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에 댓글이 5개나 달렸더군요.
최소한 다섯 분은 제 글을 재밌게 읽어주신 다는 사실에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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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터널이었다.
신기하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지?'
귀라도 먹은건가?
아무리 조용한 공간이라 할 지라도 어떤 소음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 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완벽한 무음에 위화감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봤다. 터널 벽면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지 움직이고 있는 건 나겠지.'
나는 자동차 뒷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차는 터널 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더욱 위화감이 짙어졌다. 자동차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엔진이 움직이는 소리,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따위가 없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공포란 것을 깨달았다.
몸을 버둥거리려는데 안전벨트가 불편하리만치 몸을 꽉 조이고 있었다.
갑갑해, 젠장.
앞을 바라보니 운전석에 있는 아버지와 조수석에 앉은 어머니가 보였다.
아버지, 어머니 도와주세요.
있는 힘을 쥐어짜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젠장.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공포감을 억누르고 눈알을 굴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을 인지하는 것 뿐이다.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있고, 터널 속을 지나가고 있다. 터널 끝은,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조수석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잠... 드신 건가?
이번엔 운전석으로 눈을 돌렸다. 아버지가 운전 중 이시다.
'뭔가 좀 이상해.'
운전 중인 아버지의 고개가 푹 가라앉아 있었다. 설마? 잠... 드신 건가?
어떻게든 깨워야 해.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 ..., ..., 젠장 아부지! 아니, 아빠! 아빠! 제발 일어나.
애타게 외쳐보지만, 물고기처럼 소리없이 입만 벙긋 거릴 뿐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내 한계를 뛰어넘는 무기력감에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씨발, 씨발!
차는 여전히 터널 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까만 무언가가 위에서 아래로, 블라인드를 치듯이 내 시야를 가려왔다.
씨발! 미칠 듯한 공포감에 몸을 마구 흔들 제꼈다.
이게 꿈이라면 깨어나게 해 줘. 제발, 제발!
위이이잉. 위이이잉.
"헉! 허억, 허억."
나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소리! 소리가 다시 들린다.
주변을 둘러보니, 머리맡에 둔 폰이 요란하게 진동소리를 내고 있었다.
꿈, 이었나?
"후우...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니, 쿵쾅거리는 가슴이 조금 진정됐다.
밤새 악몽을 꾼 모양이다. 식은땀이 났는 지 등에 잘 때 입었던 내의가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이부자리까지 축축하게 젖어있는 걸 보니, 갑자기 갈증이 치솟았다. 미니냉장고를 열어 입을 대고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정신을 맑게 깨웠다.
위이잉, 위이잉.
아직도 요란하게 폰이 울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전화였다.
"어, 엄마."
- 아들 일어났어? 몸은 괜찮고?"
전화를 받고,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으응. 아마, 괜찮은 것 같아."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보니 열은 내려간 것 같다.
- 밥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고.
"내가 무슨 애인가. 밥 알아서 잘 챙겨먹으니까, 너무 걱정 마."
- 그럼 네가 애지? 어른이야?
나름 27살이나 먹은 청년에게 애라니. 가끔 어머니는 나를 너무 과잉보호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악몽을 꾸고 난 덕분인지 어머니의 애취급이 마냥 싫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요, 그래. 나 애 맞지."
- 이상하네... 세건아, 혹시 아직 아파? 얘가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더니, 아니면 머리가 익었나?
평소라면, 바락 아니라고 소리 질렀을 아들인데.
오, 어머니. 나는 도대체 당신의 어떤 장단에 맞춰야 하는 겁니까?
"아무튼 무슨 일 이에요?"
- 무슨 일이긴, 아들. 오늘 면접 날 이잖아. 혹시나해서 전화해봤어. 준비는 다 했고?
면접...? 면접!
하윤이와 헤어지고 며칠을 꼬박 앓아누워 있었더니 시간감각이 무뎌진 모양이다.
슬쩍 스마트폰으로 날짜를 확인해 보니, 어느새 서류합격한 곳 중 한 곳의 면접일자였다.
"후, 다행이네."
- 아들 설마 잊고 있었던 건 아니지?
"하하, 엄마도 참. 그럴리가 없지요."
- 호호, 그럴 리가 있는 것 같은 목소린데.
사실 진짜 깜빡 잊고 있긴 했었다. 하윤이와의 일도 있었고, 뭣보다 아파서 정말 정신 없었으니까.
감기몸살 주제에 너무 아파서 병원갈 생각도 안 들고, 밥 먹는 것도 고역이었을 정도였다.
"근데 정말 그것 때문에 전화한 것 맞아요?"
평소에는 아들 스트레스 받는다고 문자도 먼저 잘 안 하시는 분인데?
- 그냥,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전화했어. 우리 아들 목소리도 오랜만에 들을 겸.
"알았어요. 아들 오늘 힘내서 면접 잘 보고 올게. 그리고 밥도 잘 챙겨먹을테니까, 걱정 마시구요. 나갈 준비할테니까 끊어요."
- 그래. 먼저 끊어 아들.
