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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00:33
그래도 친형제인데 제갈근이 형주에서 농사짓던 제갈량에게 사람을 통해 알게모르게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요? 오에서 성공해놓고 모른척하면 제갈근이 나쁜 사람인데...
20/07/12 00:51
우리나라만 봐도 6~70년대 부모님의 올인으로 다른 형제자매들은 공부도 제대로 못했지만 장남은 대학도 나오고 출세했을 때,
자신을 위해서 희생해준 형제자매들을 후에 챙기는 일이 당연하지만은 않은 시대라서.. 통신,교통적인 문제로 연락조차 힘들었지 않을까 싶네요.
20/07/12 00:37
당시의 친분관계를 현대의 관점에서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사신도 몇 년에 한 번 왔다갔다하고, 그마저도 다시 올지 말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특별히 마음에 들어하거나 친교를 맺었다는 케이스가 많으니까요. 그런 인연들도 부각되는데 혈육이라면야 더 말할 나위도 없겠죠. 본문의 말씀처럼 정말 서로의 신변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도 없고 외모도 익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요.
20/07/12 03:34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여기선 일반적인 친분이 아니라 제갈근이 동생들을 버리고 혼자 강동으로 간 요인이 추가됩니다. 당대 기준으로도 집안의 일은 장남이 처리하고 가족을 부양할 의무와 함께 가족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권리를 가진 가장역할을 하던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입니다. 손권만해도 제갈근에게 제갈량을 회유해 달라며 '그대가 형이니 동생이 형을 따르는것은 순리이다'란 말을 하죠. 그런데 그런 인식이 있던 시대에 집안의 장남이 가족을 부양할 의무를 저버려 동생들을 버리고 혼자 강동으로 가고 숙부의 보살핌으로 나머지 형제들이 간신히 무사했다면 그게 과연 좋게 보였을까 하는거죠.
20/07/12 08:32
10대 초반의 소년이 20대 후반의 청년이 되었고 20대 초반의 청년이 30대 중반의 어른이 되었는데 13~14년 만에 봤다면 못 알아 볼 수 있죠.
20/07/12 09:35
사람 얼굴은 의외로 많이 안 변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해도 알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특히 혈육이라면요. 저는 외사촌을 초등학교 때 보고 근 십칠년?이 지나서 봤어도 알아보겠더군요.
20/07/12 10:57
다른 의견에는 공감할 수 있는데 못 알아봤을 거라는 건 좀 억지 같습니다.
당장 초등학교때 헤어진 친구들을 대학 들어가서 한번에 알아보는데, 친형제지간이고 서로 닮았을 혈육을 못 알아보기는 불가능하죠. (제가 초등 친구를 9년만인 22살때 봤는데 바로 알아봤어요.) 형주 시절에도 기록에 없을 뿐이지 교류가 있었을 수도 있고요.
20/07/12 09:48
너무 현대적 관점 같네요.
대가족이었던 과거에 동생을 집안 어른이 양육하고 본인은 타향에서 벼슬살이를 하는것이 가족을 버렸다고 할일이 아닌데
20/07/12 13:01
고대적 관점에 따르면 집안의 장남은 가장인 아버지가 죽은 상태에선 가족들의 생사여탈권까지 쥘수 있는 가부장이니까요. 맏아들은 적자로서 집안의 대를 이어나가 가독을 물려받을 존재이고 이는 왕실부터 일반 사대부까지 적용되는 개념이었습니다. 괜히 손권이 적자 맏아들 태자(이 경우는 위에 형들이 죽어서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아들중엔 가장 서열이 높으니)와 동생을 같은 반열에 두었다가 그 난리가 난게 아닙니다. 제갈량이 오에 왔을때 손권이 제갈근에게 '동생이 형을 따르는게 순리이니 내가 현덕에게 말하여 제갈량을 풀어주겠소'라고 한 것도 그런 연유가 있기 때문이고요. 그런데 제갈근은 이 부분에서 가부장으로서의 권한을 사실상 포기했다고 볼 여지가 있는거죠. 오히려 방계인 집안 어른이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장남은 밖에서 개인적으로 직장 생활 한다는 개념이 현대적 개념으로 보입니다.
