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번 단편이 끝나면, 미완으로 완결을 내지 못했던 작품을 끝내보려고 합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카페 그녀를 먼저 완결 구상 중 입니다.
문체도 바뀌고, 또 제가 쓰고도 짜놨던 플롯 설정 파일을 지워버리기도 해서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항상 부족한 글을 재밌게 읽어주시고 잊지 않고 댓글도 남겨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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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내리는 포근한 초겨울 빗소리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새벽에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차갑지만 따뜻하게 땅을 적시는 듯 했다.
잠에서 깼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아 다시 눈을 감았다.
토도독, 내리는 빗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백색소음을 감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지난 밤 일이 떠올랐다.
다소 황당하고 어이없는 만남이었으나, 그 여자의 맑고 천진한 눈빛을 떠올리니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따지고 보면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간밤에 꿈도 꾸지 않고 편안히 잘 수 있었던 까닭은 간밤의 꿈 대신 새벽에 있었던 일을 대신 꾸어서는 아닐까?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시간이었지만, 정신이 맑았다.
기지개를 있는 힘껏 켜고 작은 자취방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몇 개비 남지 않은 꼬깃한 담배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고, 칙 라이터 불을 붙였다.
톡톡 내리는 빗소리에 적당히 차고 시원한 초겨울 바람. 담배 맛이 꿀 맛이었다.
내친 김에 어머니에게도 카톡을 보내야겠다.
어떻게 말해야할까 고민하다가 주절주절 길게 쓴 장문의 카톡을 지웠다.
'엄마 미안해. 기대했을텐데.'
마음이 조금 쓰라렸지만, 다시 또 힘내보자며 마음의 짐을 툭툭 털어내본다.
우우웅.
'괜찮아 아들. 힘내!'
'뽜~이~팅~'
벌써 일어나계셨나? 어머니의 답장이었다. 간결한 답장이었지만 괜히 마음이 울컥했다.
그나저나 언제 이모티콘에 맛을 들이셨는 지 흰 띄를 머리에 둘러맨 커다란 하얀 토끼 이모티콘도 보내셨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 지금까지 수두룩하게 떨어져온 몸이다. 한 번 떨어졌다고, 너무 우울해하지 말자.
어쨌거나 제 한 몸 당당히 밥벌이를 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만 했다.
자격증이든, 영어공부든, 자소서 쓰기나 면접 연습이든. 물론 취업한다고 해도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지 끝이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항상 따뜻하게 못난 아들을 응원하는 어머니에게 만큼은 당당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생수통을 잘라만든 재털이에 담배를 지져 끄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두운 터널 중간 어디쯤이지만, 결국 언젠가 터널 끝 빛을 만나겠지.
정신없이 쓸만한 공고 자소서를 쓰고, 틈틈이 영어공부도 하다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아침 겸 점심, 점심 겸 저녁을 대충 편의점 도시락으로 떼우고 보니 아침에 모자랐던 잠이 찾아왔다.
저녁잠 자면 라이프싸이클이 엉망이 되는데. 안 되는데...
생각과 동시에 억지로 눈읖 부릎뜨고 버텨보려고 했지만, 수마에는 누구든 장사가 없었다. 스르륵.
감은 눈을 떴을 땐 벌써 새벽 1시였다.
꼬르륵.
이 병신 같은 배꼽시계는 시간은 어긋났지만 기능은 참 제대로다.
죽고 싶지 않으면, 뭐라도 주기적으로 잊지 않고 밀어 넣으라고 알리고 있었다.
창 밖을 보니, 비는 그쳐있는 것 같았다. 으, 그래도 새벽이라 그런지 추울 것 같은데 나가기 싫다.
하지만, 자취생 주제 집 안에 먹을만한 것들을 구비해놨을리가 없었다.
당연히 뭣도 없는 걸 알았지만, 괜히 한 번 미니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대충 츄리닝에 얇은 패딩을 걸쳐입고, 자취방을 나섰다.
씨발, 괜히 슬리퍼 신고 나왔나. 양말을 다시 신기 귀찮아서 대충 삼선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왔는데 발가락이 시려웠다.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편의점에 도착했다.
덜컥.
아니 아저씨 혹시 과민성 대장염...?
어떻게 올 때마다 자리를 비우실까. 이거 혹시 트루먼쇼?
