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까움의 역설
아파트는 현대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주거환경입니다. 과거와 다르게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아파트라는 한 건물 안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형태는 집단적이지만 그 본질은 개인적입니다. 이 미묘하게 모순된 관계는 참으로 신기합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SNS입니다. 터치와 클릭 몇 번 만으로 유명인사, 해외에 있는 이름 모를 누군가, 혹은 직접 대면하기 어려웠던 단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전 지구적 커뮤니티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개인적일 수 있는 커뮤니티입니다. 관계의 [물리적 거리] (네트워크상의 만남도 포함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관계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멀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심리적인] 연(憐연민이자 連연결)이 약해지고 이로 인하여 층간소음으로 인한 다툼이 끊이지 않고, SNS에서 혹은 댓글 창에서 일어나는 무례한 키배,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모욕과 조롱이 난무합니다.
예민한 고슴도치들이 서로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일까요?
2. 두려워지는 가까움
과거에는 누군가의 죽음은 그가 사는 마을의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매체는 누군가의 죽음을 - 주로 특이하거나 사연이 있는 죽음에 대하여 - 작은 마을의 이야기로 끝내지 않습니다. 취재하고 기사를 쓰며 그것을 온 나라에, 혹은 전 세계로 보냅니다. 그들은 'Memento mori'의 메시지를 매일같이 전해주는 것일까요? 이로 인해 몇몇 사람들은 인생의 허망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매체가 주는 가장 큰 두려움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끔찍한 범죄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은
[나와 너무나도 먼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행한, 혹은 그들이 당한 범죄에 대해
[마치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처럼] 경악하고 놀라며 혹여나 같은 범죄를 당하지 않을까, 혹여나 내 주변에 저러한 범죄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사회 전체로 끼얹습니다.
[타자의 접근]이라는 원초적인 두려움에 기름을 끼얹고, 불신과 의심의 불을 때웁니다.
또 다른 커다란 두려움은 코로나 감염자의 동선입니다. 이 공포는 실제적으로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 명확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코로나의 무증상 전염, 코로나 치료의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시민들은 자신이 사는 동네에 확진자가 생겼다고 하면 황급히 동선을 체크해 봅니다. '내 주변 사람이 걸리지 않았을까?', '내가 혹시나 그 [동선]에 포착되어 [검사대상]이 되거나, [확진 판정]을 받으면 [이 시국에 어딜 돌아다니냐는] 누리꾼들의 뭇매, 직장 상사와 가족의 불편과 원망, 치료 과정에서의 사망 가능성 등으로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 같은 생각을 합니다.
3.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이렇듯 우리는 타자의 존재를, 또한 타자가 인접해 있음을 두려워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두려움으로 인해 타자와의 열린 소통을 거부하고, 선을 그으며, 우리와 너희를 칼같이 나누게 됩니다. 서로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차이에 집중하며 타자와의 간극을 벌리려고 듭니다. 물리적인 거리는 가까워졌어도 서로의 [얼굴]은 가까워지지 않았습니다. 타자의 '얼'이 담긴 '굴'을 들여다보려면 용기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 어떤 황금굴도 다가가기 보기 전에는 무한한 심연의 동굴처럼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레비나스의 말처럼 우리가 가진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 [타인의 얼굴과 직면]하고 그것을 [책임]지려는 우리의 용기가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피지알 가입해서 쓴 첫 글입니다. 두서가 조금 없는 것 같긴 하지만... 흥미로운 글이 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