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세대인 내게 그 어릴 적 스트리트 파이터2는 정말 신세계였다.
어두침침하고 무서운 형아들로 가득찬 오락실이었지만 손에 100원만 쥐어지면
고민하지 않고 달려가서 레버를 휭휭 돌리며 6개의 버튼을 마구잡이로 눌러가며
어쩌다가 나오는 장풍이었지만 그래도 그거 하나로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내가 하지 않아도 잘 하는 사람들의 게임을 뒤에 서서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좀처럼 되지 않는 기술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승리를 따내는 모습은
정말 꼬꼬마인 나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일의 그림자 던지기 라는 기술은 분명 캡콤이 의도하지 않은 버그일 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마치 하나의 비기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며 동네에서 좀 한다는
친구들은 하나 둘 그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으며 누군가가 그림자 던지기를 시전할 때는
모두가 그의 뒤에 몰려가 우와 라고 감탄사를 내뱉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어느날 학교에서 친구 녀석이 자리에 앉아 자기 가방에서 어떤 종이를 자랑하듯이 꺼냈다.
대체 그게 뭔데 라며 그 종이를 빼앗아 본 나는 눈이 반짝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종이에는 멋드러지게 -지금 생각해보면 세로 비율 조정된 어설픈 견명조 폰트였지만-
가일의 그림자 던지기를 비롯하여, 그외의 스트리트 파이터2의 숨겨진 기술들에 대한 설명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림자 던지기 이외에는 류vs춘리에서 춘리의 옷을 벗기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써있었는데 류가 춘리와의 대전에서 첫번째 판을 퍼펙트로 이기고 두번째 판을 퍼펙트로
지고 다시 마지막 세번째 판을 퍼펙트로 이기면 류의 승리 포즈와 함께 춘리가 옷을 벗는다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도 정말 많은, 믿을 수 없는 내용들이 써져있어서 빨리 오락실에 가서
이것들을 시전해보고 싶다라는 생각만이 내 온 몸을 감싸안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어설프기 짝이 없는 서술들이었다.
가일에 대한 표기는 [군바리]였으며, 달심은 [간디]라고 쓰여져 있었다.
맞춤법이 맞을 리가 없는 말도 안 되는 문장구조로 쓰여져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책까지는 아니지만 종이에 활자로 프린트되어 나오는, 그것도
일반적인 A4용지도 아니었다. 좌우 양사이드에 작은 구멍이 연속적으로 뚫려져 있는
무슨 지질학 데이터에서 쓰이는 것 같은 매우 "전문"적으로 보이는 듯한 인쇄지에
손으로 쓴 글씨가 아닌 프린트되어 있는 활자라니, 이것은 그냥 일반인이 대충 썼다라는
의심을 할 수가 없었다.당시에는 프린터기가 있는 일반가정을 쉽게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사실 그 종이에는 몇십가지의 비기가 적혀있었지만, 가일의 그림자 던지기 이외에는 모두가 거짓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치 의천도룡기의 구양진경을 모시듯 그 어설픈 프린트 용지를 신줏단지 모시듯
성경처럼 섬기며 그 거짓말로 적혀있는 비기들을 내가 그대로 시전했을 때 원하는 결과들이 나오지
않으면, 분명 내가 잘못했던거야, 중간에 다른 방향키가 살짝 눌렸을거야 라고 스스로를 반성했고
주위에서는 아 이게 지금 말고 앞으로 나올 스트리트 파이터2 대쉬 버전부터 적용되는 이야기라고
떠들고 다니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아니야 나 이거 춘리 옷벗는거 어제 누가 하는거 뒤에서 봤어
라고 너무도 당당하게 떠들고 다니던 친구들도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그 내용은 말도 안 되는 거짓이라는 것을 다들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었지만
누구도 그때의 그 프린트 용지에 적혀두었던 거짓들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춘리가 옷벗는 걸 직접 봤다고 하던 녀석들에게 그거 봤다며 라고 한마디 하면 되려
내가 언제 라고 역정을 내는 상황까지 벌어졌고 그걸 처음 가져왔던 녀석은 응 그게 뭔데? 라며
그때 누가 아는 형이 줬던건가 잘 기억이 안나네 라고만 할 뿐이었다.
문득 요즘 여러가지 플랫폼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퍼지고 있는 가짜뉴스의 모습들이
그때 당시의 그 어설픈 프린트 용지에 인쇄되어 적혀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의심없이
그 내용을 믿던 나의 모습들은, 인터넷상에서 마치 그럴 듯하게 영상으로, 웹페이지를 통해서 퍼지는
필터링되지 않은 정보들을 맹신하고 있는 현재의 가짜뉴스들에 휘둘리는 일부의 모습과 너무도 비슷하다.
텔레비젼 뉴스와 같은 형식의 자막과 함께 나오는 영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딘가 검색해서 나온 웹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다라는
이유만으로 말도 안 되는 정보들이지만 의심없이 받아들여 버리는 이들로부터 다시 확대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가짜뉴스의 형태 자체도 너무 비슷하다. 일부 팩트를 먼저 제시하여 신뢰감을 갖게 한 이후에 말도 안 되는 거짓 정보들을 나열하는 방식,
심지어 맞춤법이나 표기, 출처 등에 대한 것 역시 정제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노출되는 그 모습은, 그 예전 내가 보았던 가일의
그림자 던지기를 먼저 서술한 이후에 말도 안 되는 거짓 비기들을 어설프게 써내려간 그 프린트 용지와도 너무 닮았다.
다들 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어느 순간 있지도 않은 비기에 대해 의문이라도 품는 누군가가 있다면 아니야 내가 봤어 라고 답하는.
하지만 이 역시 시간이 흐르면 누가 그랬었냐는 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억속에서 사라질 것이고,
그때 그 가짜뉴스에 동조했던 사람들에 대해 시간이 지나 되물으면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 라고 되물어지겠지.
그리고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럴 것 같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라고.
#사족 1. 간만에 스트리트 파이터2를 플레이 하다가 갑자기 그 때 생각나서 분해서 쓰는 글입니다.
#사족 2. 정치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될 수 있겠으나, 단지 정치 뿐만이 아닌 필터링없이 퍼지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가짜뉴스들을
대상으로 쓴 글이기에 카테고리는 정치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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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정보를 먼저 줘서 신뢰도를 높인 후에 가짜 정보를 유포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이나 효과적이죠.
증권가에 돌아다니는 찌라시들을 보면 하나같이 비슷한 패턴인데, 일단 초반에는 연예인 xx가 누구랑 열애중이다 등의 내용이 먼저 나오고, 이런 뉴스들은 대부분 맞습니다. 아직 언론에 퍼지지 않았지만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얻은 진짜 정보거든요.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뉴스들(주로 돈 될만한...)은 대부분 가짜에요. 거기에 낚인 개미들을 털어먹기 위한 작전세력의 수작질이죠.
춘리는 그당시 모두의 염원이 더해졌어서 일지도... 그래야만해라는 사심이 포함된거죠.
가짜뉴스도 마찬가지로 뉴스로 받아들이기보다 진짜여야만 해라는 끈을 계속 잡고있는 현대인들의 잘못된 바램을 이용하죠.
이건 아마도 종교가 제일 익스트림일듯.. 어쨋건 모든 인간이 잘 속는다는건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