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의 학자 홍매(洪邁, 1123~1202)의 《용재수필》(容齋隨筆)은 시대의 명저 중 하나로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 '모두가 심중에 터득한 바가 있으면 그때마다 바로 기록한 것인데, 분석과 입증이 상당히 정확하다.'고 적혀 있으며 '효종(孝宗, 재위 1162~1189)은 이 책에 논의할 만한 내용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홍매는 이 일로 인해 속필, 삼필, 사필, 오필 등을 거듭 편찬하였다.'라고 할 정도로 잘 알려진 고전 서책 가운데 하나 입니다. 이중에서 첫 편인 일필과 속필인 2필은 각각 짓는데 18년, 13년이 들었다고 할 정도로 뒷권 보다 정성을 들였다고 하지요.
이 책은 홍매가 독서하며 얻은 지식과 심득(心得)을 정리해 집대성한 것으로 역사, 문학, 철학, 정치 등 여러 분야의 고증과 평론을 엮은 학술 필기입니다. 흔히 에세이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수필'이라는 용어를 제일 처음 사용한 용례가 바로 《용재수필》입니다. 즉, 이 책은 동양 수필의 원조 격 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용재수필》 은 오늘날의 수필과는 좀 다른데요. 이 책은 경전과 역사, 문학 작품에 대한 고증과 의론 및 전인(前人)의 오류에 대한 교정이 주를 이루는 홍매의 40년간에 걸친 독서와 공부의 기록입니다. 즉, 용재수필은 오늘날의 에세이 성격도 있지만 그보단 개인이 쓴 역사서 및 경전과 문학비평서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인용된 사서와 문집이 총 250종에 달하는데, 실제로 경학 및 문자학, 언어학, 역사, 제자백가, 고고학, 전장 제도, 천문과 지리, 역법과 음악, 문화와 풍속, 점술과 의학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내용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학문 영역을 아우르는 박학과 탁월한 식견, 정확한 고증과 논리로 '남송 필기 중 최고 작품'이라 인정받는 서적으로 오늘날 한국에서도 순천향대학교 주도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글에서 다룰 얘기는 이 서적의 두번째 책인 속필에 기록된 마지막이 좋지 않았던 명장 네 명의 이야기입니다. 각각 촉한의 장군 관우(關羽), 서위의 장군 왕사정(王思政), 동위의 장군 모용소종(慕容紹宗), 남조 진(陳)나라의 장군 오명철(吳明徹)인데요. 홍매는 이 네 사람을 비교하면서 이들의 과가 판에 박은듯 같다(此四人之過,如出一轍。)고 언급합니다. 그는 '명장의 만무(名將晚謬, 명장 말년의 오점)'이라는 글에서 '자고로 위명이 있는 장수로서 세상을 덮는 공을 세웠으나 뒤늦은 오점으로 이기지 못하고 말로를 맞으며, (이들이) 많은것을 잃는 것은 특별한 공과 재능을 자랑하나 적을 경시하기 때문이다.(自古威名之將,立蓋世之勳,而晚謬不克終者,多失於恃功矜能而輕敵也。)'라고 평가하며 이 네 사람의 예를 들었습니다. 한번 홍매가 평가한 네 사람의 예를 살펴보도록 하죠.
첫번째 사례는 바로 관우의 사례입니다.
관우는 원소의 두 장수인 안량과 문추를 수많은 군중 가운데서 손수 죽였다. 조인의 번성을 공격하고 우금 등의 칠군이 다 물에 빠져 관우는 화하에 위세를 떨쳤고 조조는 그 예봉을 피하여 허도에서 도읍을 옮길것을 의논하여 그 공명이 성대하였다. 그러나 여몽과 육손의 속임수를 눈치채지 못하고 마침내 손권의 계략에 빠져 부자(관우, 관평)가 사로잡혀 이로써 대사가 무너졌다.(關羽手殺袁紹二將顏良、文醜於萬眾之中。及攻曹仁於樊,於禁等七軍皆沒,羽威震華夏,曹操議徙許都以避其銳,其功名盛矣。而不悟呂蒙、陸遜之詐,竟墮孫權計中,父子成禽,以敗大事。)
이 역사 평론은 흔히 연의에 나오는 관우가 안량과 문추를 베었다는 장면의 실제 역사적 근거입니다. 정사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는 관우가 안량만 베었다고 나오지만 홍매는 여기에 문추까지 관우가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손수 베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는 삼국지평화와 연의에 인용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명, 청 시대에 나온 역사서 들이나 지리지에 인용된 관우가 안량, 문추를 벤 이야기는 이상하게 홍매의 용재수필은 인용하지 않고 후세에 연의에 의거해 의탁 되었다고 여겨지는 관우의 편지를 인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그만큼 연의가 역사서와 혼동될 만큼 유명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굳이 부연 설명할 것 없이 이 이야기는 관우가 육손을 경시하고 손권이 세운 계략인 내부의 적인 미방과의 내통을 눈치채지 못해 무너지고 만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다음은 서위의 장수 왕사정(王思政)의 예입니다. 