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는 진실일까?
똑같은 팩트를 놓고도 보는 시각에 따라 입장이 시시각각 달라짐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여야 입장 전환과 라임·옵티머스 사태에 대한 언론의 보도 태도 변화 등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다.
하나의 팩트를 놓고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는 일은 또 얼마나 흔한가.

최근 IHO(국제수로기구)가 발표한 신(新) 해도 표준 도입을 놓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해석 논쟁 또한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IHO는 지난 11월 16일 화상 총회를 열고 국제 해도 제작 방식을 변경하겠다는 마티아스 요나스 사무총장의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해역을 각각의 지명으로 표기해 온 기존의 S-23 표준을 폐기하고, 해역명을 고유 식별번호로만 표기하는 디지털 방식의 S-130 신(新)표준을 도입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따라서 앞으로 국제 해도는 개정판부터 해역명이 아닌 숫자로만 표기하는 방식으로 변경될 예정이다. 이번 안건은 회원국 회람을 거쳐 오는 12월 1일께 공식 확정된다.

이 발표를 놓고 한일 양국의 해석은 정반대다.
한국은 "일본해 단독 표기를 저지했으니 사실상 한국의 승리"라고 주장하고 있고, 일본은 정반대로 "일본해 단독 표기를 지켜냈으니 일본의 승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의 사안을 놓고 왜 이렇게 정반대의 해석이 나오고 있는 것일까?

먼저 이번 결정이 나온 역사적 배경을 복기해 보자.
1. 기존 국제해도는 '일본해' 단독 표기가 원칙이었다. 이는 S-23 표준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가 일제강점기인 1929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외교권이 없었던 대한민국은 '일본해' 단독 표기에 아무런 반발도 할 수 없었다.
2.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양국이 공유하는 해역을 '일본해'로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며 지난 1997년 처음 국제사회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동해'로 표기하거나 '평화의 바다'로 고쳐 부르거나, 최소한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다.
3.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며 이같은 주장은 점점 힘을 받기 시작했고, 각국이 발행한 국제지도에서 2% 미만을 밑돌던 '동해' 병기율이 최근 40%에 이를 정도로 크게 개선됐다.
4. 과거와 달리 이제 일본을 일방적으로 편들어줄 수 없게 된 IHO는 그 절충안으로 이번 총회를 통해 "동해/일본해 그만 싸우고 앞으론 아예 숫자로 표기하자"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오랜 시간 국제사회에 통용돼 온 '일본해' 단독 표기를 막아냈으니 역사적 승리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일본이 그간 '일본해' 단독 표기의 근거로 삼아온 "국제해도에도 일본해로 단독 표기되어 있지 않느냐"는 주장을 더 이상 펼 수 없게 된 것을 가장 큰 소득으로 보고 있다.
이에 한국 매체들은 일제히 헤드라인을 통해 "IHO, '동해' '일본해' 대신 숫자로 표기 가닥(동아일보)", ""IHO 절충안 ··· 동해·일본해 대신 번호로 표기한다(매일경제)", "IHO 해도집 '일본해' 표기, 숫자로 바뀐다(경향신문)", "IHO 해도집에 '동해' 병기 실패했지만 '일본해'도 제외(서울신문)", "'일본해' 주장 근거 사라진다…IHO, 명칭 대신 번호 표기 합의(연합뉴스)" 등의 제목으로 소식을 전했다.

반면 일본 매체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마이니치 신문은 1면 톱기사 헤드라인으로 "해도에 일본해 계속 쓴다(海図に日本海 継続へ)"라 뽑고 부제를 "동해 병기 없이 ··· 한국 반대 안해(東海-併記なし - 韓国反対せず)"라고 달았다. 만장일치제인 IHO의 총회 규칙을 살짝 꼬아 한국이 반대하지 않았다는 조중동식 기술까지 들어간 기사였다.
공영방송 NHK도 같은 날 "IHO는 일본해 표기를 해온 그간의 지침을 계속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IHO는 향후에는 해역을 명칭이 아닌 숫자로 표기해 데이터로 관리해 나가는 방안도 함께 승인했다"고 주장했다. TV아사히도 "한국이 일본해 호칭에 대해 동해 병기 등을 요구하는 문제와 관련해 IHO가 일본해 단독 표기를 계속하기로 잠정 승인했다"고 전했다.

일본 매체들이 이 같이 주장하는 근거는 IHO가 이번에 채택한 보고서 내용 중 '해역을 지명 표기 없이 고유 식별번호로 표기하는 디지털 방식의 신해도 표준인 S-130을 개발하고, 기존 표준인 S-23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역사적 변천을 보여준 출판물로서 남는다'는 부분의 뒷부분을 근거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 표준인 S-23은 해역명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존치한다는 내용인데 "디지털본이 아닌 출판본 해도에는 S-23 표준에 의거해 종전대로 '일본해'를 단독표기 한다"는 메시지로 곡해한 것이다.
대한민국 외교부는 이에 대해 "IHO는 사실상 S-23을 더 이상 표준으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면서 "이에 따라 동해 표기 확산의 큰 걸림돌이 제거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새로운 표준 S-130을 도입하겠다고 밝힌 IHO.
여전히 아날로그의 향수에 젖어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는 듯한 일본.
역사는 과연 이번 사태를 어떻게 기록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