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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8/08 20:40:52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레바논은 왜 프랑스의 신탁통치를 바라는가? (수정됨)
최근 베이루트에서 거대한 폭발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140명 이상 희생되었으며 5천명 이상 부상당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30만명에 가까운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사 발생 후 이틀만에 프랑스 대통령이 참사 현장을 방문하였고 이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레바논의 그 어느 정치인도 참사현장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프랑스 대통령이 먼저 이곳을 방문한 것입니다. 현지 주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였고, 심지어 부패한 자기나라 정권을 전복시켜달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또 레바논 인터넷 청원사이트에서는 무려 5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10년간 프랑스의 신탁통치를 원한다고 서명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는 굉장히 기묘한 상황입니다. 어떻게 다른 나라에 주권을 위임하기를 원하는 것인가, 또는 어떻게 과거 식민지 모국이었던 나라에 대해 다시 돌아와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왜 프랑스 대통령은 그 어느 나라보다 먼저 레바논에 직접 가서 그곳 주민들과 만난 것인가?

물론 프랑스는 과거 레바논을 통치한 적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제국을 분할하면서 국제연맹의 신탁통치 형식으로 레바논을 1920년부터 1944년까지 약 24년 간 통치한 것이죠. 프랑스의 국민영웅 샤를드골도 젊었을 적 이곳에서 2년간 복무한 적이 있습니다. 1944년 프랑스가 레바논에 주권을 되돌려주었으나, 그 조건으로 프랑스가 주도한 헌법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요지는 대통령은 기독교가 되어야 하고, 총리는 순니 무슬림 그리고 하원의장은 시아 무슬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레바논에 존재하던 3대 종파의 균형을 위해 프랑스가 조정한 안이었습니다. 식민지라고 하면 일제강점기를 연상하는 한국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레바논은 독립 후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레바논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에도 무려 22만명에 달하는 레바논인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프랑스에서도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며 사회의 중산층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레바논과 프랑스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었더군요. 

과거에는 레바논이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레바논이라 불리게 되는 지역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정복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이곳은 오스만 제국 점령 하에 있던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종파가 서로 이웃하며 지냈습니다. 순니파, 시아파, 드루즈교도, 그리고 상당수의 기독교(정교회+마론파). 그 중 마론파 기독교는 레반트 지역의 토착 기독교이면서도 그리스정교회와는 달리 로마교황의 우위권을 인정하던 기독교도였습니다. 

그리고 1639년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는 레바논 지역의 마론파 기독교의 보호자를 자처하였으며, 그들이 프랑스에 유학하거나 다른 활동을 해도 좋다고 선언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스만 제국의 주권침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당시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은 오래전부터 동맹관계에 있던 나라였습니다. 오히려 오스만제국은 자국내 가톨릭 기독교에 대한 관할권을 프랑스 국왕에게 위임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프랑스는 공사를 파견하여 이곳에 상주하게 되었습니다.  

마론파 기독교도들은 유럽과 중동을 잇는 특수한 지위 때문인지 상업에도 두각을 나타내었고, 사회의 중간계급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베이루트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급기야 베이루트 인구의 절반은 기독교도였습니다. 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인구분포가 교묘한 세력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인지, 양 종파는 큰 문제 없이 비교적 원활하게 공존했습니다. 아울러 중동에서 으뜸가는 상업도시 중 하나로 발전하여 1827년에 이르면 베이루트에 상주하던 프랑스 공사가 "이곳은 상인들의 공화국이며 그들만의 법과 힘을 자랑한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베이루트가 본격적으로 중동의 파리라 불리게 될 대도시로 발전한 것은 1831년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가 모국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일으키면서 레바논-시리아 지역은 이집트군 수중에 떨어졌고, 거침없는 근대화를 추진했던 그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 마흐무드 나미 베이를 현지 총독으로 임명하여 이곳을 다스렸습니다. 마흐무드는 도시를 현대적으로 재건하였고 상업을 장려하였습니다. 그 결과 베이루트에 본거지를 둔 회사가 점점 증가하였고, 무역액도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1836년에 이르면 프랑스 외에 도 러시아와 미국 그리고 오스트리아도 공사관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는 그만큼 이 도시가 번성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한편 베이루트를 통치하던 것은 드루즈라고 알려진 일종의 무슬림 분파였는데 (참고로 무슬림교도는 이들을 무슬림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이곳의 통치를 위임받은 봉건영주집단이었습니다. 이들 또한 상업에 특출난 능력을 발휘한 자들로, 1839년에는 영국과 접촉하여 영국의 통치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도의 파르시(페르시아) 상인들이 영국통치로 번영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은 새로 이곳을 통치하게 된 이집트인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마론파 기독교를 이용하여 드루즈인들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1839년 드루즈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집트 총독은 마론파 기독교도를 기용하요 이를 진압했습니다. 수백년간 이어지던 공존이 완전히 깨지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과 드루즈인, 마론파 기독교도, 시아파 무슬림을 대표한다고 자처한 지도자들은 공동명의로 오스만 제국 술탄에게 서신을 발송, 이집트 총독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영국과 오스트리아 등의 도움을 받아 레바논을 탈환하였고, 종파간 갈등은 당분간 해소되었습니다. 

