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양문명의 역사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 중 하나는 두 개의 권력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성(聖)과 속(俗)의 구분입니다. 성경의 유명한 구절이 이를 대변합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다른 문명권에서 보통 군주가 사람들의 일반 행정 통치 영역을 넘어 신앙과 도덕 모두를 규정했었는데, 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에서는 군주는 국방과 행정을 담당하고, 교회가 사람들의 복지(의료 및 빈민구호 등)와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사실 동로마제국에서는 황제가 군주의 역할과 최고사제의 역할을 모두 겸하여 성과 속에 간섭했었는데, 서유럽의 경우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서로마의 멸망은 서유럽문명에게 축복이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2. 물론 반드시 이렇게 전개될 필연성은 없었습니다. 샤를마뉴가 서유럽 대부분을 통일하고 황제에 올랐을 때 그는 절대자로 군림하였고, 그는 스스로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샤를마뉴는 동로마의 황제처럼 직접 교리문제에 관여하고자 했었고, 교육문제에도 관여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라틴고전을 보급했습니다. 고대로마의 지식을 필사하고 보급한 것은 로마에 있던 교황청이 아니라 샤를마뉴가 고용한 수도사들이었고, 이들이 훗날 기독교 세계를 이끌 후학들을 배출하고 또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샤를마뉴는 과거 로마황제들이 그리하였듯이 스스로 신의 대리인이자 신앙의 수호자라고 생각했고, 다른 권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샤를마뉴의 제국은 단명했고, 불과 한 세대만에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3. 서로마도 멸망하고, 샤를마뉴의 프랑크 제국마저 와해되자 서유럽에 가장 일관되게 재산과 지식 그리고 전통을 유지한 것은 교회였습니다.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변호사이자 과학자였으며, 의료인이자 행정가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하게는 교회는 그런 세속적인 역할을 넘어 사람들의 영적 구원을 책임지는 최고의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의 일생주기는 모두 교회와 함께 했습니다. 태어나서 세례받는 일, 결혼할 때 승인받는 일, 병들었을 때 기도 드리는 일, 그리고 죽어서 장례식을 치르는 일은 모두 교회소관의 업무였습니다. 군주는 왕국 고유의 법으로 통치를 하지만, 교회는 교회법을 따랐고, 군주로부터 침해받지 않을 권리도 얻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수도원들이 탄생하였고 이들은 자체적인 내규로 운영되면서 재산을 소유하고 지식을 보급하였습니다.
4. 가장 대표적인 게 아키텐 공작 윌리엄이 세운 클뤼니 수도원입니다. 클뤼니 수도원은 당대 최대규모를 자랑한 수도원으로 군주는 물론 심지어 교황도 간섭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자랑했습니다. 이들이 보유한 토지는 막대했으며 또 브루고뉴를 넘어 스페인과 영국 그리고 독일에도 분교를 설립하여 국제적인 조직으로 거듭났습니다. 클뤼니는 한편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로마법 전통을 계승하였고 유스니아누스 대제의 법령도 보존시켰습니다. 또한 성직자의 타락을 규탄하는 동시 군주권을 제한하는 그레고리오 개혁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는데, 애초에 해당 개혁을 추진한 그레고리오 7세 본인부터가 이 수도원 출신이었습니다. 로마 귀족들에 손에 넘어가 타락할대로 타락한 교황청을 정화하고 개혁한 것은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서북유럽에서 건너온 이들 수도사들이었습니다.
5. 한편 교회는 대학의 설립을 주도했는데 이는 서유럽의 독특한 제도를 탄생시킨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대학은 본래 수도원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는데, 이들 대학은 교황으로부터 자치를 보장받고 군주로부터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얻었습니다. 따라서 대학은 진정 자유로운 공간이 되었고, 이곳의 교수와 학생들은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한편 대학은 학위를 받은 자에게 "이 자는 다른 곳에서 강의를 할 수 있다"는 자격을 주었는데, 예컨대 볼로냐에서 학위를 받은 자는 프랑스 파리에서도 또는 영국 옥스퍼드에서도 강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국제적 아카데미아가 탄생한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황으로부터 특허장을 얻은 대학들은 유럽 전역에 퍼져 학문을 주도하고 또 스스로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특별한 "사회"를 탄생시켰습니다.
6. 교회는 군주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탄생시켰고, 이 사회는 고도의 교육을 받고 또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한 특별한 사회였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자면 "코스모폴리탄 사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자유로운 시민사회는 아니었으나, 군주의 절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또 다른 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발상을 할 수 있게 되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훗날 교회의 타락과 종교전쟁의 시대, 나아가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국가의 시대에 이르러 교회의 권위와 자유는 추락하게 되지만, 세계대전 이후 교회는 스스로의 사명을 다시 찾았고 초심으로 돌아가 시민사회 재건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서유럽에서는 나치즘과 공산주의에 맞서 기독교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했고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당시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에서도 시민사회가 자랄 수 있게 피신처를 제공하였고, 가장 중요하게는 공산정권을 붕괴시킨 폴란드의 민중노조 솔리다리노스크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7. 그레고리오 7세처럼 교회의 자유(Libertas)는 영적 권위로 최고 세속권력과 맞설 때 진가를 발휘했으나, 훗날 교황들은 교황령국가의 세속권력이야말로 교회의 자유(Libertas)를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바티칸의 포로를 자처했던 19세기말 20세기 초의 교황들은 계속 교황령 국가에 집착하고 이탈리아 왕국을 승인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교회의 부활은 그 교황들이 교황령 국가라는 세속권력을 포기하고, 영적 리더십으로 전환하면서 가능해졌습니다. 스탈린은 교황이 보유한 사단은 몇개인가라며 조롱했지만, 요한 바오로 2세는 단 한 명의 병사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폴란드 시민사회의 각성을 유도하였고 폴란드의 독재정권을 붕괴시켰습니다. 교회는 중세시대 당시 학문과 지성 그리고 영성으로 시민사회를 탄생시켰는데, 오늘날 교회 또한 그러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