사실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할 장남이 동생들 시집가는데 얼씬도 안하고 숙부가 다 일을 맡아서 한 것도 그 시절 관점에서 보면 이상한 겁니다. 위에서 팅커벨 님이 교류가 있을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사실 제갈근의 입장은 '교류'로 끝나면 안 되는 입장입니다. 여동생들 시집보내는것도 관록이 없이 제갈현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원래 제갈근이 주도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제갈량의 살림에 뭐 보태준 것도 없고 제갈근과의 교류가 있었다면 친형인 만큼 제갈량전에 적힐 만도 한데 형주 친구들과 어울린 기록만 있고요. 그렇다고 제갈량이 출사하기 전에 자기가 기반 잡아놓은 강동으로 형제자매들 부른 것도 아니고... 대가족에서 동생을 집안 어른이 양육하고 본인은 타향에서 일하는건 근대에 들어와 대가족이 아직 해체되지 않고 본인은 나가서 타향살이 하는 케이스죠. 그나마도 집안 장남은 집안의 기둥이라며 공부하게 하고 어린 동생들이 형이나 오빠를 위해 희생하는 경우가 옛날 20세기 후반 한국만 봐도 꽤 있었고요.
20/07/12 17:04
가족과 떨어져 타향에서 벼슬살이하는건 고대에도 비일비재했던 것으로 전혀 현대적 개념 아닙니다.
그걸 가족을 버렸다로 해석하시는게 이례적 해석으로 보입니다.
20/07/12 17:40
제갈근전에는 벼슬살이를 한게 아니라 강동으로 난리를 피해서 이주했다고 나와있습니다. 손책이 죽은후 손권의 빈객이 되어 벼슬살이를 한건 그 뒤죠. 벼슬도 하지 않은 가족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 적장자 20대 장남이 가족을 숙부에게 떠맡기고 자기만 안전한 강동으로 떠났다? 이걸 벼슬살이로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고 보시면 안 되죠. 게다가 손권의 벼슬은 중앙 정부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은 벼슬도 아니고요.
20/07/12 17:47
천거로 벼슬하던 시대입니다.
가족과 떨어져서 타향에서 누군가의 식객으로 더부살이하면서 추후 벼슬길에 오르는것도 비일비재한일이고, 그게 벼슬길에 오르는 과정입니다. 흔한 일이에요.
20/07/12 18:20
한나라의 천거제는 향거리선제로 해당 인물의 고향에서 수령의 천거를 받는 방식입니다. 가족과 떨어져서 누군가의 식객살이로 올리는게 아니라요. 제갈근이 관직이 뜻이 있었으면 한실의 정통관직도 아닌 손씨의 관직을 받기보단 고향에서 가족을 돌보며 때를 기다리는게 정상입니다. 한나라 천거제에 대해서 아시긴 합니까?
그리고 자신의 고향이 침략받아 초토화 된 일반적이고 흔하지 않은 상황인데 아직 어린 가족을 부양할 생각도 않고 떨어지는게 정상입니까? 최소한 당대 가부장의 입장이며 한 가정의 장남이면 가족 같이 챙겨서 도망이라도 가는게 정상입니다. 하물며 같은 시대를 산 사마씨 사마팔달 일족도 일족의 근거인 하내가 엉망이 되어 도망했을때 자기네끼리 서로 챙겨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기라도 했습니다. 제갈근은 뭘했죠? 제갈근이 강동에서 가족들을 무시하고 십수년 있는 동안에 제갈량을 비롯한 형제 자매들은 숙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여기저기 떠돌면서 목숨부지 하고 있었습니다. 제갈근은 명백히 당대의 그 상궤에서 벗어나 있어요.
20/07/12 18:48
제갈근이 효렴으로 천거되었다면 벼슬생활 하고 있었겠죠. 그게 안된거지.
본인은 빈객생활하면서 지방유력자에게 붙으려 간거고, 그게 실제로 적중했습니다. 제갈근만 그러했던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었던 시대의 일이고요. 처자식 내팽겨치고도 몇십년 생활해도 아들이 멀리서 아버지 찾아가던 시대에 제갈근을 두동생을 버린 형이라고 동생들이 생각했다는건 그냥 본인생각인거고 재미로 이야기하고 끝내셔야죠. 제갈량이 형이 나 버렸다고 했나요 왕래를 끊었나요 아니면 그 시절 저런 행동이 가정을 버린 행위로 취급되었다는 정황이 있나요.