베이루트가 안정을 되찾자,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들이 대거 유입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회, 카푸친회, 예수회 등. 많은 가톨릭 선교사들이 레바논을 찾았고, 이들은 과거 미국인 선교사들이 구한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설립했듯이 이들 또한 베이루트에 학교와 병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물론 프랑스어를 가르쳤습니다. 가톨릭과 우호적 관계에 있던 마론파 기독교는 이에 고무되어 사회에서 점점 더 적극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지원 아래 기고만장해졌습니다. 또한 1860년, 경기침체에 따라 마론파 기독교 농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자, 이들에 대한 반감을 품던 기존의 기득권자 드루즈인, 그리고 무슬림들은 분노에 휩싸여 결국 마론파 기독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15,000의 기독교도가 학살당했고, 200여개의 마을이 불탔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10만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학살의 배경에는 무슬림인들의 강한 반감이 있었습니다. 1821년 그리스의 독립 이래, 오스만 제국은 정책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었고, 지방에서는 유럽인들과의 무역으로 점점 부유해진 기독교도들을 질투하였고 시기하였습니다. 레바논 최초의 무역상사, 인쇄소, 출판사 등 대부분 기독교도가 설립하여 사회에서 특출나게 부유한 계층으로 자리잡자, 이들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지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도에 대한 학살소식은 곧 유럽에도 전해졌고, 결국 프랑스와 영국은 함대를 파견하여 베이루트를 봉쇄하였고 특히 프랑스의 경우 육군 7,000명을 파병하여 기독교도를 보호했습니다. 이에 레바논은 프랑스군의 감독 아래 안정을 되찾았지만 종파간의 갈등은 전혀 해소되지 못했습니다. 기독교도들은 프랑스에게 군대를 계속 주둔시켜달라고 요청했고, 무슬림인들은 당장 철수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와중 오스만제국 술탄의 대리인으로 온 푸아드 파샤는 학살 가담자들의 처벌을 약속했습니다. 사실상 새로운 레바논 총독으로 부임한 것과 다름없었지만, 그는 유럽열강들과 협상하여 레바논 지역에 일종의 국제적 보장을 받는 특수통치구역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훗날 레바논이라고 불리게되는 국가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은 1861년부터 1915년까지 이 지역의 총독으로 계속 기독교도(가톨릭)를 기용했습니다. 

안정을 되찾은 레바논, 특히 베이루트는 기독교가 인구의 55~66%를 차지하는 도시로 발전했고 생활양식의 많은 부분이 유럽의 그것과 유사했습니다. 유럽식 학교와 정원, 나름 근대적인 시설이 구비된 도시였고,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번창했습니다. 그 결과 오스만제국은 베이루트를 술탄 직할 도시로 승격하였고, 베이루트 산하 트리폴리 등 여러 도시를 두게 하여 레바논 국토의 원형을 만들었습니다. 오스만제국은 베이루트를 특별취급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제국의 근대국가 프로젝트는 기독교도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대국가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을 만들어야 하며 국민은 같은 문화와 종교를 공유하는 집단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스만제국이 이슬람을 국교로 삼는 이상 기독교도들은 계속 탄압의 대상이 될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오스만 제국의 숙적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아르메니아인은 적국과 내통할 수 있다는 혐의로 특히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레바논의 기독교도들도 국제적 보장에 의해 안정을 찾았다고는 하나, 계속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애증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나름 안전을 보장해주던 오스만제국마저 제1차세계대전의 패전 후 멸망해버렸습니다. 

