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3915328http://enews.imbc.com/News/RetrieveNewsInfo/297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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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란 MBC 프로그램에서 설민석과 노사연 누님이 나와서 시대의 불운을 겪은 세기의 천재시인이라는 내용으로 방영되었다고 조명되었던 모양입니다. 검색해보니까 어우동, 신사임당, 허난설헌을 '그 시대의 쎈 언니'로서 재조명했던 방송이더라구요. 특히 '비극적 천재 요절 여류시인'이라는 이미지의 허난설헌이 많이 주목 받았던 모양입니다. 다큐멘터리에서 허난설헌 역을 맡았던 구혜선 얘기도 나오고요. 피지알에서도 눈시BB님께서 그녀의 비극적인 삶에 대해서 글을 쓰신바 있습니다.
사실 근데 좀 더 깊게 파고들면 허난설헌에 대해서 '밝은 이미지'만 부각하고 그 '뒷 이야기'를 방영 안한 거 같더라구요. 하긴 '시대의 한계에 맞선 주체적 여성'을 강조하려고 나온거 같은데 그런 얘기를 함부로 못 꺼냈겠죠. 근데 허난설헌에 대해서 좀 자세히 파고들면 찝찝한 얘기가 바로 나오는게 사실입니다. 바로 눈시 BB님의 글에서도 나온 '표절', '위작' 문제 때문입니다. 눈시님 글에서는 '의혹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정도로 설명되는데 사실 그 정도 수준이 아니고 좀 더 심각합니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허난설헌이 죽을때 그녀의 유언으로 작품들을 다 불태우라고 했으나 동생 허균이 그 유언을 무시하고 난설헌집을 간행했다느니 아니면 다 불태웠는데 허균이 비상한 기억력으로 다 살려냈다던지 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어쨌거나 누나 난설헌의 시를 널리 알린건 허균이 맞습니다. 그녀가 죽은 다음해인 1590년에 허균은 서애 류성룡에게 누이의 시를 보여줬는데 류성룡은 그 시를 보고 매우 놀라면서 "기이하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異哉 非婦人語)"라는 말을 남겼고 난설헌의 남동생 허균에게 "집안의 보배로 간직해서 후세에 전하라"고 일러둡니다.
이후 1598년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 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렸습니다. 그 후 1606년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으며 허균 스스로도 누이의 유고를 모아 조선 최초의 여성문집인 <난설헌집>을 1608년에 출간했습니다. 이렇게 동생 허균에 의해 중국에 전해선 난설헌의 시는 중국에서 대대적인 히트를 치게 됩니다. "난설헌의 시는 하늘에서 떨어진 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다"(<열조시집>) "(당나라 대표시인) 이태백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고금야사>)는 극찬까지 이어졌습니다. 중국의 편집자들이 난설헌의 시를 앞다퉈 실었으니 가히 난설헌 열풍이라고 할 만 했지요.