20/07/12 18:56
그럼 제갈량이 그 시대에 대놓고 제갈근은 날 버린 형이요라고 떠들고 다녀야 합니까? 하물며 촉오동맹을 주장한 사람이요? 농담도 적당히 하시죠.
결국 사마씨 맏아들로서 사마씨 다른 형제들 건사한 사마랑과 달리 제갈근이 혼자서 곤궁한 처지에 처한 형제들 버리고 강동 간건 안 변합니다. 누군가는 처자식 내평겨친 아버지 찾아갔을지는 몰라도 제갈근은 당장 곤궁한 형제자매 내팽겨치고 몇십년동안 생활했고 동생인 제갈량도 안 찾아갔으며 둘이 만났어도 사적인 태도는 거의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둘이 사적교류를 그 세월동안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적어도 두 사람이 아예 생판 남보다는 조금 나았을거라는 추측밖에 결과 안 나오지 않습니까, 뭘 억지로 제갈근 좋은 형으로 만들려고 해요? 설령 벼슬 때문에 헤어진거라고 해도 당대 아버지 없는 장남으로서 숙부에게 가족 맡기고 자기 혼자 영달 찾으러 간거 밖에 더 있습니까? 치세라면 몰라도 난세에 고향인 냥야가 조조한테 쑥밭이 된 상황에서요?
20/07/12 19:04
농담을 적당히 하셔야되는건 글쓴님입니다.
저는 제갈량이 날 버린 형이라고 떠들고 다녀야 했다고 이야기한적 없습니다. 제갈량이 제갈근을 동생을 버린 사람으로 생각했다는이야기를 재미 수준을 넘어서 지금 처럼 주장하시려면 그에 걸맞는 증거는 있어야하지 않냐는겁니다. 제갈량의 감정에 대한 본인 혼자만의 추측으로 왤케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나오시는지 모르겠네요.
20/07/12 19:12
재미로 이야기하는 가쉽거리로 끝낼 정도지, 내말이 옳다라며 주장할 적당한 근거라고 볼수 없습니다.
애시당초 1800년전에 죽은 타인의 감정을 타인 스스로 본인 감정을 남긴거도 아니고, 옆에서 누군가가 기록해준것도 아니고 응당 그러한 감정을 가진다는 사실이 보편화 되어있었다는 흔적도 없는데 본인이 타인의 감정을 이야기하며 본인말이 맞다고 주장하시려는데 합당한 근거라고 생각하시는게 이상해요. 아니 애시당초 왜 남의 감정을 본인말이 옳다면서 주장하시는지 그것 자체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20/07/12 19:44
죽자고 먼저 덤벼든 쪽이라고요?
본인이 1800년전에 죽은 인물 감정대변인 노릇 하시려는데 반론을 제기하는걸 죽자고 먼저 덤벼든다고 인식하시는건 알겠습니다만 그런 적 없습니다.
20/07/12 15:30
예, 맞습니다.
제갈근의 저런 행태에 실망한 제갈세가의 태상장로가, 오랜만에 마주친 제갈근에게 한마디 했죠. 갈근이냐? 너 얼굴 잊어버리겠다. 갈근아, 너 그러는거 아니다. 이게 음운축약을 거쳐 현대어의 '갈구냐?' '갈구다'의 어원이 된 것입니다.
20/07/13 10:25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갈현이 태수로 임용되었을 때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음은 제갈양전의 일부입니다.
아버지 규는 자가 군공인데 한나라 말기에 태산군승이 되었다. 양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고, 종부 현은 원술에게서 예장태수로 임용되었는데, 현은 양과 균을 데리고 관소로 갔다. 이를 보면 제갈현이 예장태수가 되었을 때는 원술이 양주에 왔을 때라 최대한 이르게 잡으면 194년입니다. 제갈근이 174년생이니 21살 무렵이죠. 제갈근이 가장 노릇을 할 수도 있고, 아직 제갈현이 가문의 장로로서 권위를 휘두른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은 상황일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제갈근이 강동으로 간 것은 제갈근의 뜻일 수도 있고, 제갈현의 뜻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후 제갈양이 제갈현 사후에도 제갈근에게 가지 않은 것은, 제갈양이 제갈근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선택했을 수도 있고, 하필 제갈현의 마지막 주군이 제갈근의 주군 손책·손권의 숙적 유표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둘 다 해석의 자유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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