이에 레바논의 기독교도 대표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프랑스 측에 서한을 발송하여 대(大)레바논 국가의 독립과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 요청을 근거로 레바논에 대한 식탁통치(사실상의 식민지)를 시행했습니다. 단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새로 생긴 행정구역은 비기독교도 무슬림을 대거 포함시켜 오히려 마론파 기독교도의 세력이 위축되는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처음 대레바논을 구상했던 마론파 기독교의 판단착오였습니다. 그는 1915년의 대기아(the great famine)의 기억이 뚜렷하여 농지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커다란 행정구역을 요청했는데, 그 결과 한개 민족으로 구성된 현대적 국민국가(nation-state)를 건설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무슬림이 다수였던 시리아와의 통합을 원했고, 이는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불씨로 남게 되었습니다. 

1944년, 결국 여러 우여곡절 끝에 레바논이라는 나라가 독립하게 되었으나, 이 국가의 안정은 거의 전적으로 프랑스에 의존하는 것이었고 새로 만든 헌법조차 프랑스의 지도 아래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결국 종파간 갈등은 법률로 간단히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1975년 내전이 발발하였고 이는 199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망명을 떠났으며 오늘날 레바논의 인구가 680만명인데, 해외에 분포한 레바논인은 1500 만명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중 대다수가 기독교입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60년대부터 레반논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레바논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만, 결국 계속 어쩔 수 없이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고 합니다. 레바논 내전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개입하여 평화유지군을 설치하고, UN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등 노력했으나 이러한 활동 등은 프랑스 자국 내에서 대단히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0년 레바논 내전이 끝나고 프랑스군이 레바논군 육성을 도왔는데, 성과는 미미했고 오히려 레바논이 헤즈볼라 등에 의해 잠식당하는 등의 사태가 초래되었고, 레바논은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의 각축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2017년 레바논 총리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해 납치/감금되는 상황이 발생, 프랑스 대통령의 개입으로 간신히 풀려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위를 살펴보니, 레바논 사람들이 프랑스의 신탁통치를 통한 안정을 바라는 게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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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린언니
20/08/08 20:41
수정 아이콘
(수정됨) 수정 감사드려요~
aurelius
20/08/08 20:44
수정 아이콘
앗 크크 고쳤습니다
20/08/08 20:50
수정 아이콘
프랑스가 헌법을 만들었다면 프랑스식 정교분리 같은걸 할것 같았는데 그런거 없이 그냥 쿼터로 견제하게 했나보네요? 좋았던 옛날이 식민통치시기라니 한국사람으로선 갸웃거리게 되네요 크크
파아란곰
20/08/08 21:01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상당히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군요.
Capernaum
20/08/08 21:35
수정 아이콘
영화 그을린 사랑의 배경이죠...

