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권력의 절정기를 보여준 이노첸시오 3세의 사후,
교황국가는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정치적으로 우유부단한 교황들이 잇따라 즉위했고 그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반도는 종종 전장이 되었으며,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황제파와 교황파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 로마는 구 귀족계급이 황제파를 자임하였고, 신흥귀족계급은 교황파를 자처했습니다. 이에 교황직 또한 이들 귀족계급의 세력투쟁에 따라 결정되는 자리가 되어, 마치
서기 10세기 당시 로마 귀족이 전횡을 부리던 시대처럼, 다시 귀족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기10세기와 달리 이번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죠.
확고한 영토적 기반을 갖춘 왕국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1. 보니파시오 8세의 등장과 프랑스와의 대립
넷플릭스 드라마 나이트폴 - 보니파시오 8세
1294년, 당시 로마의 가장 힘이 쎈 가문은 콜로나 가문과 오르시니 가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황좌를 놓고 경쟁하였으며, 이들의 대립은 때로 유혈사태로 번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두 가문이 타협해서 한 교황을 옹립하였는데, 그는 첼레스티노 5세라 불린 교황이었습니다. 첼레스티노 교황은 대단히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경건한 수도사로, 세상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며 심지어 라틴어조차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경건함 그 자체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를 혐오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옹립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직은 지극히 정치적인 자리였고, 첼레스티노 교황은 이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는 5개월만에 교황직을 사퇴하였고, 그의 후임자로 보니파시오 8세가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첼레스티노에게 사임을 권유한 것 또한 보니파시오 8세였습니다. 그는 교황에 등극하자, 전임자 첼레스티노를 구금하였고, 첼레스티노는 가택연금 중 사망하게 됩니다. 사실 민심은 첼레스티노 교황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그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가 살해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보니파시오 8세는 오르시니나 콜로나 같이 강력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로마의 3인자라고 할 수 있는 카에타니 가문 출신으로 귀족출신이었고, 대단한 야심가였습니다. 그는 이노첸시오 3세만큼이나 강력한 교황을 지향했고, 이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자 했던 인물입니다. 1300년 그는 교황역사상 처음으로 희년(Jubilee)이라는 것을 선언해서, 로마에 오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죄를 용서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결과 유럽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원을 받고자 했고, 이들이 내는 각종 헌금으로 십자군 전쟁으로 탕진된 교황청의 금고를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콜로나나 오르시니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그는 본인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성직매매라고 볼 수도 있는 수단도 가리지 않았으며 세를 규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당대인들도 그가 너무하다고 느꼈는지,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그가 저술한 신곡에서 보니파시오 8세를 지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보니파시오 8세는 그 일생 최대의 정치적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유럽 최강의 군주 프랑스 국왕 필립 4세를 상대로 전면전을 선포한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싸움을 먼저 시작한 건 프랑스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필립 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영국과 계속 전쟁을 치르기 위해 위해 성직자들을 상대로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는 교황이 전통적으로 누리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황 측에서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의 성직자들에게 프랑스 국왕의 명을 거부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이는 프랑스 국왕의 권리를 전격적으로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이 간과한 게 있었으니, 사실 프랑스의 성직자들은 교황보다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하였고, 이미 당대인들도 방탕하다고 조롱한 교황 보니파시오를 따를 의향이 없었습니다. 프랑스 왕 필립은 오히려 반격에 나서 무기, 말, 생활물품, 보석, 돈, 귀중품 등 모든 물자의 반출을 금지하였고 이는 교황에게 심각한 일격이었습니다. 당시 교황청의 수입의 절반은 프랑스에서 나오는 것이었는데, 프랑스 왕이 이의 반출을 완전히 차단하자 교황청의 재정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에 보니파시오 8세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가 성직자들에게 과세하는 권한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필립의 조부 루이9세를 성인으로 시성하였습니다. 프랑스 교회는 이때부터 로마와는 별도의 권한을 누리는 주체가 되어 이른바 갈리아주의(Gallicanism)이라 불리는 조류를 형성하게 됩니다.