잠깐, 꿈 자리가 뒤숭숭했다고?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베란다 창가에 비추는 아침햇살을 바라보니 착잡한 기분이 기우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찝찝한 기분은 털어내는 게 맞겠지.
"어머니."
- 응?
"오늘은 어디 가지 마시고 그냥 집에 계세요. 특히 차 조심하고.
- 얘가 평소 안 쓰는 진지한 말투를 다쓰고... 알았어. 아들.
"끊어요. 엄마도 밥 잘 챙겨먹고요."
- 응.
어머니와 통화를 마치고, 잠시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아버지."
- 웬일로 전화를 다 했어? 용돈 필요해?
아버지와는 흔한 부자 관계였다. 무슨 소리냐하면, 가족으로써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어머니보다는 마음의 거리가 있고, 그렇게 살갑게 평소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는 아니란 뜻이다.
근데, 내가 웬일로 전화를 다했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아버지께 전화를 안 드렸었나?
"아뇨. 그냥요. 아버지."
- 어. 왜 아들.
"오늘 운전 조심하시라구요."
- 허허 알았어, 용돈 이따가 보내줄테니까 끊어. 안 그래도 운전 중이다.
"아, 알았겠요."
운전 중이라는 말에 뜨끔하여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괜히 꿈 생각이 나 소름이 돋았지만, 이내 베란다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있는 힘껏 몸을 털었다.
꿈은 반대라는데 너무 과민 반응할 필요 없다. 그렇겠지?
생각해보면, 악몽이었지만 덕분에 시원하게 땀도 빼고, 감기도 다 나았다.
봐라, 물 먹은 솜처럼 무겁던 몸이 깃털처럼은 아니지만 어쨌든 가볍지 않은가?
나는 살짝 몸을 콩콩 뛰어보았다. 목은 아직 좀 잠긴 것 같지만, 확실히 몸은 정상 컨디션이었다.
그나저나 감기를 앓는 동안은 편의점에서 하윤이를 기다리지도 못했다.
설마 나 아픈 사이에 나왔을까? 너무 늦지 않게 온다고 했는데...
잠시 생각이 복잡해졌지만, 일단은 차근차근 앞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겠지.
오늘 봐야할 면접부터 해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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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참 짧고 빠르게 흘러 간 것 같다.
어느새 면접을 마치고 나니 오후 4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지난 면접을 복기했다.
내가 변한건 지, 이상하게 면접을 보는데도 떨리지가 않았다.
괜히 얼어 붙지도 않았고, 면접관의 질문도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러다 언젠가 익숙하게 느꼈던 감각이 떠올랐다.
'어쩐지 여긴 잘 안 될 것 같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떨어진다고 해서 크게 낙심할 것 같지도 않았다.
분명 근무환경이나 처우 모두 꽤 좋은 회사인데도.
어쩌면 내가 조금 변했을 지도 모르겠다.
예전같으면 갖은 설레발을 다 떨었을 텐데, 지금은 그저 무덤덤했다.
여기에서 좋은 성과를 얻지 못 하더라도 언젠가, 어디에선가 좋은 결실을 맺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변화가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쓸데 없이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지 않아 내 스스로가 편하고 좋았지만, 반면에 이래도 되나 ? 싶을 정도로
무던해진 것 같기도 했다.
왜 내게 이런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는가? 원인을 찾자면, 역시 하윤이와의 만남이 가장 큰 이유겠지.
면접 복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예쁜 얼굴에 맑은 눈빛이 생각났다.
대충 집에 가면서 배나 채우고, 오늘 새벽은 편의점에서 하윤이를 기다려겠다.
콕콕.
"저..."
혼자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이런 회사에서 나를 아는 체 할만한 사람이 있었나?
생전 처음와보는 회사인데.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익숙했다.
"혹시 세건 오빠?"
"응? 류아라?"
놀랍게도 나를 부른 것은 두부의 집사, 아라였다.
잘 다려진 양복 스커트에 셔츠, 광이나는 구두를 보아하니... 잘 차려입은 복장이 참 잘 어울렸다.
근데 설마 얘도 면접보러 온건가?
"뭐야, 역시 오빠 맞았네요."
"아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그거야 뭐 저도 취준생이니까요."
뭐야 너도 백수였어?
나는 필터없이 새어나오려는 생각을 꾹 틀어막고 되물었다.
"그렇구나. 하하. 근데 어떻게 여기서 다 만나지? 세상 좁네."
세상 좁다는 말을 많이 듣긴 했어도, 내가 체감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오늘 제대로 겪어 보는 것 같다.
"하긴 뭐, 요새 워낙 취업시장이 어려우니 우리 또래 아는 사람을 면접장에서 만나는 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지."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걸 감안해도 엄청난 우연이지 않나요?"
뭐 그것도 그렇지만.
"어쨌든 면접은 잘 봤어?"
"그럼요."
아라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동시에 작고, 앙증맞은 손으로 V를 그려보였다.
두부를 잃고 길거리에 앉아 엉엉 울던 애가 맞나 싶었다.
그래도 아라의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태도가 나쁘지 않게 보여 나는 미소지었다.
