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첸시오 3세 교황의 휘장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과 십자군 전쟁의 성공적인 완수 이후 교황의 권위는 전례없는 수준으로 상승했습니다. 과거 로마의 주교에 불과했던 교황은, 과거 샤를마뉴의 신하에 불과했던 교황은,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권력 아래 짓눌렸던 교황좌는 이제 명실상부 기독교 세계의 핵심이 되어 유럽의 군주와 영주들의 존경을 받는 직위가 되었습니다. 황제나 국왕보다 위에 위치한 교황, 그 누구로부터도 심판받지 않는 교황, 하느님의 권능을 지상에서 대표하는 교황. 이것은 물론 이론 상의 권력이지만, 이를 이론에서 현실로 만든 인물은 교황의 역사에서 단 한명밖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조반니 로타리오 데이 콘티, 교황명 이노첸시오 3세입니다. 그는 황제와 왕들을 파문해서 갈아치우기도 했고, 알비십자군을 조직해서 프랑스 남부의 이단을 완전히 없애버렸으며, 북방십자군을 조직해서 기독교 세계가 슬라브권으로 확장하는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까요?
1. 교황은 도대체 어떻게 권력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나?
사실 이노첸시오 3세는 로마의 유력귀족 가문 출신으로, 교황을 으레 위협하던 라이벌이 없었고 또 과거 교황과는 달리 가장 정력적이고 활동적인 나이 (37세) 에 즉위해서 건강하고 과감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와 파리의 대학에서 신학 및 법학을 공부한 자로, 인맥도 상당히 충부했죠. 그런데 결정적이었던 것은 지정학적 운이 좋았다는 사실입니다.
교황을 위협했던 것은 보통 신성로마제국이거나, 동로마제국이거나 또는 간혹 동맹이거나 간혹 적이었던 노르만족의 시칠리아 왕국이거나 또는 프랑스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노첸시오 3세가 즉위하고 나서 2년만에 신성로마제국은 내전에 돌입했고, 동로마제국에는 무능하고 약하기 짝이 없는 황제가 즉위했으며, 노르만족의 왕국은 궁중암투로 사라져버렸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사자심왕(리샤르 쾨르드리옹)의 사후 분쟁에 돌입했습니다. 따라서 교황을 방해할 수 있는 세속군주가 모두 사라지거나 무기력해진 것입니다.
이노첸시오 3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의 친황제파를 숙청하면서 본인의 권위를 강화하였고 행정권한을 자신에게 집중시켰습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이 내전상황에 있는 상황을 틈타서 친황제(친독일) 세력에 넘어갔었던 로마냐, 안코나, 스폴레토 및 토스카나 일부 등의 지역을 탈환하여 교황령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이에 교황은 중부 이탈리아의 패자가 되어, 세속군주 못지 않은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하인리히 6세의 미망인 콘스탄체 황후는 어린 왕자 프리드리히를 보호하기 위해 교황을 그의 후견인으로 삼았습니다. 참고로 프리드리히는 비록 신성로마제국은 물려받지 못했지만 외가쪽의 상속권리로 인해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자가 되었는데, 교황이 그의 후견인이 됨에 따라 교황은 중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왕국까지 포괄하는 대군주가 된 것입니다.
2. 이노첸시오 3세, 신성로마제국을 좌지우하다
내전에 돌입한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두 인물이 황위를 두고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전임 황제의 형제 필립 폰 슈바벤 공, 그리고 호헨슈타우우펜 가문의 라이벌 오토 폰 브룬스비크 공이었습니다. 필립의 경우 전임 황제의 정책을 이어받아 교황권을 약화시키려고 했었던 인물인데 반해 오토의 경우 교황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교황으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했던 인물입니다. 훗날 호헨슈타우펜 가문을 지지하는 자를 기벨린, 그리고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을 겔프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 기벨린 대 겔프의 대립이 훗날 이탈리아 북부의 정치를 줄곧 좌지우하게 됩니다. 아무튼 오토의 지지요청에 대해 교황은 처음에 중립을 유지하다가 1201년 드디어 오토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교황은 게르마니아 왕의 선출은 선제후와 관습에 따라 결정되지만 황제의 자리는 오직 교황만이 수여할 수 있다는 논리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였습니다.
