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세계적으로 명망있는 작가입니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분인데,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블랙스완]이라는 저서로 유명해졌죠. 그 외에 [안티프래질] 그리고 [스킨 인 더 게임]이라는 저서가 있습니다. 그는 본래 레바논 출신으로, 레바논 내전 당시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럼 그가 바라보는 레바논의 정체성이란 무엇일까요? 알고보니 그가 과거 2017년도에 쓴 글이 있더군요. 물론 그는 마론파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오늘날 해외 거주하는 레바논 인구가 1500만명이고 그 중 다수가 기독교임을 감안하면 (레바논 현지 인구가 680만명 / 그 중 40% 가량이 기독교) 보다 몰입하면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블랙스완 - 나심 니콜라스 탈렙
오늘날 레바논 기독교인이 프랑스어를 말하게 된 것은 북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식민지 시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자가 적지 않다 (심지어 전문가 중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프랑스가 레바논에 머무른 것은 고작 20년에 불과하며 이는 제1차세계대전 후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신탁통치" 형식으로 할양된 것이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달리 프랑스인의 식민(대규모 이주)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또한 프랑스어가 기독교 중산층에 널리 퍼지게 된 일은 오스만제국 시대 때였는데, 이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사실 메흐씨(Merci), 파흐동(Pardon), 콰풰르(Coiffeur) 등 프랑스어는 오스만 제국 시기 터키에서 건너온 것이다.
타이타닉호의 사례를 한 번 들어보자.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로 희생된 레바논인 이름 중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Eugenie Baqlini, Catherine Dawud, Helene Barbara, Charles Tannous, Marie-Sophie Abrahim. 1912년이면 프랑스가 레바논을 신탁통치하기 10년 전이다. 심지어 1920년 이전에 태어난 나의 가족 또한 Marcel, Edouard, Angele, Laure, Evelyne, Mathilde, Victoire, Philomene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1905년에 태어난 나의 어머니 또한 그의 숙모의 이름을 따라 Minerve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사실 아주 오래된 프랑스식 이름들이다.
나의 조부 나심은 프랑스어로 편지를 썼었다. 그는 오스만제국 시대 당시 프랑스 수도사들을 따라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으며 당시 기독교 중산층 대부분 그리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 베이루트로 이사했었다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쪽 친척 Nicholas와 Mikhael Goshn 은 러시아 학교를 다녔다). 나의 조상들에게 프랑스어란 라탄어를 대체하는 언어였다 (사실 레반트지역 역사를 통틀어서 엄청 많은 그리스어 작가들이 있었으며,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와 푸블리우스 시루스처럼 라틴어를 구사한 작가들도 있었다). MIchel Chiha와 Georges Schehade 이래 레반트의 문학은 프랑스어였다.
최초의 레바논 공화국 수립은 로마에 있던 마론파 기독교도의 로비 덕분이었다. 그들은 레반트에서 그리스-로마적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레바논은 아랍침공 이전 사실 무려 천년 간 그리스-로마 세계의 일원이었다. 베이루트에는 로마의 법학교가 있었으며 이들은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아랍인들도 레바논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아랍인들은 느리게 동화되었고, 도시들은 여전히 그리스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묘한 관계는 파티마왕조와 맘룩왕조 시대 때에도 같았다. 그리고 이어 오스만제국이 나타났다. 새로 오게 된 오스만제국은 로마제국처럼 행동했는데 사실 콘스탄티노플 정복 후 술탄 그 자신도 마치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것마냥 행동했다. 5백년 간 오스만제국은 유럽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유럽과 비즈니스 관계를 맺었다. 유럽 상인들과 유럽 건축가들을 기용하면서 말이다. 사실 프랑스애호(Francophile)의 원조는 오스만제국이었다.
1536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와 일종의 조차지 협정(Capitulation)을 맺었다. 이로써 Echelles du Levant이라는 작은 지역이 만들어졌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 상인들은 이곳에 머무르면서 상업활동을 할 수 있었다. 트리폴리, 시돈, 알레포, 스미르나, 콘스탄티노플에는 프랑스 및 이탈리아인 구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구역들은 곧바로 일종의 상업도시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베이루트는 주민 다수가 기독교였던 관계로 시돈을 대체하여 큰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당시 무슬림인들은 상업에 필수적인 검역조치 등에 반대했었다). 이들 도시들은 내륙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가 아니었고, 베이루트는 레바논이 아니었던 것이다. 베이루트에는 여러 이탈리아어가 섞여있었고, 트리폴리에는 여러 프랑스어가 섞여있었다. 이들 도시에서 국제어(Lingua Franca)는 이탈리아어-그리스어-터키어를 섞은 것이었다. 나의 증증증증조부 탈레브 나부트 메다바르는 마르세유와 무역을 했고, 그의 아들들은 트리폴리에서 ATF(Abraham Taleb Freres)라는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역자주: Freres는 프랑스어로 형제란 뜻이다)
(재미있게도 마론파 기독교도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들이 가톨릭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프랑스와의 관계는 깊어졌다, 특히 프랑스가 1635년 공식적으로 이들의 보호를 자처했을 때부터 말이다) (역자주: 마론파 기독교는 로마교황의 우위를 인정한 동방교회인데 프랑스는 이 점에 착안해서 자의적으로 이들을 모두 가톨릭이라고 간주했습니다)
1860년대, 나폴레옹 3세 시기 당시 프랑스는 레반트의 교육을 주름잡았다. 그리고 여러 수도회가 서로 경쟁했다. (역설적이게도 정작 프랑스 본국에서는 수도회나 교회는 탄압받고 있었다). 나의 조부 나심은 1912년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을 다녔고, 나의 어머니는 이탈리아인 수녀들을 따라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교육받았다.
나의 아버지의 친구는 예수회의 교육을 이렇게 묘사했던 것이 생각나고, 또 그의 동창이 나한테 이렇게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예수회는 우리 마론파들이 로마인들보다 라틴어를 더 잘 구사하기를 바랐고, 프랑스인보다 더 올바른 프랑스어를 구사하기를 바랐으며, 아랍인들보다 더 완벽한 아랍어를 구사하기를 바랐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라틴어에 대해서 우리가 잘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어렸을 적에는 많은 마론파 동포들이 프랑스인들의 문법을 지적하고 또 아랍인들에게 아랍어 문법을 지적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 세대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