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사마선왕은 그의 의견에 찬성하였다. 곽회는 곧 북원에 주둔했다. 참호(해자)와 보루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촉나라 병사가 대대적으로 이르렀으므로, 곽회는 맞아서 그들을 공격했다.
며칠 후,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면서 서쪽으로 진군하였는데, 장수들은 모두 서위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말했지만 오직, 곽회만은 제갈양이 서쪽에서 형체를 드러내는 것은 관병으로 하여금 중병을 서쪽에서 대응하게 하려는 것으로, 실제로는 틀림없이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 과연 양수를 공격하였는데,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공략할 수는 없었다.(青龍二年,諸葛亮出斜谷,並田于蘭坑。是時司馬宣王屯渭南;淮策亮必爭北原,宜先據之,議者多謂不然。淮曰:「若亮跨渭登原,連兵北山,隔絕隴道,搖盪民、夷,此非國之利也。」宣王善之,淮遂屯北原。塹壘未成,蜀兵大至,淮逆擊之。後數日,亮盛兵西行,諸將皆謂欲攻西圍,淮獨以為此見形於西,欲使官兵重應之,必攻陽遂耳。其夜果攻陽遂,有備不得上。)
수경주 위수주: 위수는 또한 동쪽으로 적석원을 지나는데 이는 곧 북원이다. 청룡 2년 제갈량이 야곡에서 나왔고 사마의가 위남에서 주둔할때 옹주자사 곽회가 북원에 주둔해 제갈량과 필쟁해야 한다는 계책을 내고 드디어 그곳을 선점하여 거하니 제갈량이 이르러 과연 얻지 못하였다. 위수는 또한 동쪽으로 오장원의 북쪽을 지난다.(渭水又東逕積石原,即北原也。青龍二年,諸葛亮出斜谷,司馬懿屯渭南,雍州刺史郭淮,策亮必爭北原而屯,遂先據之,亮至,果不得上。渭水又東逕五丈原北。)
즉, 정리하면 곽회전이나 수경주나 모두 곽회 스스로가 계책을 내어 오장원의 북쪽인 북원, 즉 적석원에 주둔했다고 적고 있지 어디 처음부터 양수에서 제갈량을 막으려고 사마의가 파견했다는 진서의 소리는 개소리라고 하고 있습니다.(사마의가 혜성 떨어지는거 보고 제갈량 뒤를 쳤다는 것도 웃긴게 애초에 진서 표현대로 때마침 혜성이 제갈량이 곽회를 공격한 그날에만 갑자기 떨어진다는 것도 웃기고 진서 표현대로가 아니라 정상적인 천문현상을 본 거라면 아무리 못해도 며칠은 족히 하늘에 떠 있었을 혜성을 보고 어느 특정 이 날, 이 시간만이 제갈량이 공격할 시기라고 확신하고 공격을 명령하는 것도 웃기지만 적석원(북원)에서 위수 넘으면 바로 제갈량 본진 오장원, 설령 추격병을 보냈다고 해도 이대로면 제갈량 본진 바로 앞으로 병력을 보낸 셈인데 퇴각하던 제갈량이 오장원 병력과 함께 옳다구나 하고 추격병 잡아먹는게 더 맞는 소리가 될 겁니다. 그리고 진서 천문지에 이 기록 어디로 증발해 버렸습니까?) 이후 곽회는 제갈량의 공격을 막아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후 곽회가 만약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하면 곽회전에 그렇게 적었겠죠. 제갈량이 일부러 병력을 과시하며 서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이자 곽회 주변 장수들은 모두 서쪽에 있는 경계진지, 즉 서위(西圍)를 공격할 것이라고 하지면 곽회는 이는 서쪽으로 군사를 집결시키기 위한 페이크고 실제로는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서위나 양수나 모두 곽회가 주둔한 북원(적석원)을 지키는 방어선임을 알게 해주는 기록입니다. 많은 분들이 서위, 양수를 지명이라고 판단하셨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서위는 그냥 한자 뜻 생각하면 서쪽 진지고 곽회가 북원에 주둔한채 어딜 가지 않았고 명백히 서쪽에 세워진 경계 진지의 대비되는 요소로서 양수를 지목하고 있으니 이는 지명이 아니라 방어선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곽회전 보면 참호(해자)와 보루를 쌓는다고 하고 있죠? 그러니까 서위는 보루(壘)인 것이고 양수는 해자나 참호(塹)라는 것입니다. 양수에서 수(遂)자 뜻 가운데는 도랑이나, 수로(水路)를 뜻하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즉, 곽회는 오장원 북쪽 위수 너머 북원에서 위수를 따라 길게 보루와 해자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제갈량이 넘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겁니다. 이러면 자치통감에서 왜 곽회가 북원에 주둔하여 제갈량을 방어한 것은 기록했으면서 서위나 양수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죠. 어차피 똑같은 북원 방어선이니까요. 어쨌든 이렇게 제갈량이 북원을 넘어 농서로의 진출을 막는 것은 분쇄되지만 위군은 위남에 주둔한 사마의와 위수 북쪽에 주둔한 곽회군으로 분산됩니다.
