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친 축축한 새벽이었다.
젖은 아스팔트 바닥에 반사되는 노란 불빛이 껌뻑거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습기 머금은 고요 속에 가로등 하나가 위태롭게 불빛을 반찍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요란을 떠는 것이 마치 살려달라 모스부호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어쩐지 처량한 모습이 마치 나 같아서 지나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애써 외면하고 지나치며 자취방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저 골목 끝 어귀에서 하얀 빛이 바다 등대 불빛처럼 삐져나와 있었다.
위로가 필요한 밤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벌써 수 개월도 더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변변찮게 제 밥벌이도 못하는 신세였다.
자괴감에 자조섞인 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따금씩 부모님께 전화가 걸려올 때면 자괴감은 죄스러움으로 바뀌곤 했다.
오늘은, 아니 어제는 특히나 그랬다.
최종 면접은 분명히 성공적이었다.
준비도 잘했고, 여유를 잃지 않고 면접관의 질문에 잘 대답했다. 느낌도 좋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하루만에 덜컥, 무심하게 날아온 탈락 통보는 무척이나 쓰디 썼다.
"씨발 하루라도 늦게 발표하지. 내정자라도 있었나."
한심한 것은 나 자신이었으나, 인정하기 싫어 애꿎게 다른 무언가를 탓해보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단지, 빨리 더 취하고 싶은 기분만이 남았다.
탈락 소식에 얼굴을 비춘 친구들과 꽤 늦은 시간까지 술 잔을 기울였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답답했다.
'다음엔 잘 될거야 너무 걱정마.'
'100번 떨어져도 1번만 붙으면 돼!'
'다 사는 게 그런거지, 산 입에 거미줄 치겠냐, 걱정 마라.'
좋은 친구들이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위해 소중한 퇴근 시간을 할애해준 좋은 친구들.
'요새 일은 어때?'
'그냥 뭐 말단 사원이 어떨 게 있나, 까라는 데로 까는거지...'
'우리 팀장 진짜 개짜증나..!'
각자의 회사 얘기가 나오자 껴들 구석이 없었다.
어느덧 그 좋은 친구들은 나와는 다른 자신들만의 이야기 담을 쌓아갔다.
그들이 잘못한 것도 없건만, 이야기 도중 그들은 언뜻 언뜻 조용히 찌그러져있는 내 눈치를 살폈다.
좆 같았다. 친구들이 아니라, 누군가를 눈치보게 만드는 자신이.
서로 나서서 술값을 계산하려는데 그 사이에서 주머니에 손만 꽂고 있던 자신이.
그래서 오늘은 더 취하고 싶었다. 마음편히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만을 위한 술이 절실했다.
편의점 문 앞에 다다라 발걸음을 보채며 문을 밀었다.
덜컥.
잠겨 있었다.
"씨발... 되는 게 없네."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욕이 절로 나왔다.
한숨을 푹 쉬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다른 편의점을 들르기에는 골목 어귀의 가로등이 마음에 걸렸다.
기웃기웃 편의점 안을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불이 켜져있는 걸 보면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기다리면 알바생이든 사장이든 오겠지.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꼬깃한 담배갑을 열어 젖히고 그 안에서 몇 개비 안 남은 담배 한 대와 조그맣고 까만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탁, 탁.
안개가 낄 것 같은 습한 새벽이어서 그런지 불이 제대로 붙지 않았다.
이것마저 내 뜻 대로 되지 않는건가 싶어 짜증이 치솟았지만, 다행히 마지막 차에 라이터불이 붙었다.
금세라도 꺼질새라 황급히 입에 문 담배를 꺼질듯한 작은 불빛에 가져다 댔다.
푸후.
깊게 빨아들이고, 고개를 들어 깊게 뱉었다.
자욱한 연기가 안개처럼 뿌옇게 깔렸다. 그 안개같은 연기를 보고 있으니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연기가 사라져갈 쯤 다시 다시 깊게 빨아들이고, 깊게 뱉으려던 순간 이었다.
"그거 기분 좋아요?"
쿨럭쿨럭.
왠 여자 하나가 손에 든 담배를 채갔다. 순간 당황하여 꼴사납게 쿨럭거렸다.
뭐지? 미친년인가?
하도 당황하여 별 생각이 다 스쳤다.
"너, 뭐야?"
"막 그 뭐야, 마약처럼 뿅뿅 가는 건가?"
내 말이 안 들리는 듯, 여자는 타들어가는 담배를 쥐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저씨, 맞아요?"
떡 하고, 턱이 벌어졌다. 아저씨? 누가, 내가?
아무리 그래도 사지멀쩡하고 건장한 20대 중후반에게 아저씨라니. 너무하잖아?
