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아시아에서 근대는 언제부터 시작했는가? 역사학계에서도 꽤나 자주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1840년에 발발한 "아편전쟁"을 분기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무역적자에 시달리던 영국이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판매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지요. 물론 이것도 세부적으로 파고 들면 영국정부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막 추진한 전쟁이라기보다는 밀무역업자, 상인, 외교관, 군인들 간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섞여서 영국 정부가 마지못해 끌려간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결과적으로는 영국은 지금 시점으로 보자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중국에 선전포고한 전쟁입니다. 그리고 중국(청나라)은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세력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서양열강이 동아시아 지역에 본격적으로 침투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동아시아 각국이 서양과 조우하면서 외형적으로, 그리고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2. 서양에게 중국은 도대체 어떤 존재였는가? 사실 포르투갈을 위시한 서양인들은 이미 1500년대부터 당시 명나라와 계속 무역을 하고 있었고, 청나라 시대에 들어 더욱 체계적으로 그리고 폭넓게 무역관계를 맺었습니다. 1700년대에 이르면 중국 광동에는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영국인 등이 무역을 하고 있었고, 청나라와 서양각국은 윈윈관계에 있었습니다. 소위 광동체제(Canton System)이라 불리는 이 무역체제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유럽의 귀족과 왕족들은 중국산 도자기와 비단, 그리고 차를 구매하였고, 중국은 서양시계와 같은 기계를 구입했습니다. 서양인들은 중국의 관료제를 칭찬했고, 프랑스에서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 불리는 중국열풍이 불었습니다. 중국고전이 서양언어로 번역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1800년대에 이르자 유럽의 과학기술과 군사기술은 이전 시대에 비해 비약적으로 진보하게 되었고, 반대로 중국은 백련교도의 난 등을 거치면서 점점 약체화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무역을 하던 서양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럽상인들, 특히 영국인들은 방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중국인의 불결함, 관료의 부패, 지나친 형식주의와 기술의 후퇴 등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인들이 만주인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파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중국과 같은 거대한 나라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편전쟁의 결과, 중국이 사실상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3. 중국에게 서양은 어떤 존재였는가? 사실 중국도 서양인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제국의 풍부한 산물을 찾으러 온 외국 상인 중 하나에 불과한,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짧은 시간에 중원을 정복하고, 신장을 정복하고, 티벳을 정복한 대제국이었습니다. 건륭제가 영국사절 매카트니를 하찮은 존재로 여긴 이유는 바로 그의 치세 당시에 청나라가 역사상 최대판도를 이룩했기 때문입니다. 견륭제는 스스로 십전노인이라 칭하면서, 자기 치세에 10개의 큰 전쟁이 있었고 모두 승리했다고 자화자찬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인 모두가 서양에 대해 완전 까막눈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광동상인 중 제1인자 오병감은 서양인들과 활발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사람이었으며, 심지어 영국 동인도회사에 막대한 금액을 투자했고 미국인 포브스(Forbes)를 양자로 삼은 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중앙정부가 서양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지, 일선에 있던 상인들은 자세하지는 않아도 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편전쟁 후 서양인들의 기술에 자극받은 위원은 서양인들과 교류하던 광동인들의 도움을 받아 당대 서양에 대한 백과사전 [해국도지]를 저술하게 됩니다. 심지어 이 책이 출판된 것은 1842년인데, 이는 제1차 아편전쟁이 종결된 바로 그 해입니다. 위원은 아편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 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 그럼 해국도지는 도대체 어떤 책이었나? 해국도지는 서양각국의 지리(그리고 지구전체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정치사회제도 등을 망라한 백과사전이었습니다. 지구전체를 조망하면서 중국이 사실 중국(가운데나라)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었고, 서양에도 나름 수준 높은 고도의 정치사회제도가 존재하며 또 아주 혁신적인 군사기술이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정작 중국 안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청나라는 홍콩을 할양하는 것으로 사건을 빨리 매듭짓고 싶어했고, 사실 서양보다는 국내 한인(또는 무슬림)들의 반란을 더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얼마 후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고, 제국은 존망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해국도지는 오히려 바다 건너 일본에서 큰 힘을 발휘했는데, 일본의 사쿠마 쇼잔과 요시다 쇼인과 같은 식자층 사이에서 널리 읽혔고 서양에 대해 어떻게든 방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심화시켰습니다. (사실 요시다 쇼인은 네임드 학자도 아니고 그냥 시골재야학자에 불과했는데, 그의 손에도 해국도지가 들어갔다면 그 책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더욱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정보가 필터링 되서 들어온 게 아니고, 네덜란드 상관으로부터 거의 실시간으로 거의 날것 그대로의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에는 이미 난학자들이 서양에서 발간된 백과사전을 직접 번역해서 막부에 헌상하고 있었습니다. 