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기 10세기의 상황
서기 10세기는 권력과 권위의 중추가 모두 혼란에 빠져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서유럽의 카롤링거 제국이 무너지면서, 세속권력은 물론 교황의 지위도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교황은 로마의 귀족들의 꼭두각시가 되거나, 죽임 당하거나 하는 처량한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로마교황좌가 로마귀족들의 장난감이 되고 교황의 권위가 철저하게 추락하고 타락했으니 그 영향은 당연히 기독교 세계 전역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교들은 여색에 탐닉했을 뿐만 아니라 당당히 결혼해서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또 어떤 이들은 주교 자리 그 자체를 전혀 부끄럼 없이 팔았습니다. 심지어 로마교황직 조차 판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교황 베네딕토 9세는 한 때 그레고리오 6세로부터 뇌물을 받고 퇴위했습니다. 이렇게 성직자의 결혼과 매관매직은 중세유럽에 널리 퍼져 거의 관습처럼 되어 있었지만, 이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이를 적극적으로 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특히 수도원 중심으로 개혁의 운동이 나타 나게 됩니다.
2. 클뤼니 수도원의 성장
당시 서유럽 각지에는 큰 수도원들이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수도원은 대체적으로 봉건귀족 중 땅을 물려받지 못한 서자 등이 출가하여 건설했는데, 그 수도원 자체가 일종의 봉건영지가 되어 농산물을 생산하고, 주민들을 보호하고 또 학문을 보전하는 성(成)이 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인데, 부르고뉴 지방을 중심을 한 이 수도원은 중세유럽의 농업혁명을 선도하였으며 막대한 재산과 위세를 자랑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와인도 그렇게 잘 만들었다고…) 클뤼니 수도원은 유럽에서 제일가는 수도원으로 성장하여, 전성기에는 분원(分院)만 해도 1,200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하였고, 왕이나 봉건영주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았으며, 오직 교황만이 유일한 권위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황이 이들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들이 자발적으로 교황에게 충성을 바친 것입니다. 이윽고 클뤼니 수도원은 당대 유럽의 지식인들을 매료시키는 장이 되었고, 따라서 이들을 중심으로 개혁운동이 번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3.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3세의 개입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이 한창일 때 로마는 여전히 부정부패의 온상이었습니다. 귀족들 간의 파벌싸움은 심했고, 심지어 베네딕토 9세, 그레고리오 6세, 실베스테르 3세 등 3명의 교황이 동시에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암흑의 시대라 불린 이 혼란을 도대체 어떻게 끝낼 것인가? 끝내는 것이 가능한가? 로마교황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세인들은 이런 질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3세입니다. 물론 그가 최초의 신성로마황제는 아니었습니다. 신성로마황제위가 탄생한 것은 그보다 앞선 서기 962년이었습니다. 당시 작센공작 오토는 독일을 제패하였고, 이탈리아에 남하하여 교황을 도와 카롤링거 제국 붕괴 후 줄곧 공위였던 황제위를 복원하여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그런데 오토1세의 자녀들은 모두 별볼일 없어 카롤링거 가문과 마찬가지로 약체화되었고 결국 로마는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아무튼 하인리히 3세는 오랜만에 나타난 강력한 군주였으며 그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에 공감하여 로마교황좌의 혼란을 끝내고자 했습니다.
하인리히는 이탈리아에 직접 남하하여 주교회의를 개최, 서로 대립하던 교황 3명이 모두 퇴위하도록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이들 대신 독일인이었던 클레멘스 2세를 옹립하였고 이는 과거 교황을 좌지우하던 로마제국 황제들의 권위를 연상케했습니다. 교황은 다시 동로마 황제의 시대처럼, 이번에는 독일인 황제의 권력에 종속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다만 부패한 교황들이 판치느니 차라리 황제가 지명한 교황이 개혁을 수행하는 게 나았습니다. 하인리히는 클레멘스 2세로 하여금 성직매매를 금지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클레멘스는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서거하였고, 퇴위한 교황들은 다시 음모를 꾸며 그의 자리를 노렸습니다. 그 결과 테오필락투스 가문 출신 베네딕토 9세는 다시 교황좌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에 분노한 황제 하인리히3세는 다시 이탈리아에 진군하여 베네딕토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또 다른 독일인을 교황으로 옹립했습니다. 하지만 새로 교황이 된 다마소 2세는 한달 만에 병사하여 황제는 또 다른 교황 레오 9세를 옹립한 후 황제의 의지를 계승하게 했습니다. 참고로 그 역시 독일인이었으며 더욱 중요하게는 황제의 친인척이었습니다.