"아저씨라니, 그나저나 너 뭐야?"
"잠시만요!"
손을 뻗어 여 담배를 다시 가로채려하자, 여자는 휙 몸을 돌려 내 손길을 피했다.
그러더니 말릴 새도 없이 담배를 제 입으로 가져다 댔다.
"이렇게 하는 건가...? 음... 콜록 콜록... 으웩."
처음이었나보다. 어설프게 담배를 몇 모금 빨고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찌푸린 얼굴에 혓바닥까지 쭉 뺀 여자를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요?"
여자는 도로 가져가라는 듯이 반쯤 탄 담배를 내밀었다.
그것을 다시 받고, 깊게 한 모금 빨았다. 진해지는 빨간 불빛과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좋았다.
"무시하는 거에요?"
"무시는 그 쪽이 먼저했지. 그리고, 아저씨라니? 오빠라는 단어도 있는데, 내가 어딜 봐서 아저씨야?"
째릿 쳐다보는 여자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제야 경황이 없어 살피지 못했던 여자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수하게 화장기 없는 얼굴, 하지만 눈빛은 맑고 깨끗한 걸 보면 미친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저보다는 많아 보이는 걸요? 거기다가 지금 말 놓고있죠?"
"어?"
"보자마자 말 놨잖아요. 완전 아저씨네. 또래 같았으면 나이가 나보다 많은거야? 적은거야? 생각하면서 존댓말 했겠죠?"
뭔 개소리야? 먼저 무례한 짓을 한 게 누군데?
받아치려던 것을 꾹 참고 손을 휘휘 저었다. 귀찮았다.
"가라."
"거 참 이상한 아저씨네."
순간 여자가 물끄러미 내 눈을 바라봤다.
점점 거리가 좁혀졌다. 조금 가깝지 않나?
"말뽄새는 완전 고슴도치인데, 또 나쁜 사람 같지는 않고.. 흐음..."
반짝거리는 눈이 더 가까워졌다. 수수하지만, 이제보니 여자는 예뻤다. 뭐야 이거...
술기운 떄문인지 쑥쓰러운 마음때문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마치 눈싸움처럼 오기가 생겨 나도 여자의 맑은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얼굴은 더욱 달아오르면서.
"아저씨."
"뭐?"
"혹시 아파요?"
빨갛게 익은 내 얼굴을 보며 여자가 대뜸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열 나는 것 같은데? 이런 시국에 아프면 서러울 걸요?"
"뭐, 뭐, 뭐, 아파도 내가 아픈데, 뭐?"
병신같이 말을 더듬었다.
여자는 앳됐다. 고등학생 쯤 될까?
그럼 어린애와 말을 섞는데 완전 말리는 느낌이었다.
"참 속편한 말씀하시네, 아프면 누군가 걱정하겠죠."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스쳐갔다.
어제 본 아들의 면접 결과가 궁금하시기도 할텐데, 아들에게 스트레스 주기 싫어 아무 것도 묻지 않을 것이 분명한 따뜻한 얼굴.
씁쓸했다.
"거봐요, 제 말이 맞죠?"
"그래, 네 말이 맞네. 근데 다행히 아픈 건 아니야."
"그럼 얼굴이 왜 빨개요? 얼굴도 뜨겁고."
다시 이마를 짚으려는 여자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술 마셔서 그래, 술."
거짓말을 해서일까, 가슴이 약간 뛰었다.
"흐음."
"왜?"
여자가 다시 째릿, 나를 노려봤다.
어쩐지 뜨금하게하는 눈빛이었다.
"아저씨 정말 나쁜 건 다하네요?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고, 그러다가 제 명에 못 죽어요."
"무슨..."
"크게 혼나 봐야 겠는데요? 흐음."
이상한 말들 뿐이었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어쩐지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똑바로 살아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저도 담배란 걸 경험해봤으니, 봐 드릴게요."
빼꼼 혀를 내밀고 싱긋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애네.
"아! 늦겠다!"
제 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앞 뒤 없이 제 할만 하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애였다.
깜짝깜짝 사람 놀래키기나 하고...
"벌써 2시 반이 다 돼 가잖아요. 왜 말 안했어요?"
그걸 왜 내가 일일이 확인해줘야 하는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크게 기분이 나쁘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마치 내 대답을 듣기라도 한 것 마냥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봐야 겠어요. 아저씨도 술 마시지 말고, 담배도 좀 피지말고 들어가요! 다음에 또 봐요! 안녕."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 아이를 쳐다보며 벙쪘다.
뭐지..? 아니 뭐였지...?
여자애가 사라지고 몇 초 뒤쯤, 유니폼을 입은 편의점 아저씨가 터벅터벅 나타났다.
벙쪄있는 나에게 와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