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인은 『8월의 폭풍』의 역자이자 연재소설 『경성활극록』의 저자임을 회원분들께 먼저 알려드립니다.
8월의 폭풍: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5357299
경성활극록:
https://novel.munpia.com/163398
일본이 연합국과의 중재를 요청하며 여러 이권들을 소련에 반환한다는 조건을 내걸은 것을 보고받은 스탈린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제가 본 자료가 없어서 확인하진 못했지만 아마도 배꼽을 잡고 폭소했을 것 같습니다;;
스탈린은 일본의 대소화평공작을 들어 줄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론 일본이 제시한 조건들인 뤼순, 다렌의 조차와 남사할린의 반환 쓰가루 해협의 통과 권한과 유리한 어업권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얻는 것은 제법 매력적인 조건이긴 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이 바라는 것은 만주 전체를 석권하여 일본을 상대로 만주의 모든 것을 다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피 흘리지 않고 일본의 조건을 수락하는 것 보다는 피를 감수하고서라도 더 큰 것을 가지는 게 이득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스탈린은 얄타 회담 이전부터 대일전에 참전하겠다고 처칠과 루스벨트에게 여러 차례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서방 국가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일본의 중재자로 나선다면 국가 신뢰도가 하락할 뿐만 아니라 전후 루스벨트가 구상한 국제질서 구상에 소련이 참여하는 것도 힘들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일본의 중재요청을 그렇다고 면전에서 거절하지도 않았습니다.
스탈린이 일본의 희망을 철저히 이용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과 외무인민위원 몰로토프, 외무부인민위원 로좁스키, 일본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는 일본의 중재요청에 대해 지속적으로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1945년 5월 15일부터 대소화평공작의 일환으로 일본의 전 총리 히로타 고키가 말리크 소련대사를 6차례나 만나서 중재요청을 전달할 때도 말리크는 확답을 하지 않고 모호하게만 대응했습니다.
소련 주재 일본대사 사토 나오타케는 7월 10일과 11일에 있었던 몰로토프와 로좁스키와의 회동에서 소련의 중재자 역할을 부탁했으며 7월 12일에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를 특사로 파견하겠다고 통고했습니다.
7월 18일, 로좁스키 부인민위원은 고노에 특사의 파견을 공식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사토는 25일까지 로좁스키에게 간청했으나 성과는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일본의 희망을 이용, 소련 극동군이 만주를 공격할 시 기습효과를 극대화시킬 작정이었습니다. 일본이 소련의 중재를 기대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당장 일어나지 않도록 막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던 그 순간 총체적 기습을 가하여 일본에 최대한에 충격을 가한다는 것이 스탈린의 의도였습니다.
참 마귀같은 스탈린입니다. -_-;;
그리고 스탈린은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며 미국의 트루먼이 소련을 대일전에서 배제할 수 없도록 만들 작정이기도 하였습니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약속한 대소련 차관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대일전 참전을 위한 군사대표단 회의도 일방 취소하는 등 소련과의 갈등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1945년 5월 시점에서 소련을 대일전에서 배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암호해독기 "매직"을 이용해 일본의 외교전문을 감청하며 일본의 대소화평공작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 대표단의 포츠담 출발 직전에 작성된 연합정보위원회의 보고서는 일본이 소련의 중재를 얻기 위해 필요하다면 중요한 영토를 할양하거나 그밖의 어떤 양보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미영과 소련의 불화를 조장하기 위할 거라는 판단을 내놓았습니다.
트루먼은 스탈린이 정말로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대일전에 나서지 않고 태평양전쟁의 중재자로 나서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막으려 드는 최악의 사태를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미국의 히든카드, 원자무기의 개발도 이때까지는 그 성공을 장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원자무기의 위력과 효용성이 입증되지 않는 한, 미군의 희생자를 줄이고 태평양전쟁을 조기에 종결하려면 소련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스탈린은 트루먼의 우려도 이용하려 들었습니다.
일본의 대소화평공작을 명시적으로 거절하지 않으면서 트루먼이 소련의 대일전 참전 배제가 아닌 대일전 참전을 유도한다는 대소정책을 유지할 수 밖에 없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대한 확답은,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서 개최될 삼거두 회담에서 들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소련은 착착 대일전 참전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총참모장 자리에서 내려온 후 최고사령부 대리로 잠깐 동프로이센 작전을 지휘하다 제3벨로루시전선군 사령관을 맡은 바실렙스키 원수는 대독전이 종결되자 바로 극동으로 향했습니다.
바실렙스키의 극동사령부는 스탈린의 권한을 위임받아 소련의 극동배치병력 전체를 통합 지휘하는 막대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주코프와 바실렙스키 등 최고사령부 대리로서 전선에 파견되어 복수의 전선군을 지휘하던 최고위 지휘관들은 어디까지나 스탈린의 "대리"로서 고정편제된 사령부가 아닌 임시 사령부를 운용하며 전선군 간의 작전술적-전략적 작전을 현장에서 조율했지만, 극동사령부는 최초로 전선군 위의 고정된 전구사령부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극동의 자바이칼군관구와 시베리아군관구는 전시 편제인 전선군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시베리아군관구의 경우 연해주를 담당하는 연해주군집단이 분리된 후, 연해주군집단은 제1극동전선군으로 기존 시베리아군관구는 제2극동전선군으로 자바이칼군관구는 자바이칼전선군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자바이칼전선군 사령관에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우크라이나 남부 및 헝가리에서 맹활약한 지휘관, 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임명되었습니다.
제1극동전선군 사령관에는 1939년 핀란드 전쟁에서는 졸전을 치루었으나 레닌그라드에서 죽을고비를 넘기고 핀란드의 산악지대에서 활약하며 괄목할 성장을 한 카렐리야전선군 사령관 키릴 메리츠코프 원수가 임명되었습니다.
두 전선군의 사령부 인력은 지휘관을 따라 통째로 극동으로 향했습니다.
제2극동전선군 사령관에는 1942년 말부터 시베리아군관구 사령관이었던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이 유임되었습니다.
또한 해공군의 작전을 위하여 해군 총사령관 니콜라이 쿠즈네조프 원수 공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원수가 극동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극동을 향해 유럽에 배치된 4개 야전군도 통째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제6근위전차군, 제39군,제5군, 제53군이었습니다.
그 외에 각종 부대들이 차출되어 극동에 있던 야전군과 군단, 사단에 배속되었습니다.
5월부터 극동으로 배치되는 30개 사단의 100만 인력이 136,000양의 철도에 타고 이동하였습니다. 1945년 6-7월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매일 열차 22-30편이 투입되어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날랐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는 미국이 무기대여법으로 지원한 물자들이 쌓였습니다.
소련군의 작전준비는 착착 갖추어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