막부의 식자층은 중국 어느 관료보다도 서양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고, 힘의 격차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5. 일본은 그럼 어떻게 개국하게 되었나? 일본의 개국은 주지하다시피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의 무력시위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일본의 수동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사실 아편전쟁 직후 네덜란드 국왕은 일본 막부에 친서를 보내 영국이 당신네 나라 처들어가기 전에 니네가 알아서 스스로 개국하는 게 좋을 거 같다 (...) 고 충고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이 처참하게 발린 것을 잘 알고 있던 막부는 굉장히 심기가 불편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러시아가 계속 남하하면서 일본을 압박하였고, 일본은 러시아의 위협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1700년대 말, 바다에 표류했다가 러시아인으로부터 구출되어 상크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서 러시아어를 익힌 일본이 있었는데 그는 후일 일본에 귀국해서 [북사문략]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막부의 러시아인식을 노정한 책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집권층은 서양열강이 인도, 필리핀 등을 식민지로 삼은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러시아가 세계의 6분의 1을 점거했다고(네덜란드인들이 그렇게 말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의 총리에 해당하는 인물 아베 마사히로는 서세동점(서양의 동아시아 침투)의 시대를 정확히 인식, 나라가 살려면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다면 차라리 먼저 나서서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 거 같지만, 사실 메이지 유신을 이룩한 유신지사들이 수구꼴통에 가까웠고, 오히려 막부측이 훨씬 더 개방적이고 외국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이 NL운동권도 힘의 격차를 맛보고 난 후 180도 전향하게 되지요...)
6. 서양은 중국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나? 서양이 동아시아에 만든 가장 중요한 도시 두 곳. 홍콩과 상하이입니다. 이 두 도시는 아편전쟁의 결과로 중국이 서양에 양도한 곳으로, 홍콩은 영국의 직할통치령이 되었고, 상하이는 서양연합군(영국, 프랑스, 미국)의 조차지가 되었습니다. 홍콩은 물류의 중심으로 영국의 동아시아 거점의 핵심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중국 최대의 무역도시 광저우 바로 옆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주 안성맞춤이었죠. 그리고 이곳은 영국의 제도가 이식되어 제2의 싱가포르가 되었습니다. 이곳은 영국의 주권이 미치는 곳으로 중국의 혁명가나 반정부인사들이 도피하는 곳이 되기도 했으며, 또 중국내륙에 진출하려고 하는 상인과 선교사들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상하이는 홍콩과 달리 다국적연합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도시가 되었으며 이곳은 영국풍 건물, 프랑스풍 건물, 미국풍 건물이 즐비하게 되었고 각국의 고유의 문화가 한 곳에 모자이크처럼 섞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명목상 중국(청나라)의 주권이 미치는 곳으로 중국인들 또한 상하이에서 서양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한편 상하이는 중국과 서양을 잇는 창구가 되어 서양의 최신서적과 물건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중국의 개혁가들도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이홍장의 심복이었던 마건충 또한 상하이에서 교육을 받은 개혁가였습니다. 서양을 구경하기 위해서 유럽까지 가지 않아도 상하이에서 어느 정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는데 이에 큰 인상을 받은 인물이 다카스기 신사쿠였습니다. 그는 초슈출신의 유신지사로, 1862년 막부 파견단의 일원으로 상하이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서양식 건물과 기술에 놀랐고 또 서양인들이 중국인들을 하인이나 노예처럼 부리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는 상하이에서 동양과 서양의 힘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7. 서양제국의 네트워크를 이용한 중국인들. 그런데 중국인들이 수동적으로 하인처럼 지낸 것만은 아닙니다.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식민제국이 유럽, 인도 그리고 아시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수의 중국인들이 해외 곳곳에 진출했습니다. 말레이시아와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미국까지. 이들 대부분은 광동성과 복건성 출신으로 해안지방의 중국인들이었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쿨리(한자로 苦力, 고된 노력이라는 뜻입니다)라 불리는 일용직 노동자로, 서양인이 운영하는 플랜테이션 노동자로 일했지만 일부는 홍콩에 거점을 둔 영국무역상사의 말단 직원 내지 중간관리자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그리고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경제의 중핵으로 부상하였고 그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소위 화교 네트워크는 서양 제국주의와 함께 성장하면서, 서양의 노하우를 습득했고, 또 19세기 말에 이르면 중국 민간자본으로도 거대한 공장을 건설하고 또 철도를 부설하기도 했습니다.
