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예술의 시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을 필두로 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듯했습니다. 학문과 미술이 발전하고, 상업과 금융이 발전하고 또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 그런데 동시에 부패와 음모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서로 외세를 끌어들여 자국의 지위를 높이려고 했습니다.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모든 일에는 뇌물이 필수였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할 성직자들은 부를 탐했고 첩을 거느렸으며, 사치와 방탕함을 온 몸으로 체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대표한 인물이 바로
로드리고 보르지아, 혹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였습니다.
보르지아 가문 - The Borgias
1. 로드리고 보르지아, 이방인이 교황이 되다
로드리고 보르지아는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으로, 이탈리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웃사이더였고, 따라서 그가 교황에 선출된 것은 상당한 이변이었습니다. 사실 본래 유력한 우승후보는 식스토 4세의 조카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였음에도, 보르지아는 엄청난 양의 뇌물을 써서 간신히 교황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추기경들에게 호화로운 대저택, 수익성 좋은 주교좌 등을 약속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식스토 4세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불만을 품은 추기경단은 그의 조카를 교황으로 선출하느니 차라리 지지기반이 부족한 아웃사이더를 교황으로 선출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대단한 실수였죠.
로드리고 보르지아는 계략가이자 음모가였고, 그는 살인도 전혀 겁내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이용하여 동맹을 맺고 또 군대를 키웠습니다. 교황은 자기 딸 루크레지아 보르지아를 3번이나 결혼시켜 계속 동맹을 갈아치웠고, 아들 체사레 보르지아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등 족벌주의의 끝판왕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심지어 본인의 계획을 위해 추기경으로 임명한 체사레를 다시 환속시켜 교황청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기도 했죠. 한편 외교에도 능숙하여, 전임 교황 식스토 4세와 대립하던 프랑스와 화해하고 오히려 루이12세를 지지하면서 스페인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와중 프랑스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면 도리어 스페인을 지원하면서 프랑스를 견제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외교방식은 중세시대 내내 교황청이 수행하던 외교방식인데,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의 군주들은 교황의 이러한 교활한 외교술수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위를 존중하였습니다.
2. 알렉산데르 6세, 유대인들을 정착시키다
알렉산데르 6세는 대단히 비상한 시기에 교황이 되었습니다. 그가 즉위한 해는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같은 해였습니다. 스페인 국왕은 새로 발견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 교황의 자문을 구했고, 교황은 이를 교황훈령으로 인정해주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냥 발견한 땅을 막무가내로 소유하는 게 아니라, 새로 발견한 땅에 대해 일종의 법적 권리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가톨릭 교회가 국제법의 기원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국가의 권리를 규제하고 국가 간의 분쟁을 중재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럴듯해보입니다.
그런데 1492년은 유대인 추방령이 발효된 해이기도 합니다. 스페인은 당시 국토를 통일하고, 왕권 강화 및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국내탄압을 가했고, 그 결과 중 하나가 유대인 탄압이었습니다. 스페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개종, 망명, 죽음 중 하나를 선택했어야 하는데 대부분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 중 상당수는 로마에 망명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 다스리는 도시 로마. 알렉산데르 6세는 수만명의 유대인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이는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들어올 때 재산을 교황청에 헌납해야 했으며, 또 무슬림 국가들이 비무슬림인들에게 특별세금을 부과했듯이, 알렉산데르 6세는 유대인들에게 특별세를 부과하였고 이는 교황청에게 나름 짭짭한 수입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대인들은 광기에 사로잡힌 스페인에 남는 것보다 돈을 내더라도 로마에 정착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3. 교황령의 제왕, 그리고 유럽의 균형자