4. 개혁파 교황, 레오 9세의 노력과 좌절
레오 9세는 1049년 황제 하인리히 3세 덕분에 즉위하였으나 그는 단순한 꼭두각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력적으로 개혁을 추진했고, 이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그 동안 교황은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로마시 밖으로 나가는 일이 극히 드물었는데, 레오 9세는 본인이 직접 발로 뛰면서 유럽 전역을 누비며 설교하고 또 주교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북부의 파비아, 독일의 아헨과 쾰른, 그리고 프랑스의 랭스 등을 방문하였고 또 다시 이탈리아 남부의 살레르노 등을 방문하여 주교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각지에서 회의를 개최한 그는 개혁운동의 바람대로 성직자의 독신을 강조했고, 성직매매도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이렇게 정력적으로 해외순방을 나간 교황은 훗날 20세기의 슈퍼스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등장까지는 없었습니다. 아무튼 황제의 권력과 교황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뒷받침되는 메시지는 분명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개혁을 지속 추진하기 위해 인재를 등용했는데 그 중 한명이 중세 로마 가톨릭의 방향을 규정하게 되는 그레고리오 7세입니다.
그런데 레오 9세의 개혁 운동은 종교와 무관한 일로 좌절하게 됩니다. 그는 시칠리아를 점거한 노르만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노르만인들은 그들의 선조 바이킹과 달리 완벽히 기독교화되었고 교황을 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세력확장은 아주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고, 이는 이탈리아의 교황령을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동로마 측은 남이탈리아의 해방을 위해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레오 9세는 서방교회의 우위를 동로마에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이에 레오 9세는 용병을 모집하여 노르만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는데, 무참하게 패배하였고 포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노르만인들은 교황을 모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최고의 예우로 대접하였습니다. 그런데 레오 9세는 1054년 로마로 귀환하는 도중 병사하였고, 그의 후임자였던 교황 빅토르 2세도 재위 2년만에 사망했습니다 (참고로 이 사람도 독일인). 그리고 그 이후의 교황들 또한 단명하거나 약했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가 활약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5. 토스카나의 힐데브란트(그레고리오 7세), 킹메이커로 부상하다
훗날 교황이 되는 그레고리오 7세의 본명은 힐데브란트였습니다. 이름이 독일스럽지만 출생지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였고, 그곳에서 줄곧
자랐습니다. 그는 부패한 교황들의 시대 당시 클뤼니 수도원으로 몸을 피해 그곳에서 수학하였고, 훗날 레오 9세가 되는 독일의 브루노 주교를 따라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개혁파 교황 레오 9세와 그레고리오 7세는 아주 오랜 인연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레오 9세는 힐데브란트를 교황청 행정의 책임자로 임명하였고, 또한 그를 교황사절로 임명하여 프랑스와 독일에 파견하였습니다. 레오 9세의 서거 이후 교황이 된 빅토르 2세도 힐데브란트를 신임하여 그를 교황사절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빅토르 2세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단명하였고, 그를 이은 교황 스테파노 9세도 단명하였습니다.
포로가 되어 병사한 교황, 2년만에 서거한 교황, 그리고 1년만에 또 서거한 교황을 거치자 교황좌는 다시 매우 약해졌습니다. 이에 로마의 귀족 가문 테오필락투스 가문은 다시 음모를 꾸며 부정선거로 베네딕토 10세를 옹립했습니다. 당시 교황사절로 독일에 파견 나가있던 힐데브란트는 로마의 부패한 귀족들이 음모를 꾸며 교황좌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자 격분하였고 새로 선출된 교황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를 폐위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아녜스의 지지를 확보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피렌체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로렌 공작과 토스카나 공작의 지지를 추가로 확보하였고, 베네딕토 10세에 반대하던 다른 주교들과도 만나 이들의 지지를 확보했습니다. 충분한 세력을 규합 한 후 그는 시에나에서 피렌체 대주교 게르하르트를 새 교황으로 선포하였습니다.
힐데브란트의 노력으로 즉위한 게르하르트는 1058년 니콜라 2세로 즉위하였으며 곧바로 로마로 진군, 베네딕토 10세를 폐위하고 파문시켰습니다. 물론 이런 과감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신앙심과 의지 외에 실질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무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니콜라 2세는 베네딕토 10세를 지지하는 세력을 말소하기 위해 노르만인들과 동맹을 맺어 이들의 군사적 지원을 얻습니다. 노르만인들은 과거 레오 9세와 전쟁을 한 적이 있었지만, 레오 9세와 교황좌를 존경했었습니다. 이를 포착한 힐데브란트는 니콜라 2세와 노르만 세력 간의 만남을 주선하였고, 1059년 멜피의 동맹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니콜라 2세가 노르만인들의 군사력을 얻는 대신, 교황은 그들의 우두머리인 로베르 기스카르를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그리고 시칠리아의 공작으로 책봉했습니다. 교황에게 과연 그런 공작령을 책봉할 권한이 있는가는 물론 의문스러운 일이었지만, 어쨌든 양쪽은 모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노르만인들의 지지를 확보한 힐데브란트는 교황군의 사령관으로 노르만군을 이끌고 베네딕토 10세가 도피한 갈레리아를 공격하였고, 그의 항복을 최종적으로 받아냈습니다.
니콜라 2세는 항복을 얻어낸 후 베네딕토 10세를 자유인으로 풀어주려고 했지만 1년 후 결국 그를 공개적으로 심문하고 투옥시켰습니다. 참고로 베네딕토 10세의 심문관은 역시 힐데브란트였습니다.