저렇게 대놓고 자신감을 표출하니 오히려 밉살스럽지가 않았다.
"근데 왜 나는 네가 있는 줄 몰랐지 이상하다."
"그거야, 오빠보다 제가 꽤 일찍 면접을 봤..."
"응? 뭐라고?"
잠깐 골똘히 생각하는 사이 아라의 말을 못 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라가 자신의 클러치백을 들어 얼굴을 살짝 가렸다.
뭐야? 얼굴이라도 빨개진 건가?
어쨌거나 올 때는 혼자였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동행이 생겨 심심하진 않겠다.
"그나저나 양복입고 있어서 처음에 오빠인 지 못 알아 봤어요. 잘 어울리는데요?"
"잘 어울리긴 무슨.."
"오빠는 면접 잘 봤어요?"
"그냥 저냥."
"그래도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랄게요."
"내가 잘 되면 너는 백수되는 건데?"
"그럼 조금만 더 백수하죠!"
"뭐야 그게."
같은 시덥지 않은 소리를주고 받으며, 우리는 함께 건물을 빠져나와 동네로 향했다.
같은 취준생끼리 동병상련의 마음이 내게도 있었는 지 아라와의 대화는 편하고 즐거웠다.
"몸은 좀 괜찮아요?"
"완전 괜찮지."
"다행이네요. 많이 아플 것 같아 보였는데?"
"그 정도였어?"
"몰랐어요? 완전 얼굴도 빨갛고 콧물까지 흘렀었는데요?"
윽, 내가 그런 추한 꼴을 보였다고?
"정말로?"
"아뇨, 농담이에요."
"뭐야. 놀랐잖아."
괜히 코끝이 시린 기분에 코 끝을 어루만졌다.
내가 콧물을 질질 흘리고 다녔을 리 없지. 암.
"그래도 진짜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꽤 감기가 심했을 것 같은데...편의점도 안 나오시고..."
"아프긴 했지. 며칠을 퍼져 있었으니."
"그렇구나. 다 나았다니 다행이에요."
"근데 편의점 안 나온건 어떻게 알았어?"
"네?"
아라가 당황했는 지 두 눈동자가 요란하게 흔들었다.
얘는 아무래도 거짓말하면 쉽게 들통날 타입이네.
당황했다고 완전 얼굴에 쓰여있었다. 근데, 내 질문이 딱히 당황할 질문인가?
"그거야, 두부 산책로가 편의점을 지나거든요. 하하."
"그래?"
"그렇죠."
"흐음."
"그렇다니까요? 하하하."
나는 눈을 얇게 뜨고 지긋이 아라를 쳐다봤다.
아라가 더욱 당황한 것 같다. 완전 억지 웃음.
허둥지둥 하는 아라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거 설마 하윤이가 맨날 나를 놀리는 게 이런 재미가 있어서 그랬나?
괜히 더 놀려보고 싶었지만, 더 했다가는 아라가 울 것 같아 대충 상황을 웃어 넘겼다.
그 후로도 이런저런 대화나 농담을 주고 받다보니 어느새 아라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해 있었다.
혼자서 가는 길보단 누군가와 나란히 오는 길이 훨씬 짧게 느껴지는 법이라더니, 진짜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아라를 데려다 준 모양새가 나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다 왔네. 여기 맞지? 그래도 돌아오는 길이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았네."
"네네."
"혼자 사는 거야?"
"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는 질문이었다.
"아니, 나는 그냥 궁금해서."
"..."
이런, 더 오해의 소지가 있나?
"아니아니, 그 있잖아. 너도 아직 취준생인데 이런 오피스텔에 혼자 사는 건지 해서."
결코 일말의 흑심도 없었다. 맹세한다.
다행히 그런 마음이 잘 전달되었는 지 아라의 얼굴이 한결 풀어지며 내게 미소지어보였다.
"뭐 다 부모님 돈이죠. 제 능력보다는."
으스대는 느낌 없이 겸손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자기 강아지를 아끼는 것도 그렇고 사람이 꽤 괜찮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잘 들어가. 추운데 고생했다."
아라에게 손을 흔들어보이고, 몸을 돌렸다.
밖이 어둑어둑한 것이 벌써 저녁이었다. 오늘은 또 뭘로 배를 채워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저 오빠...!"
아라가 나를 붙들어 세웠다.
"왜?"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서 저녁 먹고 갈래요?"
"음, 아냐 나 배가 그렇게 안 고..."
잠깐 고민했지만, 혼자사는 여자 집에 방문하기가 영 불편할 것 같아 거절하려는 찰나.
꼬르륵.
민망하게도 배꼽시계가 정각을 알렸다. 배 이녀석, 이거 참 거절멘트가 무색하게 만드는 구나.
"그럴까...?"
"때 마침 어제 장도 다 봐뒀거든요. 잘 됐다. 저도 혼자 먹기 심심했는데, 그리고 저희 두부도 좋아할 거에요. 그럼 사양말고 오시죠."
아라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집으로 끌어당겼다.
그렇다면... 염치 불구하고 얻어먹겠습니다.
7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