2. 콜로나 가문의 음모, 그리고 프랑스와의 밀착
교황이 프랑스를 상대로 굴복하자, 그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이는 내심 카에타니 가문의 약진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콜로나 가문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교황이 콜로나 가문의 영지를 몰수하고, 콜로나 가문의 추기경을 파문하는 등의 행위를 일삼았기에 콜로나 가문은 교황에게 더더욱 증오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콜로나 가문은 당대 백성들이 존경하였던 첼레스티노 5세의 사망 배후에는 보니파시오가 있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그리고 그가 부당한 방법으로 교황좌에 올랐다는 소문도 퍼뜨렸습니다. 물론 보니파시오 8세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에 적극 대응하면서 콜로나 가문을 압박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는데, 필립 4세가 교황과 그 어떤 상의도 없이 교황직속에 있었던 주교를 반역혐의로 재판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국왕의 파문을 준비했습니다. 교황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전, 마지막 협상을 위해 사절을 프랑스에 외교사절로 보냈는데, 그 사절은 변절하여 오히려 프랑스 국왕 편에 서서 교황이 이단이라고 고발하였습니다. 근거는 없지만, 아마 콜로나 가문이 뒤에서 조종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 국왕의 충실한 보좌관이었던 기욤 드 노가레는 뛰어난 법학자이자 확고한 반교황파로, 이미 로마의 콜로나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사실 기욤의 조부는 과거 교황의 이단심문관에 판결받고 화형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복수할 기회를 얻었고, 정력적으로 반교황파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나이트폴 - 기욤 드 노가레 (좌측), 프랑스 국왕 필립 4세 (우측)
3. 전대미문의 사건, 아냐니 따귀 사건
교황은 결국 프랑스 국왕 필립 4세를 파문했는데, 이에 앞서 프랑스 국왕은 최초로 삼부회를 소집하여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평민의 지지를 얻어 교황을 규탄하였고 그가 이단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프랑스는 보니파시오 8세를 정통성 없는 교황이라고 선언한 것이고 따라서 그의 파문은 어떤 효력도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단 교황을 체포해서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로마의 콜로나 가문은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그리고 과거 교황시대와는 달리 보니파시오 8세를 구원할 그 어떤 세속군주도 없었습니다.
결국 1303년 9월 7일 새벽, 기욤 드 노가레와 스치아라 콜로나의 지휘 아래 무장한 부대가 보니파시오 8세가 칩거하고 있던 아냐니 시로 쳐들어갔습니다. 교황의 호위병은 어서 교황을 피신시키려고 했지만, 도망가기에는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결국 교황은 예복을 완전히 갖추어 입고 머리에 관을 쓴 채 성좌에 앉아 음모자들을 기다렸습니다. 이때 스치아라 콜로나가 앉아 있는 교황을 상대로 뺨을 때렸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교황은 오히려 경건하게 "여기가 내 목이며, 여기가 내 머리"라고 말하면서 죽일 거라면 어서 죽여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콜로나 가문이라고 해도, 아무리 프랑스 국왕의 사자라고 해도 현직 교황을 죽이는 것은 너무 과감하고 극단적인 일. 결국 교황을 차마 축일 수는 없었고, 대신 그를 유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기욤 드 노가레는 교황을 프랑스로 압송하려고 했는데, 그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아무리 부패한 교황이라고 해도 교황은 교황. 교황에 대한 극단적인 처사에 분노한 아냐니 시민들은 봉기했고, 프랑스와 콜로나 가문의 부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로 돌아온 보나파시오 교황은 아냐니 사건의 충격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몇 주 후 사망하게 됩니다.
4. 아비뇽 유수 시대의 개막
아비뇽 교황청의 건물
보니파시오의 사후 베네딕토 11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프랑스와 화해하면서도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교황직을 모욕한 스치아라 콜로나와 기욤 드 노가레 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이와 같은 의사는 프랑스 국왕에게 분명하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즉위 1년만에 무화과를 먹고 죽었다고 하는데, 일각에서는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콜로나 가문의 소행이었을까요.
아무튼 또 한 차례의 콘클라베 끝에 무려 11개월만에 새로 교황이 선출되었는데, 그는 프랑스인이었고 교황명으로 클레멘스 5세를 선택했습니다. 과거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자의적으로 옹립한 교황의 이름도 클레멘스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시감이 들 정도입니다. 어쨌든 그는 기욤 드 노가레 뿐만 아니라 콜로나 가문에 대한 전격적인 사면을 거행하였고 추기경단을 프랑스인 친척과 프랑스에 호의적인 인사로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황궁마저 로마나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이전했습니다.