비극적인 역사...
-안군-
20/08/08 21:42
수정 아이콘
저놈의 쿼터제때문에 정부각료들이 서로 견제 및 반대만 하고 협의를 안해서, 국정이 마비된 상태가 꽤 오랫동안 지속돼왔다고 들었습니다.
20/08/08 22:18
수정 아이콘
근데 상황보니까 쿼터제 안하면 한쪽은 짓눌릴것 같네요. 쿼터제하고 서로 타협안 찾는게 이상적일 것 같은데
-안군-
20/08/09 11:11
수정 아이콘
정치라는게 그렇게 이상적으로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우리나라도 보수/진보가 쫙 갈려서 발목잡기에 여념이 없지만, 어쨌거나 유권자들 입장에선 얼마든지 갈아탈수 있거든요, 근데 저기는 서로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끼리 갈라놨어요. 특히 이슬람 순니파-시아파 갈등은 이슬란-기독교 갈등보다 오히려 더 심각하죠.
목숨을 버리면 버렸지 절대 타협 안할겁니다;;
20/08/09 16:22
수정 아이콘
그럼 한쪽으로 쏠리면 더 문제되지 않을까요?
월급네티
20/08/08 21:56
수정 아이콘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프랑스랑 정말 멀리있는데 인연이 신기하군요.
20/08/08 21:59
수정 아이콘
(수정됨) ["단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새로 생긴 행정구역은 비기독교도 무슬림을 대거 포함시켜 오히려 마론파 기독교도의 세력이 위축되는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 이건 오스만을 붕괴시키고난 프랑스 식민당국의 발상이었기도 했죠. 식민지의 선을 이상하게 긋는건 역시 식민제국의 특성인가 봅니다. 그래서 저는 마크롱의 행보에 대해서도 좀 게슴츠레하게 쳐다보게 되는군요.

아무리 현지 지도자들이 원한것이 있다고 해도,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프랑스였으니까요. 오스만에서 통치할때의 엄밀히 '기독교인 구역=레바논' 보다는 더 크게 잘라서 기독교 지배지역을 늘려서 시리아 전체의 통치에 써먹을려고 이이제의를 꾀한 측면도 있다보니,

당연히 프랑스가 물러가고는 레바논에 내전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지요. 식민지의 앞잡이라는 수사가 딱 이런 상황에 맞는 거니까요... 레바논 안의 무슬림이 봉기해서 이슬람 국가로 따로 떨어져나가 시리아와 합쳐지거나, 심지어 머릿수로 레바논 자체를 지배하자 라는 주장까지 나왔고, 이 발상은 실제로 내전 이후에 관철 됐죠, 적어주신 것처럼 관료와 국가수반을 비율을 정해 종교별로 나눠서 가지기로 했으니까요.

제가 중동역사를 정말 좋아합니다만, 선뜻 PGR에 제가 나서서 글을 적기가 두려울 정도로 이곳의 역사는 정말 혼란의 연속입니다. 여러 입장으로 역사를 읽는 법이 있고요 (제가 중동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만, 동시에 자신만만하게 다루기를 꺼리게 만들어줍니다), 중동관련 글을 적어주시는 수고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상황입니다
20/08/08 23:58
수정 아이콘
중동 역사 관련 서적 추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도 관심이 있어서 파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더라구요...
20/08/09 01:45
수정 아이콘
(수정됨) '아민 말루프'의 '역사소설'들을 먼저 추천합니다. 한국에 번역된 '역사책'은 3가지가 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만, 또한 제 생각에 모두 입문용으로는 부적절합니다.

1) 서구 사학자가 서구 입장에서 쓴 지나치게 길고, 지나치게 뭉퉁그려진 통사론 번역책 (아바스 왕조 다음에 "사마라의 대혼란" 다음에 셀주크 튀르크 다음에 룸 술탄국 다음에 오스만 투르크로 왕조가 바뀌고 영토가 분할되고 쿨쿨쿨... 어우 재미없어라... 도대체 요즘 중동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고...) ,

2) 이라크 침공 이후로 중동역사와 중동인에 대해서 미국 정책결정자들이나 미국 대중들이 보라고 쓴 '중동 전략서' (이래서 이라크는 실패했고, 이라크의 영토내에는 사담 후세인 잔당과 이란에서 보낸 테러리스트들이 가득하고... 민주주의가 이래서 이식되지 못했고 이런 후진성 때문에 이행되지 못하고 미국의 선의가 곡해되고 있으며, IS는 어쩌다 탄생했고...),

3)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인한 '착한 무슬림 홍보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고, 관용을 중요시하는 종교이며, 근대 이전의 무슬림 국가들은 이슬람 교인들 이상의 영역을 포괄하며 다양한 인종과 종교인들을 아우르는 제국을 세웠고...)

