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정신적인 약점이 있다. 어떤 이는 학벌 얘기만 나오면 열등감이 폭발하고, 어떤 이는 군대 얘기에 우울해진다. 특정 트리거가 당겨지면 극도로 불안감에 시달리는 공황장애 환자도 있고, 불임 때문에 지나가는 애기들만 보면 우는 여자도 있다.
나의 약점은 '외로운 아이' 이다. 이런 요소가 내 가슴을 찌르면 눈물이 쏟아지고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오늘 아침에 불의의 일격을 맞는 바람에 멘탈을 추스리고자 이 글을 쓴다.
약점을 찔린 기억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중학생 때이다. 2학년 국어 교과서에 '비누인형' 이라는 소설이 실렸다. 김동률과 이적이 만든 '카니발' 이라는 그룹의 동명 노래를 바탕으로 중학생이 쓴 아마추어 단편이다. 아빠 없이 엄마랑 둘이 사는 소녀. 유치원에 갈 돈도 없어 엄마가 일하러 가면 하루종일 홀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이에게 유일한 친구는 비누인형 이었다. 혼자 있는 게 싫어서 빨리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아이의 소원 이었는데, 마침내 등교를 하게 되자 비누인형은 꿈처럼 사라지고 만다는 줄거리다.
쉬는 시간에 심심해서 국어책을 읽다가 펑펑 울고 말았다. 성격이 밝고, 목소리가 크고, 잘 까불기로 유명한 나였던지라 주변 친구들 모두가 당황했다. 걱정스러운 말투로 "누가 때렸나?" 라고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이 때까지는 나에게 특정 부분 정신적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단순히 외로운 아이가 등장하는 것 만으로는 조건이 불충분 했기에. 실제로 사춘기가 다 지나는 동안 다시 운 적이 없었다.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구나. 감정을 폭발 시키는 '트리거' 가 있구나 하는 점을 느끼게 된 것은 21살. 군대 가기 직전의 시점이었다. 군대를 핑계로 백수짓을 하고 있었는데, 고전게임으로 시간을 떼우다가 '요정전설' 이라는 작품을 접하게 된 것이다. 다른 제목은 '머큐리어스 프리티'. 스승이 준 현자의 돌에서 태어난 호문클루스를 육성한다는 프린세스 메이커류 게임이었다. '호문클루스' 라는 소재를 살려 판타지풍 세계관을 잘 살려낸 수작인데, 누군가의 '꿈'이 담긴 크리스탈을 호문클루스에게 주면, 꿈을 꾸는 것으로 능력치를 올린다는 몽환적인 설정이 훌륭했다.
내가 울음을 터뜨리도록 만든 것은 '녹색의 크리스탈' -'산고양이의 꿈' 이었다. 괴수도 사람도 아닌 수인 소녀가 숲을 누비는 꿈.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전혀 찾을 수 없었기에 소녀는 평생 숲에서 홀로 살았다. 호문클루스는 시공간을 초월해 꿈 속의 인물에게 말을 걸 수 있었으므로 둘은 친구가 된다. 수인 소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 크리스탈의 수명이 다 되어 호문클루스가 더이상 꿈 속으로 올 수 없게 된 날. 이별을 직감한 수인 소녀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넨다. "언제까지나 너를 기다릴게"
크리스탈이 사라지고 시간이 흐르면 주인공의 친구 NPC가 등장하여 '꿈'과 관련된 후일담을 흘리고 간다. "어느 숲 속에 특이한 마물이 살았는데, 뭔가를 기다리는 듯이 평생 마을 주위를 맴돌았다는군.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찾듯이 슬프게 울더니, 얼마 전 죽고 말았대."
크리스탈이 보여주는 '꿈'은 과거의 기억이었고, 호문클루스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친구를 사귄 것이다. 나는 펑펑 눈물을 흘린 뒤 이틀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냥 슬픈 우정에 감동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머릿 속에서 수인 소녀의 사연이 끝없는 나래를 펼쳤기 때문이다. 호문클루스를 사귀기 전의 삶은 어땠을까. 태어날때부터 외톨이. 말 한마디 붙일 사람 없이 평생을 살다가 드디어 사귀게 된 친구. 짦은 만남 뒤에 다시 펼쳐진 평생의 기다림. 고독한 죽음. 마치 현실에서 일어난 일처럼 처절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종종 SF에서 환기되는 소재인데, 단순히 친구가 없다는 수준을 벗어나 아예 '인류'가 멸종하고 홀로 남은 외로움이 어떨까 하는 상상이다. '냉동인간' 이나 '불멸자' 같은 소재를 접할 때마다, 나는 지금도 수인 소녀의 스토리가 떠오른다.
군대 가기 전에 체력을 기른다며 전봇대만한 허벅지를 키우던 아들이 이틀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울고 있으니 지켜보던 부모님도, 나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단순히 감수성이 예민하다거나, 슬픈 감동을 느꼈다는 수준을 넘어선 멘탈 붕괴를 겪었던 것이다. 이 글을 작성중인 지금도 수인 소녀 이야기를 쓰다가 가슴이 떨릴 지경이니 참 징하다 싶다.
이 사건으로 나에게 감정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을 자각한 이후, 아주 오랫동안 슬프고 외로운 이야기를 피해다녔다. 픽션이건, 논픽션이건 간에. 웃긴 점은 고독사한 노인 이야기 등 비슷하면서도 다른 주제에 관해서는 완전히 멀쩡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냥 좀 슬프고 안타깝고.
뭐 때문에 내가 이런 정신적 약점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형제들은 다 명문대에 갔는데 홀로 수능에 실패한 학생이 평생 학벌 컴플렉스에 시달린다든지 하는 배경 사연이 있어야 하지 않나? 내가 따돌림을 당하거나 친구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혹시 기억할 수 없는 아주 어린시절 외로움을 겪었던 것일까? 아니면 애아빠가 된 이후 애기들 사연은 못듣겠다는 형님처럼, 어딘가에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일까.
요즘에는 사회생활을 하느라 뉴스를 마냥 기피할 수가 없다. 자살하러 올라가던 학생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흘리던 눈물이 오랫동안 나를 아프게 했다. 최근에는 부산 화재 사건'의 초등학생 형제가 내 멘탈을 터뜨렸다. 엄마에게 방치된 채로, 둘이서 편의점에 장을 보러간 장면이 외로워보였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의식을 완전히 차렸고, 기부금이 20억이나 모였다는 뉴스에 나도 멘탈을 잘 추슬렀는데.
오늘 아침 어머니에게서 이웃 아이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데, 괴롭힘도 폭력도 없이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고 한다. 학교나 학원에 가게 되는 날이면 하염없이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 오는데, 게임 속에서도 대화하는게 힘들어서 싱글 게임만 반복해서 한다고.
살기 힘들구나. 아이들의 눈물이 너무 많아서.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