이에 필립 공은 당연히 분노하고 반발했지만, 권위가 실추된 그는 곧 살해되었고 오토가 신성로마제국 황위에 정식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런데 1209년 황제가 된 오토는 곧 역대 신성로마황제들이 으레 그리하였듯이 황제권을 강화하고 교황을 압박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북이탈리아의 제국령을 확고히 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중부 이탈리아, 심지어 남이탈리아까지 확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교황은 1210년 오토를 파문하였고, 자신이 보살피고 있던 전임 황제의 아들 프리드리히를 황제로 옹립했습니다. 그리고 구 호헨슈타우펜 파를 규합해서 오토에 맞서도록 했습니다. 훗날 파문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유명무실한 조치가 되어버리고 말지만, 이 때 당시 교황의 파문은 상당히 효력이 있는 행위로, 황제의 권위를 실추시킬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반란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이에 신성로마제국은 다시 내전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이는 의외로 프랑스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3. 오토 4세의 파문과 프랑스와 영국을 탄생시킨 부빈 전투
오늘날 프랑스인들이 자국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삼는 연도 중 하나가 1214년입니다. 부빈 전투(Bataille de Bouvines)가 벌어진 해인데, 이 때 프랑스 국왕 필립이 영국과 신성로마제국 연합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어 프랑스 국왕의 권위를 일기에 급상승시키고, 또 프랑스 왕국을 공고하게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 필립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수여받고, 프랑스의 국민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의 결과 프랑크인의 왕(Rex Francorum)은 드디어 프랑스 왕(Rex Franciae)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을 수 있었고, 그리고 본격적인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했었다면 프랑스 왕국은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오토 폰 브룬스비크 신성로마황제의 파문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오토 황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문당해 신성로마제국 안에서의 권위가 급격히 실추되었고, 어린 프리드리히를 황제로 지지하는 세력과 맞서고 있었습니다. 몇번의 전투 끝에 그는 최종적으로 패배하지는 않았지만, 수세적인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면 어떤 중요한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이에 그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것을 통해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본인의 권위를 다시 살리고자 했습니다. 마침 당시 영국의 국왕 존은 오토와 친인척 관계였고 그는 프랑스 국왕 필립과 상속문제로 분쟁 중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왕 존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를 배후에서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 모든 게 순조로울 것만 같았습니다. 영국의 군대와 신성로마의 군대는 규모로 봤을 때 프랑스의 거의 2배에 달하고 있었고, 양쪽에서 공격을 하면 프랑스 국왕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빈 전투는 프랑스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국왕 필립이 죽을 뻔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는 용케 살아남아 군대를 지휘하였고 영국군과 신성로마군을 모두 궤멸시켰습니다. 프랑스 국왕 필립은 전투 중 오토가 버리고 간 황제의 깃발을 노획하여 이를 프리드리히 측으로 보냈습니다. 파문 당한 오토는 황제의 깃발도 버리고 간 겁쟁이로 소문나버렸고 그 결과 그의 거점은 프리드리히 지지파의 군대에 모두 함락되었고, 그는 가택연금 중 병사하였습니다.
한편 부빈 전투는 영국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프랑스와의 전쟁, 어디까지나 국왕의 사적 전쟁에 지나지않았던 전쟁을 탐탐치 않게 생각했던 영국의 영주들은 국왕이 돌아오는 것을 막아섰고, 국왕을 압박했습니다. 이에 국왕은 본인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교황의 답신은 늦었고 결국 영주들은 국왕을 포위했습니다. 그 결과 국왕과 영주들이 타협한 문서가 그 유명한 마그나 카르타입니다. 나중에 교황은 이를 중세 군주권을 침해하는 문서라고 여겨 이를 '불법문서'라고 규탄했지만 말이죠.