하지만 동시대 조선에서 부터 허난설헌의 시는 '이거 표절이거나 허균이 쓴 위작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난설헌집이 출간된지 6년 후인 1614년에 허난설헌과 동갑인 이수광이 편찬한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에는 다음과 같이 '난설헌의 시는 거의 다 가짜'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지봉유설 권14 문장부(文章部) 7, 규수시(閨秀詩))
난설헌(蘭雪軒)의 시집 속에, '봉숭아꽃으로 손가락을 물들이는 노래'는 명나라 사람의, "(그 손가락을) 거울에 떨치니 불별이 밤달에 흐르는 것 같고, 눈썹을 그리니 붉은 비가 봄 산을 지나는 것 같다(拂鏡火星流夜月 畫眉紅雨過春山)"라고 한 글귀를 전부 따다가 점화(點化, 전인(前人)이 만든 시문을 고쳐 새로운 체재를 내놓음)한 것이다. 부선사(遊仙詞) 가운데의 두 편은 바로 당나라 조당(曹唐)의 시이고, 관인이 중이 되어 가는 것을 보내는 한 편의 율시(律詩)는 명나라 사람 당진(唐震)의 시다. 그 밖의 악부(樂府)ㆍ궁사(宮詞) 등의 작품은 옛 시를 훔쳐 쓴 것이 많다. 그런 까닭에 참의(參議) 홍경신(洪慶臣)과 정랑(正郞) 허적(許嫡)은 한 집안 사람들로, 항상 말하기를, "난설헌의 시는 2, 3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작이다. 그리고 그의 백옥루 상량문(白玉樓 上樑文)도 또한 허균이 이재영(李再榮)과 함께 찬술(撰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백옥루 상량문은 허난설헌이 8세에 지었다는 글로 그녀가 대단한 신동이었음을 보여주는 글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이것부터 이미 동생 허균이 대신 지은 위작이라는 의견이 당시에는 파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는 허균이 아직 살아 있을때였으니 이수광은 대놓고 허균에게 '이거 니 누나 글이 아니라 니 주작이지?'라고 지적한 것인데 허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불명입니다. 어쨌거나 대놓고 표절 구절이나 구체적으로 누구의 시를 표절했는지에 대한 확인이 나오고 있었으니 이미 당대부터 난설헌의 시는 표절이나 위작이라는 얘기가 파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동시대인 1612년에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간 김시양이 거기서 쓴 부계기문에서도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적혀 있습니다. 김시양은 허난설헌의 시가 표절이라는걸 믿지 않았는데 귀양와서 명나라 시집을 하나 얻어서 보니까 난설헌의 시 중 하나가 명나라 시인이 쓴 걸 표절했더란 거였죠.
저작(著作) 김성립(金誠立)의 아내는 허균(許筠)의 누나인데, 문장을 잘 지었다. 일찍 죽으니 허균이 그의 유고(遺稿)를 수집하여 제목을 《난설헌집(蘭雪軒集)》이라고 하고, 중국 사람에게 발문(跋文)을 받기까지 하여 그 전함을 빛나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거기에는 남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 많다.'고 하였으나 나는 본래부터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내가 종성으로 귀양오게 되어 《명시고취(明詩鼓吹)》를 구해 보니, 허씨의 시집 속에 있는,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 눈에 떨치니 봄구름 따사롭고 / 瑤琴振雪春雲暖
패옥이 바람에 울리는데 밤 달이 차가워라 / 環珮鳴風夜月寒
라고 한 율시(律詩) 여덟 구절이 《고취(鼓吹)》에 실려 있는데, 바로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연간의 시인 오세충(吳世忠)의 작품이다.
나는 이에 비로소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믿게 되었다. 아, 중국 사람의 작품을 절취하여 중국 사람의 눈을 속이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남의 물건을 훔쳐다가 도로 그 사람에게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후 표절에 대한 비판은 이후 김만중의 '서포만필', 홍만종의 '시화총림', 이덕무의 '청비록'에서 지속적으로 나왔고 홍만종은 아예 난설헌의 시는 '중국인의 글을 산 채로 집어삼킨 것' 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허난설헌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규원가(閨怨歌) 역시 조선시대부터 허난설헌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습니다. 50행 100구로 이뤄진 이 장편 가사는 동시대인인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과 유사하면서도 좀 더 노골적인 원망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드러내는데 홍대용은 허균의 첩인 소쌍이 지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난설헌의 시는 표절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1652년 청나라 전겸익이 편찬한 <열조시집>에 전겸익의 부인이자 기녀 출신 여류 시인인 유여시(1616~1664)가 표절 의혹을 제기한 것이 실린 것 입니다. 