페이즈3: 제갈량이 위남을 점거합니다.수경주 위수주: 또한 위수는 (미현) 동쪽으로 흘러 무공현(武功縣) 북쪽을 지난다. 야수(斜水)가 남쪽으로부터 흘러 와 (무공)현에서 위수로 유입된다. 야수(斜水)는 (무공)현의 남서쪽 아령산(衙嶺山)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야곡(斜谷)을 흐르고 오장원 동쪽을 지난다. 제갈량은 <여보즐서>(與步騭書, 보즐에게 보낸 서신)에서 "저희 전군(前軍)이 오장원에 있는데 오장원은 무공(武功) 서쪽 10리 되는 곳에 있습니다" 라고 했다. 여수(남은 물, 餘水)가 무공현을 나오니 이 때문에 또한 이 물을 무공수(武功水)라고도 한 것이다. 그래서 제갈량이 표문에서 "신이 호보감(虎步監) 맹염(孟琰)을 보내 무공수(武功水) 동쪽을 점거했는데 사마의가 물이 불어난 것을 틈타 맹염의 영(營)을 공격했습니다. 신이 죽교(竹橋)를 만들며 강 너머로 활을 쏘았고 죽교가 완성되자 급히 달려갔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 물은 북쪽으로 흘러 위수로 유입된다. 지리지에서는 "야수(斜水)는 아령에서 나와 북쪽으로 미(郿)현에 이르러 위수로 유입된다"고 했다.
위수는 또한 동쪽으로 흘러 마총(馬冢) 북쪽을 지난다. 제갈량은 <여보즐서>에서 『마총은 무공 동쪽 1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지세가 높아 이를 공격하기에 불편하니 그래서 머물렀습니다』라고 했다. (又東過武功縣北, 渭水于縣, 斜水自南來注之。 水出縣西南衙嶺山, 北歷斜谷, 逕五丈原東, 諸葛亮《與步騭書》曰:僕前軍在五丈原, 原在武功西十里。 餘水出武功縣, 故亦謂之武功水也。 是以諸葛亮《表》云:臣遣虎步監孟琰據武功水東, 司馬懿因水長攻琰營, 臣作竹橋, 越水射之, 橋成馳去. 其水北流注于渭。 《地理志》曰:斜水出衙嶺, 北至郿注渭。渭水又東逕馬冢北,諸葛亮《與步騭書》曰:馬冢在武功東十餘里,有高勢,攻之不便,是以留耳。渭水又東逕馬冢北, 諸葛亮《與步騭書》曰:馬冢在武功東十餘里, 有高勢, 攻之不便, 是以留耳。)
태평어람: <제갈량집>에서 이르길, 제갈량의 상소가 말하길: 신의 선진 맹염이 무공수 동쪽에 거하니 사마의가 20일간 물이 분것으로 인해 기병만기로 맹염의 진영을 공격했습니다. 신은 다리를 만들었고 적은 다리가 완성된 것을 보고 이로 인해 퇴각했습니다(《諸葛亮集》曰:亮上事曰,臣先進孟琰據武功水東,司馬懿因水以二十日出騎萬人來攻琰營,臣作車橋,賊見橋垂成,便引兵退。)
이제 제갈량은 무공수 동쪽을 점거해 위남. 즉 무공현 남쪽에서의 세력을 늘리기로 작정합니다. 전군, 그러니까 선봉군이 오장원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표현을 보아 제갈량은 북원진출 아니면 위남진출의 이지선다, 이걸 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북원진출 자체가 위남의 위군을 분산시켜 약화시키려는 페이크 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제갈량은 우선 선봉인 맹염을 무공수 동쪽으로 보내 영채를 지었고 제갈량이 위남에서 세력을 늘리는것을 좌시할 수 없었던 사마의는 곧 기병 만기를 이끌고 맹염의 기지를 침공합니다. 아마도 비로 인해 물이 불어 제대로 제갈량이 지원할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공격한거 같은데 제갈량은 맹염이 버티는 동안 무공수 건너편에서 화살(제갈량의 원융노로 추정됩니다)을 쏘아 사마의를 공격하는 한편, 곧바로 다리를 완성시켜 사마의를 퇴각시킵니다.
