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검호 이야기를 쓰는군요. 미야모토 무사시 이야기도 마무리를 짓지 못햇는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계속 미뤄두다간 언제 검호이야기를 다 쓸지 몰라 다시 키보드 앞에 앉게 되었네요. 이번에 쓸 글은 검호 집안인 야규 세키슈사이, 무네노리, 쥬베 야규 신카게류 삼대의 이야기입니다. 극적 재미를 위해 9할의 사실에 1할의 허구를 보태어 적었으니 그저 옛날 이야기를 읽는다 생각하시고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594년 5월 야마토의 호족 야규 무네요시는 5남 무네노리를 대동한 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합니다. 무네요시는 통칭 간베에라고 불리우는 다이묘 구로다 나가마사와 친분이 있었기에 그의 소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보는 앞에서 검술을 시연해 보이게 된 것이죠. 천하는 아직 도요토미의 것이고 도쿠가와는 굴복하는 모양새였으나, 수십 년 간 검술을 연마해온 달인의 통찰력은 곧 도쿠가와의 세상이 오리라고 간파했습니다. 오늘 이자리는 단순히 보면 검술 사범역 벼슬 자리를 얻기 위한 면접이었으나, 무네요시는 야규 일족의 흥망이 걸린 백년지대계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요한 자리인 만큼 어떤 다이묘들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은거하던 무네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만나기 위해 직접 노구를 이끌고 찾아온 것이죠.
형식적인 소개와 덕담이 몇마디 오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눈짓을 보내자 구로다 나가마사가 검술을 시연해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보통 이런 연무에는 목검을 쥐고 시연하기 마련인데 무네요시는 당장이라도 사람 몸뚱이를 두동강 내버릴 만큼 날이 시퍼렇게 선 진검을 뽑아 듭니다. 반면 무네요시를 상대할 5남 무네노리는 아직 앳됨이 남아있는 막 약관을 벗어난 젊은 나이임에도 양 손에 아무런 무기 없이 맨손으로 마주서고 있었죠. 아직 연무가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엔 충분했고, 과연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검술을 이어 받은 야규 신카게류의 검술은 어떤 것인가하고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무네요시가 "간다!"하고 기합을 지르자 무네노리가 자세를 잡습니다. 그리고 60세 노인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으로 달려들어 일검을 휘두르자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전에서 피를 보는게 아닌가 아연실색 해버리죠. 모두의 예상과 달리 피를 보는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아까전과 달라진 점은 무네요시는 칼이 없는 빈손이었고 정작 무네노리가 칼을 쥐고 잇었다는 것이죠. 보고도 믿겨지지 않을 놀라운 솜씨의 탈도법을 목격하자 좌중은 탄성을 지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연무를 끝내고 부복하여 엎드린 무네요시에게 시연해보인 검술이 무엇인지 물어봅니다.
"야규 신카게류 무토토리( 無刀取り) 라고 하옵니다."
이를 듣고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던 이에야스는 흡족한 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부채로 무릎을 탁 치고는 중얼거립니다.
"무토토리, 음... 무도라. 과연 천하인의 검이로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대로 필두인 명실상부한 2인자격인 대 다이묘라 하더라도 방금한 발언은 밖으로 새나갈 경우 역적이라 지목당해도 할 말이 없을 불경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이에야스의 천하인 발언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도쿠가와를 따르는 다이묘들, 그들은 한 마음으로 도쿠가와가 도요토미를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도쿠가와는 손에 천하를 거머쥐기를, 야규는 그런 도쿠가와를 지도하여 일본 제일의 검술 유파가 되겟다는 야망이 불타는 자리였죠.
이에야스는 그자리에서 야규 신카게류에 입문하겠다고 서명을 합니다. 사례 명목으로 무네요시에게 고쿠다카 200석을 내렸죠.이에야스는 무네요시에게 검술 사범역을 맡아달라고 제안했으나, 무네요시는 연로함을 이유로 거절하고 대신 5남 무네노리를 가신으로 사관시킵니다.
