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플롯을 짜두긴 했는데, 내용이 첨가되다 보니 단편이란 말이 무색해질 것 같네요.
그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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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겁결에 아라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지만, 계단을 오르는 동안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만 26세의 인생에서 여자친구(였던 사람)의 집도 놀러가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묘한 긴장감에 사로잡힌 것은 이른 바 항마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결코 딴 마음을 품어서가 아니다.
어느덧 현관문에 다다랐는 지 아라가 도어락 커버를 슥 올리고 띡띡 비밀번호를 두드렸다.
도어락이 눌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안에서 강아지가 왈왈 짖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부구나.
띠리릭
이윽고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집 안에서 두부가 튀어나왔다.
몽실몽실 하얀 여우같은 두부를 보자마자 묘하게 안도감이 들면서 긴장이 풀렸다.
대뜸 받은 초대에 덜컥 따라왔지만, 아마 이 녀석 없이 단 둘이 밥을 먹었다면 엄청 어색했을 것 같았다.
"두부 들어가!"
"헥, 헥."
떨어진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을 텐데, 두부는 집사가 돌아온 것이 마냥 기쁘다는 듯이 헥헥거리며 뱅글뱅글 몸을 돌렸다.
약간의 흥분 상태인 지 두부는 아라의 지시도 무시하고 신나게 몸을 돌리다가 이내 아라와 내 주변을 기웃거렸다.
"두부 하우스!"
아라가 슬쩍 낮게 목소리를 깔고 외치자 그제야 두부가 촐싹대는 움직임을 멈추고 집으로 들어갔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오빠."
아라의 안내를 따라 집으로 들어서자, 향긋한 향초 냄새와 구수한 강아지 냄새가 함께 났다.
그런데 누추하지만, 이라니.
이런 오피스텔이 누추하다면, 내 자취방은 쌩 길바닥이나 다름 없었다.
원룸도 아니고 투룸, 거기에 크진 않지만 부엌과 거실도 별도로 딸려 있다.
거기에 내 미니냉장고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냉장고하며, 자취생의 집에 무려 TV와 쇼파도 있다.
이것이 재력차이 인가?
나는 간접적으로 자본주의 맛을 느끼며 쇼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아닌 척하고 싶은데 솔직히 부럽다. 젠장.
"깨끗하네. 잘 치우고 사는구나. 집 좋다."
슥슥 미니소파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깨끗한 오피스텔에 들어와 있으니, 이불도 제대로 안 개어놓은 내 자취방이 문득 더럽게 느껴졌다.
"헤헤, 그런가요? 어쨌거나 잠시만 기다리세요. 사실 두부 찾아주신 것도 제대로 사례 못 했는데, 오늘 요리로 대신 할게요."
"응 부탁할게. 혹시 화장실은 어디야? 손 좀 닦으려고."
"현관문 근처에 있는 문이요."
아라가 분주히 요리를 준비하는 사이, 나는 손을 닦고 나와 다시 소파에 몸을 맡겼다.
소파란 것이 이렇게 편안하면서 안락한 것 이었나?
추운 날씨에 밖에 있다가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오니 절로 심신이 노곤노곤해졌다.
거실에서 부엌 쪽을 바라보니 작은 식탁이 반쯤 요리 중인 아라를 가리고 있었다.
식탁 아래로 요리조리 아라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두부도 보였다.
능숙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요리를 곧 잘 해본 모양이다. 하긴 아라는 인상이 똑 부러지는 것이 뭘 해도 잘할 것 같은 이미지기는 하다.
강아지 찾는 것만 빼고...
그나저나... 재료 손질이라도 도울 게 있으면... 도와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겼다.
...
...
...
온통 사방이 컴컴해졌다. 내가 밖에 있는 데 밖이 어두운 것인지, 아니면 어두운 방 같은 곳에 갖혀있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묘하게 흐르는 공기가 느껴지는 걸 보면 밖인가 싶다가도 퀴퀴한 냄새가 나는 걸 보면 안 인가?
'끄응.'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에서 신음소리가 비집어져 나왔다.
뭐지? 씨발. 낯설게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는 것 같은 감각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두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시야가 어둡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끄어어억.'
버둥거릴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다. 또 다시 느끼는 무기력감에 잔뜩 불쾌감이 차올랐다.
이 것 역시 꿈이구나. 꿈이란 사실을 알았음에도 기분 나쁜 불쾌감이 가시질 않았다.
이번엔 공포심보단 오기가 차올라, 어거지로 한 쪽 눈꺼풀을 들어올려 실눈을 떴다.
주황 불빛이 시야를 가득 매웠다. 윽, 눈 부셔.
나는 인상을 다시 잔뜩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꿈이란 사실도 깨달았는데, 꿈에서 깨질 않으니 갑갑했다.
거기에 이 퀴퀴한 냄새, 괜히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퀴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릿한 냄새도 섞여있다.
미치겠군.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오기가 사라지자 다시 스멀스멀 공포가 밀려들었다.
그 다음에는 뭐라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밀어닥쳤다. 눈물이 쏟아 질 것 같았다.
그 때, 분명 눈을 감고 있음에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하얀 빛이 느껴졌다.
감은 두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그 빛이 나를 포근하게 감쌌다.
'아저씨, 꼭 나를 찾아와 줘요.'