유여시는 우선 '중국 문사들이 오랑캐 여인(난설헌)의 솜씨에 놀라 표절 여부를 가리지도 않고 열광하고 있는 한심한 작태'를 꼬집은 다음 '허난설헌의 시 대부분은 당나라 시인들의 시구를 표절한 것'이라고 일갈하며 조목조목 허난설헌의 시들이 당나라 시인들의 시구를 표절한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어쨌거나 난설헌의 시는 워낙 유명했고 중국, 조선, 일본을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끌었습니다. 숙종 25년인 1695년에는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직접 "최대한 조선 고금의 시문들을 얻어오되, 다른건 몰라도 동문선과 난설헌집, 그리고 최치원, 김생, 안평대군의 필적은 무조건 가져오라"는 특명을 내리기도 했고, 일본에서도 난설헌집 동래부(東萊府) 중간본이 처음 유출된 후 제발 난설헌시집을 좀더 보내달라고 사정하다 결국 분다이야(文台屋次郎)에서 아예 직접 판목을 만들어 난설헌시집을 찍어내서 수많은 일본 여성들의 심금을 울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전근대부터 끊임없이 표절 논란이 이어졌지만 허난설헌의 시가 워낙 인기가 많고 그 이름이 한국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우뚝해서인지 현대 한국한문학계에서는 표절 문제를 고의로 피해갔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에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현규 교수의 논문 '허난설헌 한시의 표절 문제'에서 박 교수는 허난설헌 작품이 '표절이다' '아니다' 하는 판단 근거를 '다른 시에서 절반 이상을 베꼈을 경우'로 설정하고 허난설헌 한시들을 청나라 강희제의 명으로 전체 당나라 시 작품을 모은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중국 시들과 비교하여 허난설헌의 대표작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 결과, 조사대상 작품 중 상당수가 중국시에서 베껴왔거나 그런 흔적이 농후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박 교수는 대표적인 표절작품의 실례로 10개를 들었는데 예컨대 축성원(築城怨)이란 작품은 당나라의 유명시인 백거이와 쌍벽을 이뤘던 원진(元桭)이라는 시인의 고축성곡(古築城曲)을 한 글자만 빼놓고 그대로 베꼈으며 가객사(賈客詞)는 양릉(楊凌)의 가객수(賈客愁)를 몇 글자만 고쳤으며 또 빈녀음(貧女吟)은 장벽(張碧)이라는 시인의 빈녀(貧女)를 표절했고 양류지사(楊柳枝詞)는 당나라 때 이익(李益)이 쓴 도중기이이(途中寄李二)와 일치한다고 예시를 들었습니다. 박 교수는 논문에서 "한 마디로 현존하는 허난설헌 작품 중에는 표절 흔적이 매우 역력하다는 결과를 얻었으며 이로써 지난날 허난설헌 작품의 표절시비에 대한 논쟁이 종식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현대 대중의 인식은 어떻냐면...예 그저께 나온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프로그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전히 공중파 방송에서 허난설헌 시의 위대함은 설파하고 있지만 이런 표절을 넘어선 위작 문제는 그냥 언급하지 않거나 넘어가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나온 박현규 교수는 허난설헌 시 위작의 범인을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으로 지목했는데 이유는 위에서도 나오듯이 당대 사람들부터가 표절 편찬자로 허균을 지목하고 있었고 또 그가 일찍이 중국에 갔다가 위작서를 만들어 조선 조정을 기만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으로 지적합니다. 허난설헌의 대표작으로 유명한 규원가가 사실 허균의 첩 소쌍의 작품이라는 얘기를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쨌거나 허난설헌은 동생 허균으로 인해 '동아시아 최고의 여류 인기시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동시에 옛 시를 표절 했다거나 심지어 허균이 지어낸 위작의 간판만 대준 꼴이 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허난설헌 입장에선 이 같은 낙인은 무척이나 억울한 일이겠죠. 생각해보세요, 아니 허난설헌이 시집을 낸다고 했습니까? 허난설헌은 분명히 "내 저작물을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했고,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는데 동생인 허균이 누나 유언 무시하고 누나 이름 팔아서 사후에 시집 펴낸 것을 어쩌겠습니까. 난설헌 입장에서도 어렸을 때부터 옛 시를 바탕으로 끄적였던 습작이 허균이 엮은 시집에 섞였을 가능성도 높고 그래서 굳이 이런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물론 허균이 지어낸 위작도 알게 모르게 삽입됐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죽은 몸이라 독자들 앞에서 입장 표명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당대 표절의 기준도 모호했습니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서거정은 "옛 시를 많이 읽으면 마치 자기의 시처럼 생각되는 게 있으니 표절이라 욕할 수 없다"(<동인시화>)고 주장하기도 했고요. 어쨌거나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허난설헌은 조선의 가부장 사회에서 고통받다가 그 마지막 자신의 의견마저 남성인 동생 허균에게 무시당했으며, 허균 자신의 가문을 높이기 위해 이용당한 조선 가부장 사회의 피해자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보여집니다.