8. 서양은 일본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나? 사실 이건 너무도 잘 알려진 현상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도 스스로 탈아입구를 제창했었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정말 천지개벽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점은 바로 [이와쿠라 사절단]입니다. 사실 이 사절단의 목적은 일본이 서양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현지에 도착하고 나서 협상해보니까 이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곧 깨닫고, 여행의 목적을 그저 서양을 직접 보고 배우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냥 여행하면서 놀고 먹고 마시는 그런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정부 최고 실세들이 2년간 나라를 비우고 현지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듣는 수학여행이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실제로 원래 [정한론자]였던 기도 다카요시는 유럽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난 후에는 거의 트라우마 수준의 충격을 받아 전쟁은 무슨 전쟁, 당장 유럽을 따라잡는데만 해도 시간과 노력이 모자르다고 주장하면서 일본 국내에서 유행하던 정한론에 완전히 반대하게 됩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심했냐면 사절단의 장이자 일본 궁정귀족(따라서 완전 꼴보수)이었던 이와쿠라 도모미가 현지에서 바로 상투를 자르고 양복으로 갈아입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문명국임을 인정받기 위해서 무도회장을 설치하고, 서양요리를 보급하고, 관료들이 양복을 입도록 강제하고, 또 건물도 서양식으로 건축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명동의 일제시대 건물을 통해 일본의 몸부림의 잘 확인할 수 있죠.
9. 결국 서양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 중국 수면 아래에서는 물론 서양의 위협에 맞서 나라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대부와 개혁파, 만주인과 한인, 상인계층, 지주계층, 농민계층 간의 대립 및 갈등으로 개혁은 빈번히 실패했습니다. 사실 정권의 실세였던 이홍장도 서양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의 심복 마건충은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까지 한 엘리트였습니다 (심지어 천주교 집안이었죠...). 그리고 조선 보고 정신차리라고 그 유명한 [조선책략]을 건내준 황준헌도 광동출신 사람으로 서양에 대해 빠삭했고, 일본주재공사로 일하면서 메이지 일본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기록한 백과사전 [일본국지](1887년작) 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원래 중국의 식자층은 서양을 따라하는 일본을 아주 한심하게 바라보았었는데, 황준헌은 오히려 중국의 미래를 일본에서 찾으려고 했고 동포들에게 이를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훗날 캉유웨이는 [일본국지]가 제대로 읽혔었다면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하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개혁노력은 정치적인 이유로 빈번히 실패했었는데, 청일전쟁으로 패배하자 중국은 그제서야 정력적으로 개혁에 나서게 됩니다. 서양이 앞선 것은 기술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보수파가 힘을 잃고 제도와 정신까지 서양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졌습니다. 이른바 중화사상이 완전히 깨져버린 순간이었습니다. 전제군주제를 지지하는 사람이든,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사람이든, 공화국을 지지하는 사람이든, 그들은 모두 서양을 준거로 삼았고 서양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오랑캐가 중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책봉을 받는 세계가 완전히 끝나고, 오히려 중국이 서양인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 그들의 리그에 낄려고 아둥바둥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1차세계대전 당시에 극명히 드러났는데, 당시 신생 중국공화국은 유럽전쟁에 참전해서 유럽인들의 인정을 받아 국제연맹에 가입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10. 그런데 무작정 서양만 따라가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 왜 서양인이 만든 룰을 따라야 하지? 그들만이 옳고 우리는 틀렸나? 그들만 문명이고 우리는 야만인가? 서양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일본이나 중국이나 양국 모두 이러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소위 말하는 [아시아주의]가 이 무렵 탄생했고,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진보적 아시아주의자들도 일본과 중국, 나아가 황인종 전체가 백인문명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양열강의 수탈을 가장 먼저, 그리고 직접적으로 겪은 중국인들도 이에 공감하였습니다. 중국 공화국의 아버지 쑨원은 이런 일본인들과 폭넓게 교류하였고, 또 일부 일본인들은 쑨원을 돕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서양열강을 가장 먼저 따라하고 가장 모범적 학생이 되었던 일본은, 정신분열증적인 자아성찰(?)을 겪은 끝에 서양이 만든 게임판에 더 이상 참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을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미국이 뭐라고 하든 신경쓰지 않고 아시아주의의 기치 아래 자국의 제국을 노골적으로 그리고 더욱 과감하게 추구했습니다. 목표이자 지향점이었던 영국/미국 젠틀맨은 어느새 귀축영미가 되었고, 일본은 아시아의 구세주가 되어 세계최종전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최종전쟁론을 집필한 이시와라 간지는 훗날 자기 동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연합국에 협력하게 되지만요....