이제 무네요시, 무네노리 부자에게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무네요시는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으로 일하게 될 아들에게 야규 신카게류 인가목록을 건네줍니다. 이른바 유파 면허개전인데 이는 유파의 모든 검술에 통달하여 스스로 도장을 열어도 좋다는 일종의 자격증이었죠.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천하에 이름을 떨친 실력자 앞에서 무토토리를 성공시킨 무네노리에겐 야규 신카게류의 인가목록을 수여할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무토토리는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생전에 제자인 무네요시에게 완성시켜보라고 숙제를 내린 탈도법입니다. 간단히 말해 칼날잡기, 실제로는 조금 다르지만 맨손으로 적의 무기를 빼앗는 고난이도의 기술이죠. 노부츠나는 무도야 말로 진정한 검의 이치라 주장했기에 본인이 평생을 걸고 수련해온 검술의 이상향을 제자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무네요시는 스승의 기대에 보란듯이 부응하여 무토토리를 완성시키죠. 그리고 쟁쟁한 동문들을 제치고 신카게류 비전서를 받아 최고 수제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야규 무네요시는 어떻게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와 사제지간의 연을 맺고 신카게류를 수련하게 됐을까요. 시간은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무네요시가 30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야규 무네요시(柳生宗厳), 노년에 승려로 출가 후 세키슈사이(石舟斎) 란 호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죠. 그는 현 나라 지역인 야마토에 야규 일족의 영지 2천석을 다스리는 호족이었습니다. 당시 야마토는 무로마치 막부와 덴노가 있는 교토와 가까웠기에 매우 복잡한 정치구도를 갖고 있는 지역이었죠. 명목상으론 야마토의 다이묘인 츠츠이 준케이를 섬겼으나 직접 지배를 받는 가신은 아니었으며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계약관계인 중세 유럽의 봉신 같은 개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네요. 여하튼 츠츠이 준케이는 무로마치 막부를 쥐고 흔드는 배후 실력자인 미요시 나가요시와 마츠나가 하사히데와 경쟁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츠츠이 준케이의 배후에는 교토로 상경하여 미요시의 손에서 허수아비 쇼군을 빼앗아 옹립하려는 야심가 오다 노부나가가 있었죠.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구도에서 무네요시 같이 규모가 작은 호족은 살아남기 위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습니다. 때론 적이었던 마츠나가 하사히데에게 붙기도 하고 오다 노부나가 상경 후 츠츠이 준케이를 통해 오다의 영향 아래 들기도 했죠. 지조 없이 비겁하다 비난하는 이도 있겠지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건 하극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전국시대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줄타기가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어서 마츠나가 하사히데와의 전투에서 장남 요시카츠가 총탄을 맞아 불구가 되는 사고가 벌어졌고, 재능이 출중해 후계자로 점찍어뒀던 4남이 전사하고 마는 아픔을 겪었죠. 전국시대라는 난세를 살아남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와중에도 무네요시는 연습에 몰두하는 분야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검술이었죠.
야규 무네요시는 당시 기준으로도 괴짜였습니다. 단순히 검이나 창을 잘 다루면 출세한다는 현대의 인식과 다르게 아무리 무기술이 유용한 전국시대라고 하여도 검호 같은 병법자는 그저 일개 기예인에 불과했습니다. 양대 검성으로 추앙받는 츠카하라 보쿠덴과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를 후대한 검호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같은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검호들을 사무라이와 동격으로 대우하지 않았고, 휘하에 사관하여 출세하려면 공을 세웠다는 감장이나 인맥이나 가문의 후광을 받는 신분이 필요했죠. 특히나 전국 삼걸인 오다 노부나가는 검호들을 박대하여 방진으로 밀집된 창병들에 비하면 검술따윈 시대에 뒤쳐진 쓸모 없는 무술이라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세간의 인식이 어쨋건 무네요시는 인근에 거주하며 무예를 갈고 닦는 승려 호조인 인에이와 교류하며 서로 절차탁마하여 수련에 임하는데 매진했죠. 혹독한 수련의 나날을 보내며 실력이 늘어나자 무네요시의 자신감도 늘어났습니다. 훈련의 성과를 보여줄 먹잇감이 필요했죠. 그때 그런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다름 아닌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검술의 최고수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자신의 영지 근처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죠. 무네요시는 같이 수련하는 동안 절친해진 호죠인 인에이에게 이 사실을 얘기하고 같이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에게 도전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무술이라면 무네요시에게 뒤쳐지지 않을 만큼 흠뻑 빠져있던 인에이도 흔쾌히 승낙하죠.
혈기 넘치는 두명의 도전자가 찾아오고 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조카 히키타 분고로만 대동하고 야마토 인근을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노부츠나보다 조금 이전시기에 활약했던 츠카하라 보쿠덴이 여행길에 나서면 다이묘 부럽지 않을 만큼 많은 수의 일행을 대동하던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었죠. 허례허식이나 공명심과는 거리가 먼 성품이었던 노부츠나는 고매한 내면과 달리 일반인들이 보기엔 시골 농부나 다름 없는 수수한 행색이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를 따라잡은 야규 무네요시는 꿈에도 그리던 전설의 검성을 대면하고 실망감과 자신감을 얻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평범해 보이는 자라면 높디 높은 명성도 허명이었을 터이고, 자기 실력으로 검성을 때려 눕혀 그 명성을 채갈 것이라는 자신감이었죠.