P.S 찾아보니까 헌종 때 이덕무의 후손 이규경이 지은 백과사전 오주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아예 다음과 같은 얘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김성립의 후손인 정언(正言) 김수신(金秀臣)의 집이 광주(廣州)에 있는데, 어느 사람이,
"간행된 《난설헌집》이외에도 혹 책상자 속에 간직된 비본(祕本)이 있느냐?"
고 묻자,
"난설헌이 손수 기록해 놓은 수십 엽(葉)이 있는데, 그 시는 간행본과 아주 다르다."
대답하고 이어,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간행본은 본시 난설헌의 본작(本作) 전부가 아니라 허균의 위본(僞本)이다."
하였다. 그 후손의 말이 이러한 것을 보면 아마 그 집안 대대로 내려 오는 실전(實傳)일 것이다.
애당초 허난설헌의 시가 불타서 없어진걸 허균이 되살렸다는 허균의 주장과는 달리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의 가문에서는 당시까지 허난설헌이 지은 글이 남아 있었고 허균이 간행한 난설헌집의 시와는 아예 다른 시며 난설헌집은 허균의 위작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지금이라도 허난설헌의 진짜 시를 발굴해 내는게 허난설헌 본인의 명예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일 지도 모르겠네요.
P.S2 현대의 허난설헌 표절 논란에서 전근대 남성 문인들이 그녀의 시를 표절했다는 비평을 두고 '어디서 여자가 시를 지어!'라는 시각으로 폄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조선시대에 '이건 표절이다' 주장했던 문인들 중엔 허난설헌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평가한 사람들도 많았고 표절의 잘못을 허난설헌보단 동생 허균의 문제로 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서포 김만중의 경우엔 허난설헌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면서 이 표절 문제는 알려지지 않은 시들을 표절해 명성과 위세를 높히려 했던 허균 잘못이라며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다음은 그의 표절 논란에 대한 평가입니다.
난설헌 허씨의 시는 손곡(李達)과 그 오빠 하곡으로부터 나왔는데, 그의 공부는 옥봉(玉峯) 같은 분들에게는 미치지 못하나 총명하고 민첩함은 그들을 넘어선다. 우리 나라의 규수 중에 오직 이 한 사람뿐이다. 다만 아까운 점은 그 아우 균이 원나라와 명나라 사람의 좋은 글귀와 아름다운 시 가운데 보기 드문 것을 뽑아서 난설헌의 문집 가운데다 침입하여 명성과 위세를 크게 한 점이다. 이것으로 우리 나라 사람을 속이는 것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중국에 들여보내었으니 마치 도적이 남의 소나 말을 도적질하여 그 마을에다가 전매하는 것 같아서, 어리석기가 그지 없다. 또 불행하게도 전겸익을 만나서, 간사한 것을 적발당하고 밑바닥이 온통 들어나게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부끄럽게 만드니 아까운 일이다. 천고에 이름을 날린 사람이 본래 많지 않다. 허씨와 같은 재주는 저절로 일대의 혜녀(慧女)가 되기에 충분한데도 이런 짓을 하여 스스로를 더럽혔다. 사람으로 하여금 매편마다 의심나게 하고 매귀마다 흠집을 찾게 만드니 탄식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