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아리쑤리랑님의 글을 통해 서양과 한중일이 같은 단어나 현상을 어떻게 번역 내지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19세기 말 서양의 많은 개념들이 일본, 그리고 제한적으로 중국을 통해 번역이 되었는데 원래의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방식으로 번역되기도 했거든요. 물론 오늘날 서양문명이 워낙 세계적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아 의미상의 오해는 크게 발생하지 않지만 무의식 중에 자리잡고 있는 세계관(?)의 차이는 여전히 남아있는 듯합니다.
대표적인 번역어들 몇개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공화국(Republic)
공화국은 서양어 Republic을 번역한 것인데 본래 Republic은 라틴어 Res Publica (공공의 것, 또는 공공의 재산)을 의마합니다. 이를 처음 번역한 것은 1845년 어느 일본인이라고 하는데, 고대 중국 주나라의 [공화시대]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당시 주나라의 제후들이 왕을 선출해서 뽑았던 짧은 시대가 있었는데 그 시대가 공화시대라 불렸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세습군주가 없는 정체를 공화국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서양에서도 보통 그런 의미로 Republic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이 단어는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중세 기독교세계도 Res Publica Christiana라고 불렸고, 여왕이 다스리는 대영제국도 Res Publica 즉, Commonwealth라고 불렸습니다.
군주정(Monarchy)
우리말로 군주정은 말 그대로 군주가 다스리는 정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래 의미는 1인이 다스리는 정치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당 정체가 왕인지, 황제인지, 장군인지, 귀족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양어 Monarchy는 Monos (숫자 1)와 Archo(통치하다)에서 나온 것으로 일인독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어원을 1대1로 매칭시켜 번역한다면 아마 일인독재가 가장 근접한 번역어일 수도 있습니다.
황제(Emperor, Imperator)
동양에서 황제는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는 하늘의 아들이며 우주의 중심입니다. 진시황이 중국의 전설적 신적 존재들의 글자를 따와서 황과 제를 합쳐 만든 신조어라고 하는데, 신적인 권위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런데 본래 서양에서 훗날 황제를 뜻하게 되는 임페라토르(Imperator)는 그저 명령을 내리는(Imperare) 장군이었습니다. 따라서 황제라는 호칭 그 자체에는 어떤 신적 권위가 없었고, 그저 최고 군사통치권을 가진 자를 의마하는 것이었습니다.
국가(State)
사실 State라는 개념은 굉장히 서구적인 개념입니다. 한자어로 State를 성채 안에 있는 가족(國家)이라고 번역했는데, 사실 State라는 개념은 굉장히 추상적인 단어입니다. 본래 라틴어 스타투스(Status)에서 나왔는데 이는 어떤 "상태" 또는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세시대부터 유럽에서는 다양한 집단(귀족, 자유도시, 평민, 상인길드 등)이 각자만의 신분(Status)을 가졌고 이에 따른 특권 또는 의무가 부과되었습니다. 그리고 16세기에 이르면 각종 권리와 의무를 갖춘 법인격(Status)를 지칭하게 되었고 특히 교회권과 세속권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Separation of the Church and State이라는 표현이 이 무렵 생겼고, State는 교회권과 대비되는 세속권력을 의미했습니다. 각종 법체계의 총합을 State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한자표현은 정말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종교(Religion)
동양에서 종교라고 함은 본래 "으뜸가는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불교의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번역하면서 탄생한 단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유교 또한 종교입니다. 한편 서양의 Religion은 라틴어 다시 잇다 (Re + Ligare)에서 나온 말로 신과 인간을 다시 연결한다는 뜻입니다. 최고사제를 뜻하는 폰티펙스(Pontifex)라는 단어도 "다리를 만들다(Pons + Facere)"라는 뜻입니다. 영적세계와 인간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종교관념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법에 대한 관념
이건 어원보다는 개념과 사고방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래 동양에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뉘앙스를 가진 단어가 아니었고 한비자의 법가를 상징하는 폭정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법사상이라고 할만한 것은 동양에서는 의(義)와 예(禮)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위 인의예지라고 하는 유가적 사회규율방식은 낙후된 것으로 여겨졌고, 서구적 "법치주의"가 한중일 각국에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 법치주의라고 하는 것은 한비자의 법치주의와 같은 일종의 법을 위한 법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법개념을 한비자의 법사상처럼 국가권력의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본래 서양에서 법이란 가장 큰 틀 안에서 정의(IUS)를 의미했고, 이를 다시 3등분하여 자연법(Ius Naturale), 시민법(Ius Civile), 그리고 만민법(Ius Gentium)으로 나누어서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를 법이라고 번역하기는 하지만 [법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Ius는 대원칙이고, 이를 성문화해서 표현한 게 법(Lex)이기 때문이죠. 아무튼...
자연법(Ius Naturale)이란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응당 모두 공유하는 보편적 정신과 규칙들을 의미합니다. 로마인과 야만인 모두 공유하는,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기본적 속성이며 해당 원칙에 따르면 "노예제도"는 자연법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자유"를 자연상태라고 보았고, 부자유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제약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로마인들 스스로도 노예상태를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인식했지만, 만민법(Ius Gentium)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비록 사람이 사람을 예속시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지만 당시 모든 왕국과 도시국가들은 모두 노예제도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시민법(Ius Civile)은 특정 도시가 그 도시만을 위해 만든 법으로 해당 지역의 관습과 필요에 따라 제정한 법입니다. 이는 오늘날 민법의 선구자격이라고 하는데, 과거에는 같은 제국 안에서도 도시마다 각자 도시의 필요에 따라 제정된 법이었습니다.
만민법(Ius Gentium)은 민족과 무관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평화와 전쟁의 규칙 등을 의미하며 민족이 서로 달라도 평화를 맺을 때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할 때 선전포고 등을 하는 등의 공유된 가치관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문명인(로마인)과 야만인(그외 민족) 할 것 없이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사회의 제반 법칙 등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Ius에 따라 국가는 각종 Lex(법)을 만드는데, 중세인들은 법은 궁극적으로 자연법 정신과 일치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중세 신학자들은 (당시 신학자는 법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자연법의 원천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인간에게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양심"을 세겨주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법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지만, 그 원칙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고 어필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두고 벌어진 유명한 논쟁이 하나 있는데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을 둘러싼 바야돌리드 논쟁입니다.
스페인 수도사 데 라스 카사스(De Las Casas)는 [자연법]을 근거로 스페인의 정복활동과 무력행사를 비난했고 원주민들의 노예화에 반대했는데, 반대로 세풀베다(Sepulveda)는 [만민법]을 근거로 스페인의 정복을 정당화했고, 나아가 마찬가지로 [자연법]을 근거로 자연에 어긋나는, 즉 식인행위와 인신공양을 일삼는 원주민들에 대한 무력행사는 이들의 희생양이 될 수 있는 다른 원주민들의 보호를 위해 정당화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재산권이나 사회에 대한 관념도 서양과 동양은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것 같은데, 여러분이 보기엔 또 어떤 게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