장익전에도 나오지만 이후 제갈량은 장익을 전군도독으로 세워 사마의가 우려한대로 무공에서 나옵니다. 오주전에는 5월경에 제갈량이'是時蜀相諸葛亮出武功'이라고 하니 제갈량은 5월인 이때 이미 자치통감에 나온 사마의의 우려대로 백성들이 있는 필쟁의 땅 위남을 장악한채 무공에서 나왔던 상태입니다. 진수도 제갈량이 무공에서 무리를 이끌고 나아가 주둔할 근거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로서 무공수 동쪽 마총 인근의 위남 지역은 제갈량이 차지하게 됩니다.
최종 페이즈: 제갈량의 미현 공격과 위남의 촉군, 위북의 위군 대치.수경주 위수주: 위수는 또한 동쪽으로 미현의 옛 성 남쪽을 지나는데, <지리지>가 말하길 우보도위의 치소다. <위춘추> : 제갈량이 미를 침범하자 사마의가 미에 거하여 제갈량을 막았다. 즉, 바로 이 현이다. 위수는 또한 동쪽으로 미오 남쪽을 지난다.(渭水又東逕郿縣故城南, 《地理志》曰:右輔都尉治。《魏春秋》:諸葛亮寇郿,司馬懿據郿拒亮。即此縣也。 渭水又東逕郿塢南)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제갈량은 늘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므로 이에 군사를 나눠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다. 경작하는 군사들이 위수 강변의 백성들과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수경주에 따르면 이제 사마의는 위남이 아니라 명백히 위북에 있는 미현(미오)성에서 제갈량을 막아야 하고 제갈량은 미현 서쪽과 남쪽에서 미현성을 공격하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실제로 고고학적인 발견으로도 수경주의 말 처럼 이 당시 미현성은 위수 동북쪽에 있었고 동한말기(아마도 삼국 초기까지)현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북위시대의 수경주나 당나라 시기 원화군현도지에 따르면 동한시기 미현성은 이미 이 시대엔 고성이 되어 버렸고 미현의 중심은 위수 남쪽으로 이동해서 당나라 이후 현대까지 쭉 거기 있게 됩니다. 어쨌거나 이후부터는 끈질기게 버티는 사마의와 어떻게든 결전을 이끌려는 제갈량의 싸움으로 가게 되지요. 한편 제갈량전에 따르면 제갈량은 위수 강변에서 군사들을 나누어 대규모 둔전을 실지하고 군정을 바로 잡아 인심을 얻습니다. 이는 제갈량이 위수 남쪽 강변에서 둔전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에 따르면 234년의 북벌 중 촉한(蜀漢)이 점거하고 있던 지역의 범위는 오장원 일대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현대 미현(眉县)의 위수 이남지역 전역에 해당되었고, 상당히 적극적으로 다방면에서 촉한군은 이 지역을 점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촉한에 이점이 하나 더 생기는데요, 이런식으로 미현 뒤편 무공현 남쪽까지 군사를 잇는다면 위남에서 야곡도 외에도 당락도/낙곡도를 통해서 이중으로 군사와 식량을 공급받아 활동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낙곡도가 험한 길이긴 하나 군사를 움직이지 못할 길은 아니고(낙곡전투 당시 이곳 수송로에서 대량의 수송로 참사가 난것은 비의가 길을 막은 것의 영향이 컸고 제갈량은 이미 나귀와 노새 대신 잔도에서 운송이 쉬운 목우와 유마를 만들었습니다. 후일 강유가 이 길로 제갈탄의 난때 북벌을 하기면서 2년간 버티기도 했으니까요.) 길이 하나인 것과 두 개 인것은 차이가 있죠.
만약 제갈량이 위남에서 자체적으로 둔전하며 이 곳을 촉의 땅으로 만들어 세력을 넓히고 이 두 길에서 보급을 받으면 위수 남쪽의 장안을 위협해 두고두고 후환이 됩니다. 이러면 장기전으로 갈 시 촉군은 위남에서 세력을 더욱 넓히며 관중평원 상당부분을 장악하게 되고 사마의는 계속 결전을 피하지만 제갈량이 계속 싸움을 거는걸 그냥 지켜볼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결국 사마의에게 남은건 제갈량이 죽길 바라는 것 밖에 없죠.
어쨌거나 이 단계에서 위군과 촉군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은 아마도 다음과 같으리라 예상됩니다.
파란색:사마의
초록색:제갈량
이 단계에서 사마의가 싸우는걸 거부하고 제갈량이 위남 영역을 더 장악해 당락도/낙곡도까지 장악한다면 다음과 같은 구도로 진행됩니다.
파란색:사마의
초록색:제갈량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