인에이와 암묵적으로 합의한 무네요시는 먼저 노부츠나에게 시합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노부츠나는 묵묵부답. 조바심이 일은 무네요시가 연신 채근하자 조카 히키타 분고로와 대신 시합하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노부츠나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겨 발끈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히카타 분고로를 쓰러뜨려 다시 노부츠나에게 도전하면 제아무리 노회한 검성이라도 빠져나가지 못할 구실이 될 거라고 계산을 내린 것이죠. 무네요시는 고개를 끄덕여 제안을 받아들이고 히카타 분고로와 시합을 개시합니다.
목검을 쥐고 히키타 분고로와 마주선 무네요시는 상대의 무기가 난생 처음 보는 거란 사실에 적잖이 놀랍니다. 그 무기는 쪼갠 대나무를 가죽으로 둘러싼 것으로 아무리 봐도 살상력은 거의 없는 장난감 같은 무기였죠. 그 죽도는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고안한 후쿠로 시나이로 문하생들이 대련 도중 부상을 입거나 죽는 불상사를 방지하려고 만든 수련용 무기였습니다. 신성한 결투의 장소에 장난감 따위를 들고 나섰다는 사실에 무네요시는 또 한 번 분노합니다. 무네요시가 투지를 불태우는 동안 히카타 분고로는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차분했지요. 무네요시가 자세를 잡고 성난 격검을 휘두르려고 하는 찰나 불현듯 벙어리처럼 침묵하던 히카타가 쏘아내듯 외칩니다.
"손목을 친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히키타 분고로는 무네요시가 반응하기도 전에 간격안으로 들어와 정확하게 후쿠로 시나이로 손목을 가격합니다. 무네요시는 목검을 놓치고 낭패한 표정을 지었죠. 심판을 보던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승패에 관해 가타부타 말이 없습니다. 히카타 분고로는 다시 준엄한 목소리로 무네요시에게 목검을 주으라고 말하죠. 무네요시는 자신이 방심했을 뿐 실력으로 패배한게 아니라고 다시 전의를 불태웁니다. 이번에야 말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독한 마음을 품는데 히키타는 아까처럼 또 공격하기 전에 어디를 칠 것인지 알려줍니다.
"머리를 친다!"
따악하는 소리와 함께 후쿠로 시나이가 무네요시의 머리를 가격합니다. 충격을 받아 머리가 핑핑 돌아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어떻게 벌어진 일인지 파악하려고 최대한 애를 썼으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히키타의 검에 어째서 당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무네요시는 자신이 상대를 깔봣음을 인정하고 설령 상대의 실력이 더 뛰어나 시합에서 지더라도, 어디를 공격할 지 미리 알려주고서도 검을 적중시키는 히키타의 마법 같은 검술의 비밀을 알아낼 작정으로 다시 덤볐습니다. 그러나 무네요시의 결연한 각오에도 불구하고 시합은 히카타 분고로가 일방적으로 가격하는 상황으로 흘러갑니다. 말이 시합이지 이건 어른이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광경과 다를 바가 없었고, 하늘 아래 영걸은 자신 밖에 없다고 자만하던 무네요시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줍니다. 새파래진 안색으로 이를 보고 있던 호조인 인에이도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죠.