도청이라도 하면서 내가 올때마다 약 올리려고 가게 문을 닫아 놓는 건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오랜 기간 혼자 자취방에 짱박혀있으니, 정신이 어떻게 되어 가나보다.
후 하고, 입김 담긴 한숨을 푹 쉬며 편의점 의자에 앉았다.
짜증나, 발 시려.
주머니를 뒤져 담배갑을 열었다. 돋대였다.
어차피 기다렸다가 사가면 되니까 상관없다. 거침없이 꺼내 라이터 불을 붙였다. 아니, 붙이려고 했다.
"쯧쯧쯧. 그렇게 일찍 죽고 싶어요?"
거짓말처럼 어제 봤던 그 애가 내 앞에서 혀를 차고 있었다.
여전히 맑고 반짝이는 눈과 단정하게 묶은 머리와 편하게 입은 깔끔한 운동복이 잘 어울렸다.
또 보자더니, 이렇게 바로 다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대놓고 인정하기 싫어 짐짓 툴툴 대는 소리가 나왔다.
"남이사 피던 말던."
입에 문 돋대를 다시 담배갑으로 밀어 넣었다.
"말은 그런데 말은 잘 듣네요? 칭찬해줄게요. 칭찬~"
슥 다가오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뭔가 거꾸로 애취급 당하는 느낌인데, 참 이상하게 눈 앞에 이 애는 사람 기분을 좋아지게했다.
직설적이고, 무례한 말인데도 기분이 나쁘지가 않으니 참 신기한 재능이었다.
"너한테 애취급 받을 나이는 아닌데."
"헤헤, 애 취급이라뇨 이건 칭찬인데요?"
넉살도 좋게 베시시 웃었다.
"넌 어떻게 된 애가 맨날 새벽에만 돌아다녀 위험하게?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험한 꼴 당한다?"
"으 잔소리~ 안 들려~~에베베베."
빠르게 손바닥으로 제귀를 막았다 풀었다 하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어처구니가 없는 반응이지만,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화를 내고 싶지가 않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 잔소리도 지겹거든요. 아저씨도 잔소리만 할 거면 담배나 그만펴고 들어가요."
"알았어, 알았어. 잔소리는 그만할게."
나는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보였다.
여자애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씩 웃어보였다.
"왜 불교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가?"
"있긴 하지."
"이틀 연속 만난 거 보면 이것도 인연이죠, 그쵸?"
"그, 그렇지?"
내심, 옷깃은 니가 입은 옷 목 옆에 있는 깃들을 말하는 거고,
그 옷깃끼리 스치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란다, 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럼 저랑 놀아줄래요? 이것도 인연인데."
거절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연하게 '응.'이라는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 늦은 시간에 어디서 뭘 하고 논다는 걸까.
"잠시 걸어다니는 거죠. 같이 걷는 것도 노는 거야. 암암."
뜨금, 혹시 내 속마음이라도 들렸는 지 여자애는 대답해주 듯 말했다.
홀린 듯이 나를 이끄는 여자애의 손에 끌려갔다. 아니 따라갔다.
자연스럽게 잡힌 손이 신경쓰였지만, 뭐 어떠랴? 기분이 좋은 것을.
차가운 날씨였다. 여자애의 손은 차갑지만, 포근하고 따뜻한 온도가 느껴졌다.
그나저나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양말신고 운동화 신는건데. 발이 너무 시리다. 꼼지락.
"하하하, 아저씨 근데 역시 아저씨네요."
"왜?"
"이 겨울에 맨발에 슬리퍼라니, 근데 위에는 패딩이네?"
씨발. 뭐라 할말이 없었다.
"거야, 집 앞 편의점 나오는 거니까."
"아저씨 운동하고 땀나면, 더위 식힐 때 어떻게해요?"
"뭔 소리야?"
"왜 그 있잖아요, 웃옷을 벗는 다던가, 바지를 걷는 다던가?"
"바지를 걷지 않나 보통?"
내 대답에 여자애는 혼자 두 손을 모으고 큭큭 거렸다.
"뭐야 뭔데? 왜 웃는데?"
"제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오빠들은 윗 단추를 풀고, 아저씨들은 바지를 걷는데요? 거 봐 완전 아저씨네."