4. 교황의 첨병이 된 수도회의 탄생,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이노첸시오 3세의 권위를 유럽전역에 확장시키는 데 충실한 보조원이 된 이들은 수도사들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창성한 프란치스코회인데, 프란치스코는 곧 성인으로 추존될만큼 자비심과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처럼 청빈을 추구했고,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미덕으로 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정신에 따라 창설된 수도회는 걸인수도회 또는 탁발수도회라고도 알려지게 되는데, 계속 청빈검약을 추구하면서 마을과 마을을 옮겨다니면서 설교를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등의 행위를 했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일반백성들과의 삶과는 유리된 상태로 살아가는 주교들과는 다르게 이들은 일반백성과 어울리면서 생활하였고, 그들의 언어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설교를 수행했습니다. 사실 이런 단체들은 교황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이노첸시오 교황은 오히려 이들을 우군으로 삼았고 이들을 통해 교회의 권위를 드높였습니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교황의 직속부대가 되면서 이들은 세속군주도 심지어 주교들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교황이 각국의 주교를 통해 세속군주를 견제했다면, 이들 주교를 수도회를 통해 견제한 것입니다.
5. 이노첸시오 3세, 법학자이자 개혁가였던 교황
이노첸시오는 현실정치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교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세 대학의 설립과 로마법의 보존 그리고 교회의 원칙을 제정하는 데도 지대한 영항을 끼쳤습니다. 프랑스 파리대학이 탄생한 것은 이노첸시오 덕분이었고, 실제로 이노첸시오 본인부터가 원래 파리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교황 즉위 후 파리에 국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독립된 교육기관을 설립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파리 소르본느 대학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이노첸시오는 로마법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고 전해지며 그의 법학지식은 빈틈이 없어 그의 칙령에는 모두 법적 근거와 전례가 있어 국왕과 영주들이 상대하기 버거웠다고 합니다. 그는 힘으로만 국왕과 영주와 주교들을 누른 것이 아니라, "법"으로 이들을 누른 것입니다. 중세유럽에서 법(LEX, CODEX, JUS)이란 것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데, 십자군 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무슬림인들이 프랑크인들의 잔혹함을 비난하면서도 프랑크인들로부터 본받을 만한 것은 '법에 대한 관념'이라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이란 책에 관련 대목이 나옵니다). 따라서 국왕의 고문들은 모두 법학자여야 했으며, 교회의 주교들 또한 당연 신학 뿐만 아니라 법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이노첸시오가 로마법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오늘날 미국의 국회의사당에는 이노첸시오 3세의 기념동판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 국회의사당 - 이노첸시오 3세 기념판
교황은 1213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 무려 1,300여명의 주교와 사제들을 초대하였고, 역대 최대규모의 공의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중세시대의 교통기술을 감안하면 그만큼 많은 인원이 왔다는 것 자체가 당대 교황의 권위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공의회에서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 많은 교회법이 의결되었는데, 예컨대 1년에 한번은 반드시 고해성사를 봐야 한다는 것 또는 성체성사의 절차 등을 규정하였습니다. 그 외에 중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성직자는 사형선고를 내릴 수 없고, 또는 사형 관련 재판에 재판관으로 참여할 수도 없다"는 조항인데, 훗날 템플기사단의 고문과 사형에 교황이 참여하게 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한편 같은 공의회에서 무슬림인에게 배나 무기 등 전략물자를 제공하는 자는 파문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당시 교황은 십자군 전쟁에 상당히 진지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 외에 그는 교황청의 추기경단이 1주일에 3번 이상 회의하도록 규정하였고, 교황청 내의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면서 검약을 강제하였고, 축복이나 성사를 돈을 받고 행하는 주교나 추기경을 강력 처벌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의의 정신을 이어받은 교황으로서, 청빈검약과 경건한 삶에 대한 의지는 진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본인은 매주 토요일 12명의 걸인의 발을 씻기는 행사를 매번 개최하면서 교황으로서 모범이 되고자 했습니다.
6. 죽음 그리고 교황권력의 추락
37세에 권좌에 오른 교황 이노첸시오 3세는 1216년 55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제5차 십자군을 기획해서 이집트를 해방(교황 입장에서는 해방...원래 기독교 땅이었으니)시키고자 했으나 결국 이를 실행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사실 그의 생전 제4차 십자군이 파견되었는데, 가라는 예루살렘은 안 가고 같은 기독교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서 대단히 충격받았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속죄 차원인지 교황청이 직접 기획하고 목표물을 정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는 이를 실행하지는 못하고 죽었고, 그의 사후 교황권력은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하여 나중에 교황은 프랑스 국왕이 보낸 사자에게 뺨을 맞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이른바 아비뇽 유수라 불리는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