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0/09/26 21:25:48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1537년, 노예제를 금지한 교황칙령(Sublimis Deus)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1521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를 정복한 이래 가톨릭 교회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정복이 정당한지, 원주민의 권리는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의 경우 정복 과정에서 스페인 군인들의 잔혹함과 야만적 행태를 목격하고,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원주민의 권리를 옹호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원주민은 이성을 갖춘 하느님의 창조물로, 스페인인들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며 무력으로 복속되어야하는 대상이 아님을 주장했고, 특히 야만적 방식으로 원주민을 대하는 스페인 군인들은 교회법에 의해 파문(Excommunicate)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라는 다른 교회 지식인은 원주민들이 인신공양 및 인육섭취 등 자연법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다른 무고한 원주민들이 희생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해서라도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원주민이 성문법과 이성으로 자치를 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스페인의 통치는 필요한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영어권에서 잘못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그 또한 노예제를 옹호하지는 않았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이들의 논쟁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또한 교황청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1537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원주민의 권리 관하여 교황 칙령을 반포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Sublimis Deus (숭고하신 하느님) 이라 불린 칙령이었습니다. 그 내용 전문을 소개해합니다. 

 

"나 교황 바오로 3세는, 이 서신이 전달되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우리 주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축복을 전하며...

 

숭고하신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너무도 사랑하시어, 인간에게 지혜를 부여하여 이들이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선함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고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께 다다를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성경의 말씀대로 인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이를 위해 인간은 자연스레 이러한 믿음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러한 믿음을 얻을 수 있는 능력 자체를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상 불가능한 것이다. 진리 그 자체이시며 영원히 틀리지 않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거라." 주님은 예외 없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모두가 신앙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적(enemy), 모든 선에 반대하며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자는, 이를 질투하여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방해하기 위해 새로운 수단을 개발했다. 그는 그의 부역자들에게 서인도와 남인도, 그리고 우리가 최근에 그 존재를 알게된 다른 민족들이 우리에게 봉사하는 짐승과 같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가톨릭 신앙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비록 그 영광스러운 자격을 갖추지 않았지만, 우리 주님의 권능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지상의 모든 양떼를 그의 품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노력한다. 따라서 우리는 원주민들이 진실로 인간이며, 가톨릭 신앙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것을 강렬히 바란다고 간주한다. 

 

우리는 이 칙령을 통해, 그리고 이 칙령에 대한 모든 번역문에도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면서, 원주민(indians)과 향후 우리 기독교도가 발견할지도 모르는 다른 미지의 원주민들이 다음과 같은 권리가 있음을 선포한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 밖에 있는 존재라고 하여도 그들의 자유는 박탈되지 않아야 하며, 그들의 재산 또한 침해되지 않아야 하며, 그들은 자유롭게 그리고 정당하게 자유와 재산권을 누려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노예화되지 않아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가 된다면 이는 무효임을 선포한다. 

 

사도들의 권능에 의하, 우리는 이 칙령 또는 이 칙령에 대한 번역문이 원문과 같은 효력을 지님을 선포하며, 원주민과 그 외에의 민족들이 설교와 선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도되어야 함을 선포한다. 

 

1537년 5월 29일, 재위 3년, 로마에서"

 

이렇게 보았듯이 교황은 명시적으로 노예제를 금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무력에 의한 노예제를 금지하는 것이었고, 이미 아랍상인과 아프리카의 토착왕국들이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거래" 하던 흑인노예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칙령 이후 스페인제국 또한 자체적으로 노예제를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하였습니다. 이에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는 법적인 의미에서 원주민의 노예화는 금지되었으나, 흑인 노예는 지속 유입이 되었습니다. 한편 개신교로 전향한 영국을 위시한 북유럽 국가들은 애초에 교황의 권위를 부정했기 때문에 교황의 노예금지령은 전혀 씨알도 안먹히는 칙령이었습니다. 

 