워낙 다양한 입장이 충돌하고 있다보니, 어떤 책이 되었던지 간에 그 책을 집으면 "한 가지 입장"이 정말 강한게 중동사의 단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흥미를 일으키는 장점이기도 하지만요 흑흑...) 입문에는 정말 안 좋은 특성이지요.

하지만 역사소설 "사마르칸트"' (지역도서관에 한 3곳 있으면 1곳 정도는 비치되있는 지나간 초기 '베스트셀러' 중 하나입니다)의 경우에는 단 한권의 책으로 2부 구성을 통해 페르시아=이란의 중세사와 근현대사를 한번에 이어버립니다. 현대사를 포함해서 빠진 퍼즐이 많지만, 그건 애초에 소설의 주인공들의 초점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너무 군더더기 없이 "아 혹시 지금 이란이 중세에 이랬기 때문에 지금도?" 라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지요.

같은 작가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역시 정말 추천합니다. 이름은 역사개론서 같지만 사실 '역사소설'입니다... 작가는 '소설'로 안쓸려고 노력했다고 하지만 80년대 책이고, 소설가가 쓴 책이라서 오류도 많습니다, 하지만 재밌으면 일단 입문은 최고죠 흐흐흐흐. 이렇게 2권은 제가 한국어 번역이 나쁘지 않아서 추천드리는 것도 있습니다. 좀더 부드럽게 옮길 수도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좀 있습니다만... 이 정도면 뭐, 더 '끔찍하게' 옮긴 역사번역서들도 있어서요.

여기서 조금 시쳇말로 '뇌절' (작가가 뇌절이 아니라, 굳이 3권을 다 읽어야지! 하실 필요는 없고, 앞선 2권 중에서 하나라도 '오 더 알고 싶은 주제야, 이 작가의 소설도 잘 맞네' 싶으시다면...)을 하면 "동방의 항구들"까지 추천합니다. 아민 말루프가 진짜, "중세는 이런 일이 있었다...? 중동풍 판타지 같아서 술술 읽지? 근데 이 이야기가 근현대에서 이렇게 이어져..." 라고 말하는 이야기 꾼이라서 정말 좋아요.

셋다 300쪽 내외의 '단편' (한권으로 끝나니까요!) 소설입니다만 제가 3권씩이나 추천드려서 부담스러우시다면, "랍비의 고양이" 역시 추천합니다. 이것도 도서관에 많아요. 그리고 만화책 (엄밀히는 '그래픽 노블') 입니다. 최고죠!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도 아니고 '식민지 원주민 아랍인'들도 아닌, 북아프리카 (넓게보면 아랍세계)의 유대인들의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의 이야기. 알제리의 역사에 평소에 관심이 많으셨다면, 영화 "알제리 전투"나 (절대 가볍게 볼 물건이 아닙니다, "지옥의 묵시록" 이전의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평가처럼, 아비규환과 유혈낭자함을 기분 나쁠정도로 담담하고 구체적으로 다루는 작품이에요), 한국어로도 번역된 "프란츠 파농 (평전)"이 그나마 '입문'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알제리전쟁 1954-1962"과 "알제리 혁명 5년" 이라는 두개의 좋은 책이 있습니다만, 입문서라기 보다는 "아 알제리에 이런 일이 있었지, 이거에 더 알고 싶어"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알제리 역사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 두 권의 책들이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일거에요. '유럽인' 그것도 '프랑스인'을 시켜주겠다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알제리는 피를 흘리고, 그것에 대항할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게 파농의 죽음으로 실패하면서 차선책으로 '아랍인 민족주의'를 포옹하면서 우리 모두가 아는 거대한 중동사의 일부가 되어주어야했는지.

