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댄디팬입니다. 요즘은 육아때문에 정말 고단하네요. 아이를 기르면서 드는 생각은 "아니 나를 어떻게 키운거야 우리 부모님은...?"하는 생각입니다. 아직 말도 못하는 아이가 내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해서 좋지 않은 행동을 하고 저는 아내한테 등짝을 내주는 일이 반복되면서 고향에 계신 아버지 생각이 참 많이 납니다. 어머니도 생각이 많이 나긴하는데, 어머니는 언제나 저를 지지해준다는 느낌이었다면 아버지는 이렇게 살으란 말야! 하면서 말하고 그게 또 듣기 싫었던 제가 티격태격하면서 친구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친구처럼 이야기할 수 없었던 순간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옛날분이라 워낙 착오와 확신에 의한 거짓정보(-_-)를 주시면 그걸 제가 부정하고 티격태격했지만, 아버지의 전공인 '식물'에 관해서는 저는 아는 것이 없으니 그저 들어야 했거든요. 아버지는 일평생 농업에 종사하시면서 농업을 연구하고 자격증도 따셨습니다. 식물을 보면서 인생을 이야기하는 걸 즐기셨고 40여년을 그렇게 사시다보니 식물 이야기할 때는 정말 어깃장을 놓을 염두도 안 나더라구요.(결혼식 축사조차도 식물이 꼭 들어가십니다...)
그런 아버지께 들었던 몇가지 식물이야기를 나누고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적습니다.
# 오동나무와 모내기
저는 다른 건 잘 기억하는데 식물은 좋아하면서도 기억을 잘 못합니다. 그런 저도 쉽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동나무였는데요, 천변에 엄청 큰 잎으로 멀대같이 자라고 있는 풀이 바로 오동나무입니다. 저게 뭐냐고 물었을때 아버지가 오동나무라고 해서 놀랬었죠. 저건 풀인데요...? 라는 제게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저게 커서 나무가 되지. 처음에 잎을 넓게 벌리고 쭉쭉 자라. 그래서 아래 식물들이 살지 못하게 만들지. 저런 식물을 선구식물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선구자지.(덧: 한자는 선구식물이랑 선구자랑 다른데 영어로 정말 파이오니어를 쓰더군요...) 저렇게 자기 자리를 잡는거야."
네 맞습니다. 오동나무는 일종의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고 있는 식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건실하게 크는 게 아니라 자리를 잡기 위해(즉 주변의 식물들을 제압하기 위해) 풀인 것 처럼 잎을 크게 벌리고 좀 약할 지언정 높게 쭉쭉 올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그 튼튼한 오동나무로 바뀝니다. 아 뭐든지 이렇게 선점하는게 중요하구나. 그리고 저 평화로워보이는 식물들 사이에서도 자리 잡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생명은 이토록 역동적인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요.
그러고 나니 모내기가 이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모내기는 벼가 다른 잡초에 비해 먼저 생육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벼가 잡초와의 경쟁에서 이기게 해줍니다. 물론 그 틈을 뚫고 나오는 잡초들도 있지만. 그래서 직파법이 아니라 이앙법 이앙법했구나... 이런 생각도 들었구요. 과거에는 그냥 아 몰라 이앙법 최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런 원리가 적용될 수 있겠다 싶더라구요. 이러한 모내기 원리를 이해한 저는 아버지께 동원되어 새참제조, 모판 나르기에 동원되었고 이번 추석 때는 콤바인 보조에도 끌려갔습니다.
#벼꽃냄새
어느날 아버지를 따라 산책을 하다가 묘하게 고소한 냄새가 코에 다가왔습니다. 은은했지요.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식물을 꽃을 피웁니다. 다만 우리가 꽃을 잘 못보는 식물이 많지요. 제게는 벼꽃이 그런 존재였습니다. 촌에 살면서도 벼꽃은 몰랐네요. 그런데 벼는 꽃마저도 냄새가 구수하더라구요. 강하게 고소한 느낌은 아니고 정말 은은한 정도의 냄새긴 했는데 하필 논과 논 사이에 놓인 길이라서 그 냄새를 제가 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저는 벼꽃을 처음 알아서 호구잡힌 나머지 아버지에게 아직 영글 않은 볍씨 내부에 대한 강의를 들어야 했습니다. 와... 벼꽃 필무렵의 볍씨는 안이 쌀알이 아니라 액체형태더라구요.(딱 그 벼꽃이 핀 벼의 볍씨를 가른 것이 아니라 그 즈음의 다른 볍씨를 갈라서 보여주셨습니다.) 아침햇살 희석액이 노란 볍씨 안에 있는 느낌? 여하튼 벼에도 꽃이 있고 그 냄새가 누군가에게 위안을 줬다는 것을 알고나니 논이 조금 달리 보였습니다.
#로제트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길을 걷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땅을 보시더니 말씀하십니다.
"저거 봐라 땅에 딱 붙어있지?"
"네(아니 무슨 새삼스럽게)"
"저걸 로제트라고 한다. 추위를 이기려고 땅에 딱 달라붙어있는거야. 그리고 저 식물들이 봄이 되면 로제트를 풀고 다시 자라나는 거지. 너도 이제 로제트를 풀고 세상에 나가는거다."
"..."
아버지와 다니면서 가장 뭉클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일이 참 안풀리고 있다가 조금 희망을 보았을 때였거든요. 그런데 그냥 지나치는 식물이 그걸 조금 더 잘 버티고 살겠다고 땅에 바싹 붙어서 퍼져있다가 봄이 오면 풀려서 솟아나고 자라난다니. 왠지 모르게 저 로제트식물들도 제 친구같아지는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저렇게 진화한 식물들이 삶의 스승같이 느껴지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니 오늘따라 아버지가 더 뵙고 싶네요. 농한기인데 코로나때문에 놀러 못다니시는 아버지를 찾아뵈러 조만간 다녀와야 겠습니다. 가서 식물 이야기 더 듣고 위로도 받고, 나중에 저장해놨다가 딸내미한테도 들려줘야지 싶네요. 추운 겨울인데 모두들 봄에 로제트를 풀기 전까지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미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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