은... 하윤?
그것은 분명 은하윤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내 세상이 무너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오빠...'
"세건 오빠!"
"헉!"
마치 강제로 꿈에서 쫓겨나 듯 마침내 깨어났다.
정신은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해 멍하고, 몽롱하다.
뭐였지?
"악몽이라도 꿨어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라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길래, 기절이라도 한 줄 알았어요."
아라가 안도했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괜찮아. 하하..."
멋쩍게 웃어보였지만, 사실 놀란 속이 아직도 진정되질 않고 있었다.
꿈이지만, 꿈에서 느꼈던 감정의 감각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마주하기 힘든 공포, 숨 막힐 듯한 갑갑함, 억지로 밀어닥치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까지.
그것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들렸던 하윤이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거기에서 갑자기 왜 하윤이가 나타난 까? 요 근래 내가 그 애를 너무 많이 생각했나?
그래서 무너질 것만 같은 마지막 순간에 네가 나타난 걸까.
속이 안 좋았다.
"안 괜찮아 보여요. 안색이 완전 파리한데..."
거울을 안 봐도 그럴 것 같았다.
"어쨌거나 밥 다 됐는데..."
보글보글 찌개끓는 소리와 고소한 볶음밥 냄새가 그제야 느껴졌다. 군침이 도는 맛있는 냄새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방금 전 꾸었던 꿈의 퀴퀴하고 비릿한 냄새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집까지 초대해주고, 열심히 요리한 사람 앞에서 실례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간신히 역한 속을 억누르고 입을 뗐다.
"아라야, 진짜 미안한데. 갑자기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그런데, 나중에 다시와도 괜찮을까?"
"아..."
순간 아라의 눈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하기사 열심히 손수 요리까지 했는데 입도 안 대고 간다니 저런 표정을 지을만 하다.
나는 쓴소리를 각오한 채 아라를 바라봤다. 짜증이나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뭔가를 먹을만 한 기분이 안 들었다. 만약 뭔갈 먹는다면 그 자리에서 속을 다 게워낼 것만 같았다.
"괜찮아요. 오히려 너무 몸이 안 좋아보여서 걱정이에요. 양이 조금 많긴 하지만 남겨뒀다 혼자 먹어도 되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오히려 괜찮다며 미소지어보이는 아라를 보니 맥이 탁 풀렸다. 이기적이지만, 차라리 화를 내주었다면 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정말 미안해. 다음에 내가 꼭 보답할게."
"네네."
"아르르르!"
미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괜찮다며 웃어보이는 아라와 아라 대신 원망을 쏟아내는 두부를 뒤로한 채
오피스텔을 뛰쳐나왔다.
밖은 어느덧 밤이라는 까만 이불이 하늘을 조금씩 덥고 있었다.
밤이 하늘을 온전히 감싸고, 수놓아진 달빛이 선명해지면 그 다음은 새벽이 찾아온다. 나는 그 새벽을 기다려야 한다.
후줄근한 자취방에 도착해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나를 서있게 만들었다.
새벽까지의 기다림이 엿가락 처럼 늘어지 듯 길어졌다.
좁은 방을 서성거리며, 손톱도 물어 뜯어보다가 이내 폰을 집어들었다.
- 아들?
채 몇 번의 통화음이 울리기도 전에 어머니가 의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초조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별 일 없죠?"
- 일는 무슨, 아들 왠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러게요. 하하."
- 아들 무슨 일 있어?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했다. 조금이나마 평소와 다른 아들의 상태를 단번에 간파해냈다.
괜한 걱정을 끼치기가 싫어, 어리광 부리고 싶은 충동을 구겨 넣고 태연하게 대답해다.
"일은 무슨. 그냥 전화해 봤어요."
- 이상하다. 우리 아들이 그냥 전화할 위인이 아닌데?
윽, 역시 어머니는 나를 너무 잘 안다.
"진짜에요. 하하. 아 그리고 면접은 잘 봤는데...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 오늘 있었던 면접 때문에 그래? 괜찮아, 아직 27살 애잖아. 좀 떨어지면 어때, 너네 아빠도 제 밥벌이하는 데 쉽지 않았다 얘.
애취급에 평소라면 으 하고 질색을 했겠지만, 오늘은 그 애취급이 유난히 마음을 달래주어 피식 웃고 말았다.
"다음에 또 전화 드릴게요."
- 그래~
어머니와 짧게 통화하고 나니 그나마 한층 진정된 마음으로 새벽을 기다릴 수 있었다.
도중에 12시가 넘어서는 자취방을 나가고 싶은 마음에 몸이 근질거렸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1시가 넘어서야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자취방을 나섰다.
오늘, 지금이라면 분명 하윤이를 만날 수 있다.
이윽고 편의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 익숙한 실루엣이 함께 시야에 들어왔다.
은하윤. 하윤이었다. 그녀는 지난 번 보다는 한결 나아진 낯빛으로 내 쪽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서로의 거리가 이내 몇 발자국 안으로 좁혀 졌을 때, 하윤이가 내게 말했다.
"아저씨, 안녕?"
"..."
꿈에서 들었던 하윤이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맑고, 따뜻한 목소리. 분명 같은 목소리였다.
묵묵부답에도 하윤이는 상관없다는 듯이 얘기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