제가 알제리 역사에 대한 책을 길게 말한 이유는,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너무 길지는 않게 다루는 책들이 '없습니다'. 제가 특히 현실의 벽을 정말 크게 느낀게... 제가 이란 혁명 관련해서 한번 피지알에 글을 쓰고 싶은데요, 한국에 이란 통사책이 없습니다. 소책자는 있는데요, 제대로 만든 책은 한국인 저자의 책도, 번역서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마르칸트"가 암시한 (책 자체는 현대사는 다루지 않습니다) 이란 근현대의 역동적인 모습 (결국 '이란 혁명'이라는 촌극으로 끝나버렸지만, '연합군의 페르시아 침공', '이란 위기', '에이젝스 작전'이라는 삼연타로 서구의 의중에 따라 이란의 지도자를 3번 바꿨는데, 결론이 라스푸틴 같은 호메이니의 집권이 아니었다면 그게 더 웃겼을 것 같아요)을 진짜 구체적으로 다뤄서 PGR에 자랑하고 싶은데, 전혀 다룬 책이 없더라고요. 이란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어음 저도 나름 관련 책을 읽어보고 싶어서 나름대로 시간도 돈도 투자해봤지만 소득이 없었다는 씁쓸한 고백을 해보려고요 흑흑...

그나마 최후의 중동제국이라고 불릴만한,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는, '실제상황입니다'님께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술레이만 시대의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같은 좋은 책들이 번역되어있습니다, 지나치게 간략하고, "와 오스만에서 가장 위대한 술탄은 술레이만이에요! 오스만의 세종대왕님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와 오스만이 건국되었고 어찌저찌하다가 망했어요 책 끝!" 이라는 식의 관점에서는 전형적인 1번 부류의 책에 해당하지만... 대체품이 없으니 어쩔수 없지요. 오스만 통사하고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만, 여기 PGR에도 '신불해'님께서 오스만 제국 치하의 이집트의 파샤 (총독)들에 대해 좋은 글을 써주신게 있으시니 그걸 참고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몰락'을 다룰려면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대한 책이 하나, '아타튀르크'에 대한 책이 하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레바논에 대한 이 글처럼, 오스만은 근현대 중동사로 바로 이어지는, 마치 한국사의 조선에 해당하는 이야기인데, 한국에 출판된 오스만 이야기는 조선으로 치면 임진왜란을 막았답니다. 이순신(아타튀르크 만세!) 끝!, 이라고 끝나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대해 전면적으로 다룬 책은 구글 검색 끝에 "현대 중동의 탄생"이라고 저도 못 읽어본 책이 하나 있고 (800쪽이 넘는군요 으악!), 한국에는 '아타튀르크' 평전이 몇가지 판본이 있다는게 전부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두 종류의 책은 입문용은 아닌것 같고요, 유튜브의 엑스트라 크레딧이 다룬 시리즈가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주제를 전부 다루는 것으로요! : https://www.youtube.com/watch?v=f2L6L37GGAY&list=PLWUhYUntghg04E34fVNLOM2TDZjikU6Rq 으익, 근데 상대적으로 최신 시리즈라 한글 자막이 없군요, 좀 지난 시리즈들은 한글 자막이 있는데 아쉽군요. 사실 이건 보시는 분들이 달아주시는거여서, 어쩌면 이걸 확인한 제가 자막을 한번 달아볼 궁리를 해야봐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중동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중에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 그리고 같은 작가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있습니다. 또한 비슷한 느낌의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그리고 "서쪽으로" 가 있습니다만, 저는 이 책들 보다는 '아민 말루프'의 책들을 더 높게 평가합니다. 레바논에서 프랑스로 이민간 말루프는 "내가 어쩌다가 이곳으로 왔는가? 중동에서 유럽으로 간 사람들은 누가 있었고, 유럽에서 중동으로 온 사람들은 누가 있었지?" 라는 시점에서 따스한 중동사를 보여주지만, 호세이니나 하미드는 미국 이민자/난민으로서 "나는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나"라고 꽤나 날카롭게 글을 써서, "미국인들이 중동에 쳐들어왔지 않는가? 나는 미국에 쳐들어온 중동인이다, 내가 말할 이야기들, 아프간, 파키스탄의 이야기는 당신들도 다 아는 이야기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들이지, 왜 미국인들에게 중동의 이야기가 친숙하다고 생각해, 으응?" 이라고 하나도 따뜻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전달합니다. 분명 문학적 가치가 있고, 재미도 있으며, 지금 이 순간 세계의 어딘가 (= 중동)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생하게 그려내지요. 하지만 이들의 존재를 알리면서, 동시에 별로 중동사를 알고 싶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너무 '자기 입장이 쎈 소설'이라 다른 책을 읽은 다음에 추천드린다는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이상 의식의 흐름대로 적은, 어떤 영문학과 대학원생의 댓글이었습니다. 역사전공자도 아니고요, 중동역사는 교양수업으로도 못 들어보고 독학만 했습니다. 아마 좋은 역사 개론서, 제가 모르는 것을 지나가는 다른 전공자분께서 이 글에서 영감을 받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흐흐흐.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은 제가 카발라 등 다른 오컬트를 좋아하는 만큼 또 덕질을 한 주제입니다만, 이 댓글에서는 생략하는게 좋겠군요, 그런걸로 중동 역사를 배웠어요! 라고 했다가는 세간의 비웃음을 들을테니까요, 뭔가 관련된 책을 더 많이 읽어본 척 세탁을 해봐야겠습니다.
실제상황입니다
20/08/09 01:4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정말 정성들여 써주셨네요.
Je ne sais quoi
20/08/08 22:15
수정 아이콘
방문해서 환영까지 받는 거 보고 무슨 뒷 이야기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CapitalismHO
20/08/08 22:28
수정 아이콘
동북아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가장 모범적으로 적응한 이유에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탈종교성이 있지 않나합니다. 종교가 문제인 나라가 워낙 많아서..
몽키.D.루피
20/08/08 22:39
수정 아이콘
배경만 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식민통치와는 거리가 있네요. 애초에 그 지역이 독립된 국가가 아니었고 오스만 같이 대제국의 안정된 통치를 바라던 지역이라 프랑스 식민통치는 식민지라기보단 돌봐준다는 개념에 가까운 거 같습니다.
근데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레바논 내정에 간섭해서 정치를 안정시킬 수가 있나요? 현대국가 개념만 가지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잘 상상이 안되네요. 생각해보면 제국주의 시절에는 빈번히 일어나던 일이었겠죠?
모데나
20/08/08 22:51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도 조선족과 중국인들 그리고 무슬림들 유입을 조심해야 할듯. 전자는 중국의 국력이 너무 커지고 있어서이고 후자는 출산율이 너무 높아서임.
오호츠크해
20/08/08 23:08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 발전에 있어서 중동쪽과 비교 했을 때 가장 큰 장점은 유교라고 생각합니다. 다른게 아니라 유교의 특출난 세속주의요. 부동산 가지고 싸우고 어디에 투자할지로 싸우고 이거는 차라리 타협의 여지가 있지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싸우는 건 정말 답이 없는 거 같습니다.
펠릭스30세(무직)
20/08/08 23:20
수정 아이콘
유교는 번역의 오류지요.