11. 영국의 시대가 저물고 미국의 시대가 탄생하다. 사실 동아시아의 근대를 만들고,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영국이었습니다. 일본이나 우리가 대영제국, 대영제국 그러지만, 사실 유럽 안에서는 원 오브 뎀(one of them)이었지 패권국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영국은 게임의 규칙을 설정하고 군림한 존재였으며 중국이나 일본이 가장 눈치보던 존재였습니다. 일본은 그런 영국을 상대로 상하이에서,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굴욕을 주었고 영국 시대의 종언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미국이 일본을 가공할만한 위력으로 철저히 파괴하였고 영국 대신 동아시아의 균형자, 동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했으며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절대자로 부상했습니다. 물론 미국은 동아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든 그런 역할을 수행했지만, 미국의 힘이 더욱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곳은 동아시아였습니다. 유럽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의 기득권이 어느 정도 인정되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기득권을 인정받은 나라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을 무찔렀다면 혹시라도 작은 기득권이나마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만, 어쨌든 장개석은 패배했고 대만으로 도망쳤습니다. 아무튼 미국은 일본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단독으로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직접 통치했으며, 한반도 또한 3년간 직접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나라에서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은 여전히 압도적이며 정권을 탄생시키고 붕괴시킬 수 있는 정도입니다 (대미외교가 우리나라에서 큰 화두인 것처럼 일본에서도 정권 지지율에 곧바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 사안입니다).
12. 동아시아의 미래는? 19세기 이래 동아시아는 줄곧 서양을 따라하기에 바빴습니다. 서양문명이 곧 문명이었고, 서양가치가 곧 옳은 가치라고 여겨졌습니다. 한복이나 기모노를 벗고 양복을 입었으며, 율령제 국가를 버리고 입헌국가가 되었으며, 전통음식을 뒤로 하고 서양음식을 즐기게 되었으며, 전통음악을 뒤로 하고 서양클래식과 팝을 즐기게 되었으며, 맹자와 공자를 뒤로 하고 플라톤과 마키아벨리를 배우게 되었으며, 대가족을 뒤로 하고 개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으며, 전통가옥을 버리고 석조건물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아랍문명권이나 힌두문명권에 비해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의 [서양화]는 실로 괄목할만 한 것입니다. 아랍 쪽은 여전히 전통사회를 유지하고 전통복장을 적지 않게 유지하고 있고, 힌두쪽도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 삶과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 일본, 중국은 가열차게 서양문명을 추구했고, 서양인들의 취향을 내재화하면서 이들 문명에 동화되려고 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서양에 대해 상대적으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중국조차 백인여성과 남성을 모델로 삼고, 백인들을 예능에 출연시키는 것을 좋아하고 또 와인을 즐기며 오페라를 감상하고 루이뷔통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유럽은 과거 19세기와 같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상하이는 물론 이제 홍콩도 중국 땅이 되었고, 걸핏하면 중국을 위협했던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자기 앞마당 관리하기에도 바쁩니다. 서양의 모범생이 되어 만주와 북중국을 휩쓸던 일본은 지금 군대조차 없는 실정이며, 유럽은 중국이 이런저런 핑계로 무역보복을 하거나 기술탈취를 해도 그 어떤 제재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중산층들은 여전히 루이뷔통을 사랑하고, 백인들을 우대하고, 유럽패키지 여행에 떠나며, 유럽 또는 미국 명문대에 유학을 할 것인가? 19세기 중국 지식인들은 루소와 몽테스키외를 읽고, 로크와 스튜어드밀을 읽으면서 감동했고 민주주의와 법치국가를 꿈꿨는데, 이는 한편 서양의 압도적인 힘에 경도된 탓도 있습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유럽은 완전히 저물었고, 미국이 그 자리를 대신했는데, 오늘날 미국은 트럼프라는 현상으로 19세기 서양 계몽주의와는 또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미국은 오늘날 중국의 가장 중요한 적수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각국의 문명사적인 미래는 어떻게 될런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식자층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지, 서양과의 관계, 나아가 현대세계를 규정하고 있는 각종 제도와 규범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아니 과연 지킬 의지가 있는 것인지, 지킬 필요가 없다면 어떻게 바꾸어나갈 것인지, 그리고 현재의 서양화된 삶의 방식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인지, 한 번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