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소개해드렸던 개미 전용 피더
[파일런]과 마침 다 떨어진 제국방위체계 플루온의 최신 버전이 있어서 아마존에서 구입했습니다. 아마 예송논쟁 때 쯤 구입했을 겁니다. 너희들은 싸워라 나는 개미를 키우련다...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요. 그리고 유구한 기다림의 세월을 견뎌서 오늘 문득 한 통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DHL인데, 불문곡직하고 저런거 '워드'로 써서 메일로 회신해달라더군요. 무슨 물건이고 뭐에 쓸 거냐고... 랜덤 뒤지기에 걸린 건지 뭔지 영문을 모르겠는데, 곡절도 설명하지 않고 그냥 '야 보내' 이럴 게 아니라, '이러이러해서 필요하다니까 보내주시겠어요?'라고 하면 안되는 걸까요? DHL 이 싸가지들 확... -_-
제가 이리 까칠한 정신상태인 것은 얘들 때문입니다. 반짝반짝 정말 너무 예쁘죠? 유광블랙 컬러가 장점이라는 흑색패인왕개미,
[검은십자군] 아이들보다 광택이 더 빛납니다. 검은십자군이 세차 후의 광택이라면 얘들은 비싼 왁스 박박 먹여준 광택, 혹은 말년 병장이 혼을 담아 불광낸 A급 전투화에 비견할 수 있겠네요. 얘들은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귀한 개미 중 하나일 겁니다. 광택불개미(Formica candida)라는 녀석들입니다. 주로 제주도와 강원도 일부 고산 지역에서만 더럽게 가끔 채집이 가능하고 다른데서는 보기가 더럽게 힘들며, 보시다시피 더럽게 예뻐서 더럽게 비싼 개미입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인공 3Q15W 군체입니다. 저 중 하나의 여왕은 분열로 처형당하고, 나머지 2Q15W를 제가 데려왔습니다.
지난번에 보여드린 바 있던 미니 사육장에 아늑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두 여왕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 정말 흐뭇합니다. 사실, 저의 드림개미였습니다. 광택불개미 복수군체와 기회가 된다면 가시개미 기생군체를 만들어 키우는 것이지요.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애지중지하며 먹이를 줄 때도 행여나 우리 여왕님들 놀라시진 않을까 저어하며 호흡조차 습습후후 컨트롤 해가면서 살금살금 수라상 올리곤 했습니다. 다행히 먹이반응은 초기군체 치고는 나쁘지 않았어요. 밀웜도 잘 먹고...
초기 군체라서 아주 작은 미니사육장과 먹탐장을 세팅해 주었기 때문에, 파일런을 이용한
[넥타르] 급여가 불가능했습니다. 파일런이 안들어가는 사이즈라서요. 넥타르는 꿀과 포도당이 함유되어 아주 끈적이는 액체입니다. 조금만 과하게 줬다간 애들이 익사합니다. 그래서 피더를 이용하거나 스펀지, 휴지 등에 적셔서 줍니다. 다만 후자는 빨리 건조되거나 곰팡이를 부르는 문제, 그리고 애들이 휴지를 죄다 찢어 난장판을 만드는 문제 등이 있어서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곤충젤리를 조금 급여했습니다. 다행히 이것도 잘 받아먹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입양 후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터졌습니다. 두 여왕 중 덩치가 조금 더 작은 가칭 베타가 의문사한 것입니다. 더 큰 덩치의 알파는 아직 잘 살아있고, 먹이 급여 상태도 양호해 보였습니다. 여왕의 배를 살펴보면 얘가 뭘 얻어먹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먹이가 들어간 배에는 투명하게 먹이가 비추고, 무엇보다 빵빵하거든요. 베타의 사인을 몰라 불안한 가운데, 일단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습니다. 광택불개미 콜로니는 깜깜하고 보다 서늘하고 서큘레이션 시스템이 잘 갖춰진 수납공간 안으로 옮기고 보다 안전하고 청결한 먹탐장에 먹이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노력은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알파도 힘없이 늘어진 주검이 되어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수 군체에서 여왕만 쏙쏙 암살당하듯 쓰러진 것이 정말 미칠 노릇입니다... 이제 남겨진 알과 애벌레, 고치, 그리고 15마리의 워커는 여왕이 없는, 다시 말해서 미래가 없는 군체가 되어 멸망의 초시계를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이 워커들이 수명사하면 이 콜로니는 전멸, 사실상 여왕과 함께 저의 광택불개미 콜로니는 열흘만에 멸망한 것입니다. 엄청난 경제적 손실도 손실이지만, 가장 원했던 개미 군체를 이렇게 허무하게 멸망시켜 버린 것이 뼈가 울리도록 아픕니다. 심지어 이것이 제 손에서 멸망한 첫 콜로니입니다. 첫 패배를 월드컵 결승전에서 맛본 기분이 이럴까요.
여왕 급사의 원인은 아무래도 높은 기온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미들은 컴퓨터와 친칠라 사육장이 있는 저의 서재에 있습니다. 컴퓨터의 무자비한 활동량으로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으면 30도는 우습게 찍는 공간이지요. 아무래도 제가 방을 비운 시간에 기온이 올라가서 그게 고산지대의 서늘하고 흐린 곳에 사는 얘들을 괴롭힌 것이 아닌가 추측중입니다.