훗날 영국의 신학자들과 프랑스의 인문주의자들이 광범위한 캠페인을 벌이면서 흑인노예제도 금지되었는데, 그때까지 무려 250년 가까이 걸렸고, 미국에서는 더욱 오래걸렸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여수낮바다
20/09/26 22:07
수정 아이콘
이 점에선, 오히려 가톨릭교회가 프로테스탄트보다 더 “진보적”이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흑인 노예”가 가톨릭신앙을 갖게 될 경우에도 노예 신분이 유지되는지 궁금합니다.
영국인 등 다른 사람에 의해 노예화된 “인디언”들에 대해서는 신분이 어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aurelius
20/09/26 22:35
수정 아이콘
1693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영국령에서 탈출하는 모든 흑인 노예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자유를 부여"]한다는 왕령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인도주의적 관점보다는 전략적 의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작 기존 스페인 식민지에서 어떻게 적용했는지는 인터넷에서 따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네요. 그리고 18세기에 이르면 이미 가톨릭 교회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기 때문에, 교회가 뭐라하든 국가는 my way 로 가는 실정이라...
metaljet
20/09/26 22:40
수정 아이콘
원래 가톨릭에서는 저보다 훨씬 이전부터 흑인이건 무어인이건 일단 세례받은 기독교인을 노예화 하면 즉시 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노예화 된 이교도의 개종을 받아주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였고 뜨거운 논란이 되었죠. 이에 관해서 Sicut Dudum 이라는 유명한 칙령이 앞서서 있습니다.
20/09/27 01:56
수정 아이콘
의외로 카톨릭은 일찍 노예제를 반대했네요
11년째도피중
20/09/27 09:28
수정 아이콘
(수정됨) 교황청은 원칙적으로 반대했다는 이야기고, 주대상은 공인받은 식민지인 [신대륙의 원주민]들입니다. 아마 15세기에 교황이 직접 이교도들을 대상으로 세습노예제를 허가함으로서 촉발된 문제들이기에, 그 책임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발표된 것에 불과하다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는데 원주민 노예들의 질이 흑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지 못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흑인의 노예화는 강하게 제지받은 일이 없습니다. 노예무역을 가장 늦게까지 유지한 나라들이 교황의 으뜸가는 신하들인 에스파냐, 포르투갈입니다. 남미에서는 브라질이 제일 늦게까지 유지하고요. 역대 무역규모도 영국에 이은 2,3위로 둘을 합치면 영국을 능가할 겁니다. 애초에 노예무역의 공인인증서격인 '아시엔토'를 누가 줬냐. 가톨릭 교회에서죠.
프랑스도 노예제 폐지를 처음 공식화한 것은 프랑스혁명 때의 일로 교회와 상관없습니다. 그나마도 나폴레옹 때 원상복귀했지만요.

글쓴분은 다 아시고 쓰시는 이야기겠지만 전반부의 내용때문에 댓글에서 오해들이 많은 것 같아 적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8241 [일반] 낙오자들의 시간-가비지 타임 [55] lasd24112982 20/09/28 12982 12
88240 [일반] 화제의 롯데리아 밀리터리팩 후기 [68] 길갈16054 20/09/28 16054 20
88238 [일반] [후기] 메디치 더 매그니피센트 시즌 2, 르네상스의 명암을 보여주다 [7] aurelius11692 20/09/28 11692 7
88237 [일반] 무시당하고 열받은걸 행동으로 표현한 경험.... [10] 사람은누구나죽습니다8891 20/09/28 8891 6
88235 [일반] 제 뇌가 망가진거 같습니다 [34] 뒤틀림13349 20/09/28 13349 1
88234 [일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더빙한거 몇개 올리러 왔습니다! (강철의, 앤트맨, 소니공기청정기) [3] 유머게시판7709 20/09/28 7709 7
88233 [일반] 왜 나의 코미디는 웃기지 못하는 걸까(feat. 영화 '조커'의 아서 플렉) [8] 치열하게10812 20/09/27 10812 2
88231 [일반] 레드 벨벳에 빠져 지낸 지난 한 주 [23] 아난10649 20/09/27 10649 4
88230 [일반] 영화 '디바' 후기입니다..신민아의 재발견?no스포 [26] 에버쉬러브12011 20/09/27 12011 0
88229 [일반] [미디어] 요란한 빈 수레의 지배 [46] 아루에16613 20/09/27 16613 53
88228 [일반] 40대 미혼의 일상 [32] CastorPollux16797 20/09/27 16797 10
88227 [일반] [웹툰추천]가볍게 볼수 있는 웹툰 몇개 추천 합니다. [26] 치토스12511 20/09/27 12511 3
88226 [일반] [그알]이종운 변호사 실종사건.jpg [35] 청자켓23735 20/09/27 23735 5
88225 [일반] [팝송] 토니 브랙스턴 새 앨범 "Spell My Name" [4] 김치찌개7359 20/09/27 7359 2
88223 [일반] 태조 이성계가 이방석을 왕세자로 삼던 당시 상황 [53] TAEYEON14224 20/09/26 14224 5
88222 [일반] 새로운 종류의 스캠 이메일 받았습니다 [21] OrBef13538 20/09/26 13538 15
88221 [일반] [역사] 1537년, 노예제를 금지한 교황칙령(Sublimis Deus) [5] aurelius10338 20/09/26 10338 4
88220 [일반] 북한 ICBM과 북한에게 절대 지원해주면 안 되는 분야 [66] 그랜즈레미디13642 20/09/26 13642 12
88219 [일반] 공무원 시험에 추첨 요소를 도입한다면? [66] 대파11652 20/09/26 11652 2
88218 [일반] [역사] 어원으로 보는 서양어와 번역어, 그리고 사고방식의 차이 [9] aurelius10521 20/09/26 10521 14
88217 [일반] 선진국과 국제연합이란 용어의 문제점 [63] 아리쑤리랑15619 20/09/26 15619 59
88216 [일반] 대충 알아보는 태종 이방원의 숙청 [61] TAEYEON14955 20/09/26 14955 4
88215 [일반] [역사] 라틴교회는 어떻게 시민사회의 선구자가 되었나? [4] aurelius9171 20/09/26 9171 1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