알렉산데르 6세는 후세뿐만 아니라 본인이 활약한 당대부터 방탕한 자이자 부도덕한 자로 비난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업적을 남긴 군주였습니다. 사실 세속군주였다면 명군으로 평가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지지 기반이 약한 것을 감안, 본인의 아들들과 친척들을 주요 요직에 배치해서 콜로나나 오르시니와 같은 로마의 전통귀족들을 베제하였으며 이들의 지원을 받는 추기경들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습니다. 이를 위해 음모와 계략을 필수였고, 여기에 체사레 보르지아가 이끄는 군사력까지 더해져 교황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사실 교황권의 강화는 중세시대부터 역대 교황들이 모두 시도한 것이지만, 과거 교황들이 도덕적 권위외 외교에 의존했다면 알렉산데르 6세는 족벌주의와 물리적인 군사력으로 이를 실현시킨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알렉산데르 6세는 밀라노와 피렌체 그리고 스페인과 연합하여 이탈리아를 정복하고자 했던 프랑스를 견제했으며, 반대로 프랑스와 연합하여 이탈리아 반도에 세력을 확대한 스페인을 견제했습니다. 각종 합종연횡의 중심에는 교황령이 있었고, 교황은 그 어떤 세력도 이탈리아에서 절대적 우위를 갖지 못하도록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그는 필요할 때 군사력을 이용하였고, 상황이 불리하면 외교를 활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교황령은 더욱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행정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알렉산데르 6세는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고, 특히 보르지아 가문을 증오한 오르시니 가문은 쿠데타 음모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말이죠. 이에 알렉산데르 6세의 말년은 좋지 못했고, 특히 피렌체에서는 사보나롤라라는 개혁가이자 선동가인 수도승이 나타나 교황과 교황령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마나 피렌체에서 신정정치(theocracy)를 수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비단 피렌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추후 유럽 전역으로 번지게 될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로드리고 보르지아는 결국 1503년 말라리아로 사망하였고, 그와 함께 보르지아 가문의 행운도 사라져버렸습니다.
4. 교황인가 카이사르인가, 율리오 2세가 즉위하다
율리오 2세 초상화
1503년, 증오의 대상이던 보르지아 가문 대신 식스토 4세의 조카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교황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추기경 시절 삼촌 식스토 4세의 오른팔로서 군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던 무인으로, 추기경일보다는 군사에 더 관심을 보였던 인물입니다. 사실 그가 교황명으로 율리오(Julius)를 선택한 이유는 사람들이 이미 잊어버렸던 천백년 전 교황 율리오 1세(337~352)를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롤모델로 삼고 싶었던 것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율리오 2세는 카이사르와 같이 로마를 광명의 길로 인도하고 싶어했으며, 무엇보다 외세를 모두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자 했습니다.
그 첫번째 스텝은 "이방인" 보르지아 가문의 제거. 그는 보르지아 가문을 증오하였고, 이들의 권력을 모두 없애고자 했습니다. 보르지아 가문에 맞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너무 많은 적을 만들어버렸고, 교황직은 세습이 아니었기에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자 바로 보르지아 가문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로마의 유력 귀족 콜로나와 오르시니를 협력하게 만드는 일이었는데, 율리오 2세는 이 어려운 일을 성사시킵니다. 그의 중재 하에 로마의 양대 가문이 화해하였고, 스페인 출신 보르지아들을 몰아내는 데 협력했습니다.
율리오 2세는 무인 답게 그 스스로 군대를 이끌면서 교황령 주변의 도시들을 차례대로 함락했으며, 승전하고 로마에 돌아올 때마다 과거 로마의 장군들이 그러했듯이 개선식과 같은 장면을 연출하였습니다. 그는 현세의 카이사르였으며, 마키아벨리조차 위풍당당한 이 교황에 매료되어, 그를 두고 비르투와 포르투나가 함께하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했습니다.