당장 공자가 말한게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지요. 신의 영역이 있을수도 있지만 안물안궁. 그냥 인간의 이야기만 하자. 이런 거 였는데.
기사조련가
20/08/08 23:33
수정 아이콘
레바논 차라리 프랑스가 다스리는것도 좋을듯..
이미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없는 지경이고, 정치가 마비상태.
저기가 IS같은 세력에게 넘어가면 오우야...
두부빵
20/08/09 02:31
수정 아이콘
프랑스 입장에서 직접 다스리는건 정치적으로 부담 아닌가요?
레바논에서 나올 이득보단 손해가 더 커 보이는데
프랑스 국민들 입장에서 반길 이유가 없어 보이네요.
스카야
20/08/09 11:08
수정 아이콘
프랑스 입장도 들어보셔야..
두부빵
20/08/09 02:37
수정 아이콘
기나긴 종교 갈등이 주축이군요.
그럼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 상인들이 마크롱을 베이루트로 불러드린 장본인이고
폭발로 인한 레반논의 격변하는 정치 상황에서
그들의 입지를 다지고자한 행동이겠군요.
VictoryFood
20/08/09 07:34
수정 아이콘
어디나 종교가 문제라지만 이슬람은 너무 종교와 정치가 붙어 있어요.
최신 패치도 안되어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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