그리고 그 예측은 맞은 듯 합니다. 일~월까지 집을 비운 사이에 에어콘을 가동하지 않았는데, 13마리의 워커가 절명, 1마리는 빈사, 1마리는 쇠약해진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집을 비운 사이에 어떤 분께 방의 기온 관리를 부탁했으나, 잠시 잊으신 사이에 방의 기온이 31도를 찍은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전원을 꺼두고 나갔던 컴퓨터가 쌩쌩 잘 켜져 있더이다... 남은 두 마리라도 살려보려고 했으나, 안락사 결심할 것도 없이 곧 두 마리 모두 숨졌습니다. 며칠사이에 여왕 두 마리와 워커 15마리가 깨끗하게 전멸하는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지니 멘탈이 참... 후...
만일 다른 군체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상심하고 실망했겠지만, 이 정도의 타격은 없었을 것입니다.
[불꽃심장부족]이 전멸하면 정말 미칠 노릇이지만, 한국홍가슴개미는 또 구해서 키울 수 있으니까요. (냉정)
[일몰망치군단]은 한강만 나가도 널려있지요. 하지만 광택불개미는... 1년 기다려서 떼돈을 퍼부어야 한 군체 입양할 수 있을까 말까에, 직접 채집은 저같은 초보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라서요... 휴... 정말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이번 실패를 발판으로 잘 키워보고 싶습니다... ㅠ_ㅠ 하지만 안될거야... 안될거야...
결국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요새들어 먹이반응이 폭주하는 불꽃심장부족입니다... 하도 잘 거둬먹여서 그런가 발색이 빨갛게 잘 올라오고 있어요. 가끔 가슴부분이 하얗거나 노란 워커가 보이는데, 이는 아직 우화한 지 얼마 안되어서 색이 덜 올라온 애들입니다. 군체의 성장이 체감될 정도라서 흐뭇하... 후... 광택불개미... 화무십일홍이라더니... ㅠ_ㅠ
남들 다 가고서도 마지막까지 넥타르 먹부림을 위해 파일런에서 떨어지지 않는 워커녀석을 구경하고 있는데, 옆에서 열심히 흙을 나르는 다른 워커가 눈에 뜨입니다.
이 놈은 뭐하는건가 구경해 봤더니, 제가 황혼의 고원에 장식해둔 나뭇잎 위에 흙을 올려두고 있더군요. 거기에 흙이 쌓이겠니?; 그러고보니, 요새 불꽃족 워커들이 흙을 나르는 것이 아주 자주 보입니다. 얘들이 대체 뭐하는 걸까 살펴봤는데... 제 생각이 맞다면 조금 놀랍습니다.
이것은 얼마 전의 플루온 제국의 모습입니다. 촬영을 위해 붉은 차광필름
[개이티필드]가 해제된 콜로니들이 보이시죠? 그리고 덩치 큰 먹이탐색장
[황혼의 고원]이 보이실 겁니다. 황혼의 고원 내부를 잘 봐주세요. 내부에는 제가 장식한 바이옴 킷과 밥그릇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그보다 조금 더 지난 사진입니다. 황혼의 고원 입구에 둥지인
[개림 바톨]에서 실어온 붉은 흙이 깔려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개림 바톨 확장공사에서 나온 흙을 그냥 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자 황혼의 고원 현황입니다. 넓은 곳까지 죄다 붉은 흙이 놓여있습니다. 이제 중앙을 넘어서 3/4 정도는 흙으로 덮고 있는 듯 합니다. 어느새 이만큼이나 덮었는지, 매일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저 개림 바톨을 잘 넓히고 있다는 생각만 했는데... 이거 제 생각이 맞다면, 정말 어디까지나 예측에 불과합니다만, 얘들 지금
[테라포밍] 중입니다.
사람이 사육하는 개미들은 정말 재미있는 행동을 많이 보여줍니다. 특히 아크릴 사육장에서 사는 개미들은 자연과는 동떨어진 환경에서 지내게 되죠. 사람 나름대로는 환기나 온습도 유지에 신경을 써주지만, 개미들의 아주 마이크로한 취향을 모두 맞춰주진 못해요. 그럴때 아크릴 사육장에 흙이나 모래를 넣어주면 개미들은 집을 자기들 입맛대로 리모델링할 때까 있습니다. 우풍이 센 곳을 막고, 건조한 곳에는 흙을 깔아서 습기를 머금도록 하는 등 공사를 뚝딱뚝딱 하는 겁니다.
아마 지금 황혼의 고원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런 일의 스케일 업 버전일 수 있습니다. 개림 바톨에는 지하수가 흘러서 거기에서 습기와 식수가 어느 정도 제공됩니다. 물론 제가 넣어주는 인공 지하수 개천이지요.
[청개천]입니다. 적정량이 마르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이 흙 사육장 개림 바톨의 생명줄입니다. 하지만 황혼의 고원은 먹탐장이라서 따로 습도 관리를 하지 않습니다. 혹시 이 습도 이슈가 지금 이 사달을 벌이고 있는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단순히 교통편의성을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나름 자연을 흉내낸답시고 울퉁불퉁하게 깔아둔 바닥이나 자갈 등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스무스한 주행감을 위해서 도로포장을 하는 걸수도 있지요. 그래서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든, 지금 황혼의 고원에 있는 낮은 이끼 모형들은 흙에 파묻혀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저 큰 나뭇잎에도 흙을 올려두고 있는 것이죠. 이 행동 하나하나가 다 자신들의 입맛에, 생존에 도움이 되는 요소를 위한 액션이리라 생각합니다. 그게 뭐가 됐든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불꽃심장부족은 역시 흐뭇한 제국 신민이네요.
그렇게 발버둥도 쳐보지 못하고 스러져간 광택불개미들아... 흐규흐규... ㅠ_ㅠ... 징징... 다음에 뵈요... 흙흙.... 더위 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