사실 당시 아비뇽은 프랑스 영토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국왕의 주권이 미치는 곳이 아니었고, 프랑스 남부는 사실 북부 프랑스와는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당대 사람들은 아비뇽은 프랑스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종의 독립적인 중간지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사실 이미 보니파시오 8세 이전부터 로마의 귀족간의 분쟁 때문에 교황궁은 이탈리아 각지를 맴돌면서 궁을 옮겨다녔었습니다. 오르비에토나 비테르보 등의 도시가 아비뇽의 역할을 수행했었습니다. 따라서 교황이 아비뇽에서 집무를 본다는 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파격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파격적인 일은 교황이 프랑스 국왕의 의지에 굴복해 그가 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십자군 전쟁 시대부터 교황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템플기사단이 해체되었습니다. 돈이 항상 궁했던 필립 4세는 유럽 최고의 부자 집단이었던 템플기사단의 재산을 가로채고 싶어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서 "국가 안의 국가"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왕권에 대해서도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필립은 클레멘스 5세로 하여금 이들이 이단이라고 선포하게 만들었고, 필립은 국왕의 권능으로 이들을 고문하고 화형시켰습니다. 교황은 극단으로 가는 것은 꺼려했지만, 프랑스 국왕의 영향 아래에서 반대할 힘이 없었습니다.
템플기사단의 화형식 중 당시 기사단의 수장 자크 드 몰레는 국왕 필립 4세와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무서운 저주를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 둘은 이듬해 모두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렇고 이후 교황들은 무려 70년 동안이나 모두 프랑스인들로 채워졌으며 추기경단도 대부분 프랑스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5. 아비뇽 유수의 교황은 프랑스의 꼭두각시였나?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오입니다. 프랑스 색이 진하게 칠해졌지만 오히려 아비뇽 유수 시대의 교황청은 이후 교황사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교황들이 모두 프랑스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꼭두각시는 아니었고, 교황직에 대한 나름 확고한 생각이 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프랑스는 영국과 백년전쟁에 돌입하여 교황청은 프랑스 국왕의 간섭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탈리아에 있었을 때보다 활동의 자유가 늘어났는데, 로마의 귀족의 영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비뇽의 교황청은 법률가들의 집합소가 되어 과거에 비해 행정조직이 훨씬 더 정교화되었고, 문서보관 및 수집이나 재정관련 문제도 더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개선되었습니다. 이는 사실 중세후기 프랑스나 영국 등 왕국들에서도 나타난 현상인데, 이들에 앞서 교황청에서 먼저 그러한 "관료제의 혁신"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더불어 이제 막 태동하고 있던 은행가들과의 협력도 이때부터 탄생했으며 교황청의 재정은 더욱 튼튼해졌습니다. 물론 교황청의 세속적 권력과 체계가 강화될수록 성직매매와 십일조, 사면권의 판매 등이 늘어났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교황청 자체의 힘은 증대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본격적인 세계 전도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아비뇽의 교황들은 저 멀리 몽골까지 선교사들을 보냈고, 당시 교황 요한 22세가 보낸 선교사 중 한명은 심지어 칸발리크(베이징)까지 가서 쿠빌라이 칸을 알현했을뿐만 아니라 그곳에 로마 가톨릭 주교좌를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아비뇽의 교황들은 몽골제국과 계속 서신을 교환하였고,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교황청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세계 전역에 대한 시야]를 갖춘 기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이 프랑스에 있는 동안 로마는 계속 혼란에 빠졌으며, 귀족들 간의 다툼은 더욱 심해졌고, 로마시민들의 자존심은 더욱 구겨졌습니다. 로마인들은 교황의 귀환을 빈번히 요청했지만 교황은 이를 줄곧 꺼려했습니다. 이 때문에 교황의 권위가 사라진 로마에서는 고대 로마의 이상을 다시 찾고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 중 한명은 아예 반란을 일으켜 로마공화국을 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콜라 데 리엔초라는 사람인데, 그는 스스로 로마의 호민관을 자처하여 로마공화국을 세워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중세시대에 이탈리아 통일을 이야기하며 로마제국을 언급한 사람은 그가 아마 유일하였으며 그래서 훗날 이탈리아의 파시즘 운동에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1377년, 여러 우여곡절 끝에 교황청은 로마에 귀환하였으나 세상은 이제 다시는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