자기가 말해놓고 혼자 재밌는 지 다시 한 번 쿡쿡 거렸다.
대놓고 아저씨 취급이라니. 난 아직 27살 청춘인데.
"그래그래, 아저씨다. 피자보단 전이 좋고, 스프보단 국밥이 좋거든?"
"아하하. 역시!"
함께 터벅터벅 걷는 새벽길 위에서 여자애는 자지러지는 듯 크게 웃어젖혔다.
동시에 자기가 맞았다며 눈도 빛내면서.
아저씨로 낙인이 찍혔지만, 기분은 좋았다. 웃음소리가 비스킷 처럼 달고, 넘기기 좋았다.
생판 모르는 여자애랑 이 새벽에 동네 한 바퀴를 걸으며, 이게 뭐하는 건가 싶다가도 옆에서 재잘대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나 역시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역시 제가 사람보는 눈은 있는 것 같아요."
"왜?"
"툴툴대긴 하고, 까칠하긴 한데 아저씨는 좋은 사람 같아요."
"그런가?"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며 함께 걷는데 시간은 쏜살보다 빨리 지나간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도 서로 개인정보에 대한 것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체 묻지 않았다.
아니, 나는 묻고 싶었지만 뭔가 눈치 보였다.
이따금씩 뭔가 왜 혼자 새벽에 돌아다니는 지, 어디 사는지 물어보려고 할 떄마다 여자애는 자연스럽게 딴 얘기로 이야기 주제를 돌렸다.
나는 그래도 제법 눈치가 있는 편이어서 이것이 이 여자애만의 자연스러운 함구령임을 깨달았다.
나도 굳이 우리 대화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편하게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주제로 끊임 없이 떠들어댄 것 같다.
쭉 동네를 커다랗게 돌아 다시 동네 편의점 앞으로 돌아오기까지.
"벌써 2시네요. 슬슬 들어가 봐야 겠어요."
살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도 늦었고 해서 데려다 줄까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았지만 이내 입을 꾹 닫았다.
하기사 나야 좁은 자취방에 세들어사는 처지라 그렇지 서울 한 복판에 방법용 CCTV도 도처에 깔린 동네다.
멀지 않은 곳에 학교며, 병원이며, 소방서며, 경철서까지 있는 도심인데, 큰 일이 날리가 없지.
데려다 준다는 말은 너무 속 보이는 것 같았다. 함께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키기에는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고 쑥쓰러웠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
내 인사에 여자애는 방긋 미소지었다.
"오늘 고마워요. 즐거웠어요. 아저씨."
여자애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돌아서려는 여자애의 모습을 보자니 괜히 말이 한 번 더 걸고 싶어졌다.
불편해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뭐야 이름! 이름이 뭐야?"
여자애는 멈칫하고는 뒤 돌았다.
으 쪽팔려. 자기에 대해서 묻는 것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괜히 물었나?
"알고 싶어요?"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괜히 한 번 튕기고 싶어졌다.
"아니, 뭐 그 꼭 알려달라는 건 아니고, 그래도 같이 야밤에 산책도 한 사이인데 그쪽, 저쪽 이렇게 부를 순 없으니까,
이름이라도 알아야하지 않을까? 우리 또 만나서 어쩌다보면 산책을 할 수도 있는거고, 또 뭐.. 그.."
존나 개 병신같은 새끼.
나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아니 뭔 병신도 아니고 주절주절 때들어 대는 거야. 내 주둥이야 좀 닥쳐라.
"흐음."
여자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뭐 네가 싫다면 묻진 않을게."
순간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깨고 여자애가 슥 다가오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저씨 저한테 반하면 안 되는데? 아저씨 힘들어져요."
"아니 뭔 개소리야.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나는 그냥 기분이 편안해져서 대화를 더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개소리라니! 말넘심 흑."
여자는 과장되게 우는 척을 해보지만, 한 시간 남짓 대화하면서 그게 장난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미안, 미안."
알고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여자애는 더 밝게 씩 웃어보이더니,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제 이름은 은하윤이에요. 은하윤. 담에 또 봐요."
제 말을 마치고는 여자, 아니 하윤이는 마치 마법사 처럼 스르륵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은하윤, 은하윤.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이름도 예쁘네.
나는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그 곳을 쭉 보고 있었다.
3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