일방적으로 얻어맞던 야규 무네요시는 쏟아지는 죽도 세례질을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에 대자로 드러 눕습니다. 퉁퉁 부어올라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올려다보니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쳐맞기만 한 자신은 숨을 헐떡이는데 히키타 분고로는 마치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마냥 숨 한 번 흐트러진 기색이 보이지 않앗죠. 완패, 문자 그대로 야규 무네요시는 히카타 분고로에게 완벽하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천하에 이름난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를 쓰러뜨리고 최강이 되겠다고 야망을 불태웠는데 노부츠나는 커녕 조카 히키타 분고로에게 어린아이 취급을 당했으니 그 부끄러움을 이겨내기 힘들었죠. 무네요시는 수치심에 가득차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에게 엎그려 절하며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런 무네요시를 늙은 검성은 자애로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비록 아직은 어설프나 무예에 뜨거운 열정을 품은 무네요시의 기개를 높이사 문하에 받아들이죠. 이것이 젊은 시절의 야규 무네요시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친구 인에이와 함께 신카게류에 입문한 무네요시는 노부츠나를 자신의 영지에 머물어 줄 것을 간청하고 검술을 배우게 됩니다. 처음에는 노부츠나가 직접 가르쳐주지 않고 히카타 분고로에게 배우게 하였는데, 무네요시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겸허하게 히카타의 지도를 받아들입니다. 독학으로 검술을 수련하여 가다듬어 지지 않았을 뿐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났던 무네요시는 물먹은 솜마냥 신카게류의 검술 이치를 빨아들이며 빠른 시간 내에 성장합니다. 이윽고 패배를 안겨줬던 히카타에게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검술 실력을 얻게 되자 노부츠나는 직접 검술을 지도하면서 앞서 설명했던 검술의 최고 경지라 믿는 무도의 기술을 완성해오라고 숙제를 내려줍니다. 무네요시는 무토토리를 개발하여 스승이 내린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죠. 이에 노부츠나는 무네요시를 최고 수제자라 인정하며 신카게류의 모든 극의가 담긴 비전서를 내어 줍니다. 무네요시는 스승의 은혜에 크게 감사하며 비전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사후 독자적인 유파를 창설하죠. 그것이 바로 장래 쇼군의 검술이라 일컬어지는 야규 신카게류 탄생의 순간이었습니다.
히키타 신카게류, 호조인류 창술, 타이샤류 등 노부츠나의 제자들이 만든 신카게류 분파는 많았으나 무네요시는 야규 신카게류야 말로 검성의 정통을 이어받은 진정한 신카게류의 후계자라고 자부했습니다.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지금 야규 무네요시야 말로 천하무쌍의 검호라고 자부할만한 실력을 지녔으나, 그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죠. 세월은 무상하게 흘러갑니다. 무로마치 막부도 망하고, 천하포무를 떨치던 오다 노부나가도 혼노지의 변으로 사라집니다. 야심을 가진 전국군웅들이 하나 둘 정리 되어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가 찾아오죠.
정권을 잡은 히데요시는 우선 정적인 오다의 가신들 부터 제거해야했습니다. 일본 전국의 토지를 다시 측량하고 마을 단위로 정리하는 정책 태합검지를 실시하죠. 토지측량의 명분으로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오다의 구 가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심산이었습니다. 히데요시가 처리할 대상에는 야규 무네요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친 오다파였던 야규 일족도 히데요시에겐 눈엣가시로 보였던 것이죠. 결국 태합검지 실지로 무네요시는 모든 영지를 빼앗기고 낭인 신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죠.
그러나 연륜이 넘치는 대검호는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영지는 잃었으나 자기는 여전히 야규일족의 수장이었고 천하제일 검술 유파의 당주라는 명성이 있었기에 휘하에 따르던 가신들도 떠나지 않았죠. 무네요시의 호 세키슈사이처럼 풍랑에 가라앉지 않는 돌배 같은 우직함으로 인내하며 야규 일족과 신카게류가 야망을 떨칠 새로운 시대를 기다렸습니다. 긴 인고의 시간 끝에 도쿠가와라는 새로운 파트너를 찾게 된 것이죠. 무네요시는 도쿠가와가 천하를 잡게 되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도쿠가와 가문의 검술 사범역을 따내고 말았죠.
다시 이야기는 현재로 돌아와 야규 무네요시는 아들 무네노리에게 내민 인가 목록을 내려다 보며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직감했습니다. 스승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그랬듯이 본인도 다음 세대에 모든 것을 맡기고 퇴장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야규 무네노리, 자신의 다섯번째 아들이며 무네요시 못지 않은, 아니 아버지의 기량을 훌쩍 뛰어넘는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아이. 장남 요시아키가 불구가 되어 폐적당하고, 둘째, 셋째 아들은 재능이 미천하여 중으로 출가를 시켰고, 재능있던 넷째 아들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늘께선 야규 일족을 버리지 않으셨는 지 재능이 넘쳐흐르는 후계자를 안겨주었죠. 성품, 실력, 재능 무엇하나 부족한 곳이 없는 천재였습니다. 오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보는 앞에서 무토토리를 완벽하게 선 보인게 바로 그 증거였죠. 무네요시가 장년에 이르러 간신히 완성시킨 그 기술을 어린 아들은 약관의 나이가 되기전에 터득했습니다. 이런 천재적인 재능이라 할 지라도 재능만으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가 있었죠. 무네요시는 아들에게 당주를 맡기고 은퇴하기전에 그 최후의 기술을 가르쳐주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무토토리를 터득한 시점에서 너는 야규 신카게류를 완성했다 할 수 있으리라. 허나 진정한 신카게류의 극치는 알지 못함이니..."