또한 그는 교황 자신 직속의 무력을 강화하기 위해 "스위스 근위병"을 창설했습니다. 율리오 2세는 과거 스위스에 위치한 로잔(Lausanne)의 주교를 역임한 바가 있어, 스위스인들을 잘 알았고, 이에 스위스 의회와 정기적인 용병 공급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스위스 용병들은 용맹한 전사들이었고, 교황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근위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티칸에서 유니폼을 입은 스위스 근위대를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율리오 2세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 율리오 2세, 이탈리아의 해방자
율리오 2세의 치세는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교황령은 기독교 세계의 영적 심장이라기보다, 영토를 획득하고 다른 왕국들과 경쟁하는 군주국가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교황령의 영토를 위협하던 베네치아 공화국을 약화시킨 후, 곧 바로 프랑스와 대적했습니다. 프랑스는 베네치아의 완전한 멸망을 희망했으나 교황은 베네치아의 약체화만을 바랐던 것이지 이의 멸망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힘이 이탈리아에서 점점 강해졌기 때문에, 이는 교황령에게도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리오 2세는 과거의 적이었던 베니스와 손을 잡고 또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잉글랜드까지 끌어들여 반프랑스 동맹전선을 구축했습니다. 이른바 "신성동맹"이라 불린 연합이었습니다. 유럽의 강국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은 쉽지 않았습니다. 볼로냐가 잿더미로 변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교황을 배신하고 프랑스 편에 서기도 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율리오 2세는 "야만족인 프랑스인들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야 한다면서" 다시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고 또 밀라노를 포섭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1512년 스위스 근위병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율리오 2세의 치세는 이탈리아에서 외세를 몰아내는 데 집중한 시기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로마시민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편 교황령이 발행한 주화에 항상 IVLIUS II. LIGUR. P.M. 라는 표어를 새겼는데, 이는 리구리아 출신 교황 율리오2세 라는 뜻으로, 본인이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선전이었습니다. 사실 교황의 출신지를 주화에 표기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었는데, 그가 이를 계속 강조한 이유는 이방인이었던 보르지아와는 달리 자신은 진짜 이탈리아인이고, 따라서 이탈리아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율리오 2세 주화
따라서 로마의 인문주의자들은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영광, 과거 고대 로마와 같이 교황이 카이사르의 역할을 수행하여 기독교세계의 통일을 주도하기를 바랐습니다.
율리오 2세는 미술분야에서 거대한 업적을 남겼는데, 그는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당대 천재 예술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라파엘로나 미켈안젤로 모두 율리오 2세의 후원을 받았으며, 시스티나 소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천장 프레스코 또한 율리오 2세가 의뢰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베드로대성당의 설계도 (성당 자체가 완공된 건 17세기) 또한 율리오 2세 때 완성되었는데, 그는 진정 기독교 세계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역대 최대규모의 성당을 짓길 원했습니다.
6. 르네상스 교황제의 몰락
르네상스 교황들은 사치와 부패 그리고 타락으로 유명한데 동시에 교황령 국가를 강화하고 행정을 정비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들은 성직자라기보다 세속군주와 같이 경쟁하는 또 다른 세속군주였으며, 이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중세교황들이 금지했던 성직매매나 각종 성사 판매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이는 당대인들이 신랄하게 규탄하던 것들이었습니다.
교황령이라고 하는 세속국가는 강화되었으나, 교황직의 영적 권위는 땅바닥까지 추락하였고 결국 마르틴 루터와 같은 개혁가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토양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영적 권위가 없는 교황은 다른 세속군주와 같이 힘으로만 평가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훗날 결국 유럽의 세속군주들이 교황령을 완전히 무시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독일 중심으로 종교개혁운동이 벌어지자 기독교 세계는 분열되었고, 로마 교황의 권위를 아예 완전히 부정해버리는 군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기독교 세계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뿐만 아니라 개신교라 불리게 될 새로운 세력으로 3분되었고, 교황은 더 이상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황권의 추락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1527년 로마의 약탈(Sacco di Roma) 이었는데, 이는 심지어 같은 가톨릭 국가 신성로마제국 주도 하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제국군 휘하에 있던 개신교 병사들은 로마를 철저하게 불태우고 약탈하였으며, 온갖 끔찍한 일을 마구 저질렀다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로마에 대한 그 어떤 존경심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이 때 로마의 인구는 5만5천명에서 만 명 정도로 급감하였으며, 로마제국 말기 게르만족의 로마 약탈 이래 가장 충격적이었던 약탈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 동안 짧았던 영광은 이렇게 끝나버렸고, 그 이후 교황들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 세속군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