니콜라 2세의 치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교황선출제도의 개혁이었습니다. 본래 로마 교황좌는 로마의 귀족들 손에 의해 좌지우되거나 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무력에 의해 좌지우되거나 혹은 선임 교황의 지명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이의 폐단을 잘 인식했던 그는 1059년 로마의 라테라노 대성당에 주교 113명을 소집하여 각종 개혁을 논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법령(In nomine Domini)으로 반포하였는데 주 내용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하나, 교황의 선출은 신성로마황제의 추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둘, 성직매매와 영주나 귀족들의 서임권(주교를 임명할 권리)을 금지한다.
셋, 첩을 가진 성직자의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한다.
넷, 교황의 서거 시 오직 추기경-대주교만이 교황후보에 입적할 수 있다 (과거 아무나 교황으로 만들던 폐단을 시정, 그리고 추기경-대주교의 상당수는 사실 로마 출신이 아님. 사실 이걸 노린 것이죠)
다섯, 후보 등록이 끝나면 모든 추기경들은 투표를 해야 한다.
여섯, 나머지 주교와 평신도는 선출자를 승인할 권리를 유지한다.
일곱,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경우 선거는 반드시 로마에서 실시되어야 한다
이렇게 니콜라 2세는 로마 가톨릭 교회 역사에 기념비적인 개혁을 실시하고, 재위 만 2년이 조금 지나 서거하였습니다.
니콜라 2세가 서거한 후, 그가 실시한 개혁에 따라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추기경단의 선거가 실시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황이 된 자는 밀라노의 주교 알셀름이었습니다. 그는 힐데브란트와도 오랜 인연을 가진 인물로, 그와 함께 개혁운동을 벌이던 자였습니다. 그의 당선에도 역시 힐데브란트의 역할이 컸다고 전해집니다.
아무튼 새로 즉위한 안셀름은 교황명으로 알렉산데르 2세를 채택했고, 그는 신성로마황제의 추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통보만 했을
뿐입니다. 이에 황후 아녜스는 이를 불쾌하게 여겨 답신을 보내지 않았고, 로마의 귀족들은 이를 신성로마제국의 거부권으로 인식, 황후 아녜스에 사절단을 보내고 그녀의 지지를 구한 뒤 즉시 대립교황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대립교황 호노리우스 2세는 아주 약한 후보였고, 황후 아녜스의 서거 후 신성로마제국의 조정도 곧 그를 버리는 카드로 인식하고 4년 만에 알렉산데르 2세와 화해하게 됩니다.
알렉산데르 2세는 니콜라 2세와 달리 오랜 기간 동안 군림했습니다. 무려 12년 간 통치했습니다.그런데 그는 새로운 개혁을 실시하기 보다 니콜라 2세의 개혁안에 명시된 사항을 열정적으로 집행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성직매매를 엄격히 금지했고, 관련된 사례가 적발될 시 이에 대한 조사단을 꾸려 직접 확인했습니다. 또한 그는 유대인들을 보호하였고, 유대인들을 강제로 개종하는 것에도 반대하였습니다. 아울러 1065년 스페인의 무슬림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을 호소했으며 이는 추후 십자군 전쟁의 선례가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브리타니아를 정복한 노르만 공작 정복왕 윌리엄과도 인연이 있었습니다. 영국정복을 수행하기 전 윌리엄은 교황의 축복을 구하기 위해 로마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알렉산데르는 그에게 반지를 하나 수여하면서, 그의 정복 사업을 축복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영국의 주교와 신부들에게 새로운 왕의 정권을 지지하라는 서한을 발송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친구였던 주교 랑프랑을 영국 캔터버리 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알렉산데르 2세는 이렇게 무려 12년이나 재위에 있었지만 주목할만한 큰 업적은 남기지 않았고 무난한 행정가형 교황으로 향년 63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6. 힐데브란트, 그레고리오 7세로 즉위하다.
알렉산데르 2세의 서거 후 그의 장례미사가 로마의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미사 도중 로마시민들과 일반사제들로부터 갑자기 환호가 울려터졌습니다. “힐데브란트를 교황으로! 힐데브란트를 교황으로!, 사도 베드로가 그를 선택하였도다!” 이는 갑자기 벌어진 해프닝으로 힐데브란트는 자리를 피해 잠시 숨었다고 합니다. 교황에 선출된다고 하여도 니콜라 2세의 개혁에 의해 규정된 절차에 의해 선출되어야지, 민중의 환호로 선출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죠. 결국 추기경단의 선거가 규정대로 실시되었지만 이미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확인한 추기경단은 힐데브란트를 교황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출될 당시 힐데브란트는 이미 60대 노인이었으나 그는 벌써 두 명의 교황을 즉위시킨 킹메이커였습니다. 그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이제 기독교 세계 전체를 떨게 할 개혁, 아니 혁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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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서 계속됩니다 ~~~ (3부는 언제 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