무네요시는 칼을 뽑고 일어섰습니다.
"뽑아라. 이것이 마지막 가르침이다."
무네노리는 하늘 같이 존경하던 부친에게 감히 검을 겨눌 수 없어 주저하다가, 아버지의 결연한 눈빛에서 진심을 느끼고 비장한 심정으로 검을 빼어 듭니다. 훌륭하다, 무네노리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다가 돌변하여 불호령을 내지릅니다.
"어디로 오겠느냐? 옳거니 가운데로 오겠구나. 오라!"
무네요시가 호통을 치며 도발을 했지만 무네노리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그저 검을 들고 자세를 잡고 있을 뿐인데 도통 빈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 틈은 보였으나 그것은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는 함정이었죠. 무네요시가 말한대로 가운데만 허점이 드러나 보였습니다.
무네노리는 아버지의 노림수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여지껏 수련해온 야규 신카게류의 모든 기술과 본인의 역략을 총동원하여 형세를 역전시킬 반전을 노려봣으나 보법으로 간격을 파고들면 어느새 무네요시가 움직였는지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있었고, 자세를 달리 잡아보면 거기에 맞춰 무네요시의 카타도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범의 아가리에 들어간 상황!
무네노리는 큭하고 깊은 신음을 내며 어쩔 수 없이 무네요시가 예고한 정가운데를 공격해 들어갑니다. 아버지의 실력을 뛰어넘지 못하고 유도하는데로 끌려가는 패배감과, 보란듯이 파해해주겟다는 호승심이 뒤섞인 모순적인 감정을 품고서 말이죠. 허나 무네요시는 정가운데로 찔러오는 아들의 검을 가볍게 피하고는 칼자루로 손목을 내리 찍습니다. 무네노리가 칼을 놓치고 손목을 부여잡고 있자 무네요시는 냉엄하게 다시 말합니다.
"검을 주워라. 그리고 다시 오라."
무네노리는 입술을 피가 나올정도로 깨물며 검을 잡습니다. 그런 아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네요시는 미소로 도발하며 이젠 어디로 오겠냐고 물어봅니다. 이번엔 머리냐? 아니면 손목? 원하는대로 오라며 자신만만해 하지만 무네노리는 60이넘은 아버지의 검술에 문자그대로 농락당하고 맙니다. 수십 년 전 젊은 야규 무네요시가 히키타 분고로에게 도전하여 시합하던 상황과 흡사한 장면이 다시 연출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와 다른 점은 히키타 분고로가 공격을 예고하고 적중시켰다면, 지금의 무네요시는 상대의 공격을 예고하고 그대로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면서 모든 공격을 파훼하는 완벽한 방어술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지요.
무네노리는 몇 번이나 아버지에게 어린아이처럼 농락당하고 난 후 바닥에 엎드로 손을 얹고는 졌습니다라고 패배를 시인합니다. 젊은 무네노리는 온 몸에 구슬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지만 노인인 무네요시는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했죠.무네노리가 어떤 기술인지 물어오자 무네요시는 껄껄 웃으면서 칼을 칼집에 집어 넣습니다.
"신카게류 오의 마로바시(轉)!"
마로바시는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말년에 터득한 검술의 이치로 돌아가는 물레바퀴의 움직임을 보고 어떤 상황, 어디에 들어오는 공격이라도 위기에 처하지 않고 몸을 지킬 수 있는 호신의 극에 달한 기술입니다. 마로바시를 익힌 신카게류의 검사는 오직 천하에 단 두명 스승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와 야규 무네요시 뿐이었죠. 무네요시 본인도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 끝에 말년에 이르러 스승이 도달했던 경지를 따라잡은 것입니다. 무네요시는 방금 전 엄격했던 시선도 어디 간 듯 자상한 아버지의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일으켜 세워줍니다.
"스승께서는 이리 말하셨느니. 진정한 검의 이치는 천지와 하나되는 봄바람과 같다고. 너도 당장은 어렵겠지만 부단히 노력한다면 언젠가 깨우칠 수 있을터."
무네요시는 아들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봅니다. 어린아이만 같았던 아들은 어느새 장성하여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될 도쿠가와의 검술 사범이 되었습니다. 무네요시는 감개무량해져서 아들의 양 어깨를 얼싸 안았습니다.
" 이제부터는 너의 시대다. 천하에 야규의 검명을 떨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