이 장수는 원래 동탁을 죽인 한나라 사도 왕윤의 후예로 북위의 명장 이었으나 북위의 마지막 황제 효무제를 따라 서위의 실권자 우문태(507~556)에게 귀부하여 그의 장수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럼 홍매는 이 사람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서위의 왕사정은 옥벽(玉壁)을 진수 했는데, 고환은 진영을 연이어 사십 리에 두고 그를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추위에 떨며 물러갔다. 사정이 형주로 이동할 때에, 위효관이 이를 대신하게 천거 했는데, 고환이 산동 군중을 들어 공격하여, 모두 오십 일이 되었으나, 다시 실패하고 귀환했으니 모두 사정의 공이다.(西魏王思政鎮守玉壁,高歡連營四十里攻圍之,飢凍而退。及思政徙荊州,舉韋孝寬代己,歡舉山東之眾來攻,凡五十日,復以敗歸,皆思政功也。)
옥벽을 막은 것은 보통 고환의 사망 때문에 위효관의 공으로 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그 배경에는 왕사정의 공도 있었던 것입니다. 왕사정은 망산 전투에서 패한 서위의 군사를 쫒는 동위의 추격병을 막기 위해 항농성의 성문을 열고 문루에서 옷을 벗어 공성계를 실시해 동위 군사들을 후퇴시킨 일화만 있는게 아니라 위효관 이전에 요충지 옥벽을 진수하며 고환을 막아냈던 공도 있었던 것이죠. 이 이야기는 북사에도 나오는데 왕사정이 고환을 막을 때는 542년이고 위효관이 고환을 막은 것은 546년의 일입니다. 또한 북사 왕사정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사정은 옥벽의 땅이 험요지 이므로 성을 쌓기를 청하였다. 즉시 자기 영을 쳐서 진을 옮겼다. 분진병 삼주의 여러 군사의 일을 관장하였고 병주자사가 되었으며 행대(行臺)의 일은 전과 같이 하도록 하고, 그대로 옥벽에 진수하도록 했다. (대통) 8년(542년) 동위가 다시 침략해 왔으나 마침내 능히 이길수 없었고 이로서 성을 온전히 지키는 공로가 있어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를 제수받았다. (중략) 사정의 거취가 옥벽에 있을때, 주문제(우문태)는 (왕사정을) 대신할 사람을 천거하기를 명하니 사정은 이에 부도독 위효관을 올렸다. 그 후 동위에서 침공해 왔고, 효관은 마침내 능히 성을 온전케 하였으니, 시론에서는 그(왕사정)를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칭하였다.(思政以玉壁地險要,請築城。即自營度,移鎮之。管汾晉并三州諸軍事、并州刺史、行臺如故,仍鎮玉壁。八年,東魏復來寇,卒不能克。以全城功,授驃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 思政之去玉壁也,周文命舉代人,王思政乃進所韋孝寬。其後東魏來寇,孝寬卒能全城,時論稱其知人。)
왕사정은 옥벽의 성을 쌓았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임지를 바꿀 때 그를 대신할 사람으로 위효관을 천거 했던 겁니다. 홍매가 괜히 '옥벽을 지키는 공이 모두 왕사정의 공이다'라고 한 것이 아니었던 거죠. 그만큼 왕사정은 요지를 잘 알아보고 사람을 능히 쓸 줄 아는 통찰력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쩌다 관우와 비견 될 정도로 말년이 험하게 되었을까요? 홍매의 얘기를 좀 더 살펴 보도록 하죠.
그 후 장사(長社, 삼국지로 치면 영천군 장사현으로 종요의 고향입니다.)를 행대 치소로 삼아 최유(崔猷)에게 서신을 전하였는데, 최유가 말하길 "오늘날 수도를 둘러싼 군사 요충지인 양성은 상황이 변하면 서로 호응하기 쉽습니다. 영천은 적지에 인접해 있어 방어할 산천이 없으니 양성에 병력을 주둔하는 것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좋은 장군을 보내어 영천을 지키게 하면, 겉과 속이 다 튼튼해질 것이니 인심이 편안해지고 비록 생각하지 못했던 재앙이 있더라도 어찌 족히 걱정이 있겠습니까?" 우문태는 최유의 계책을 쫒아 명을 내리고 왕사정이 굳이 청하는대로 또한 약조했는데 적이 수공을 하면 1년, 육지로 공격하면 3년 내에는 조정이 번거롭게 구원하도록 나아가지 않게 했다. 그 후 고징에게 함락되어 (왕사정은) 포로가 되었다.(其後欲以長社為行台治所,致書於崔猷,猷曰:「襄城控帶京洛,當今要地,如其動靜,易相應接。穎川鄰寇境,又無山川之固,莫若頓兵襄城,而遣良將守穎川,則表裏俱固,人心易安,縱有不虞,豈足為患。」文泰令依猷策,思政固請,且約,賊水攻期年、陸攻三年之內,朝廷不煩赴救。已而陷於高澄,身為俘虜。)
그러니까 왕사정은 처음에는 양성에 군대를 주둔시켰다가, 영천(英川)을 행대치소로 삼으려고 위중(魏仲)을 파견하여 보고를 하고, 최유(崔猷)에게 이전 의사를 설명하는 편지를 썼던 겁니다. 왕사정(王思政)은 또 영천으로 가면서 아뢰길 동위가 수로로 진격할 경우 1년을 지켜 달라고 요청하고 육로로 진격할 경우 3년을 기한으로 하는 조정과의 약조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 기간 중에는 조정의 원군 파견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며 시한을 넘기면 그때 가서야 조정이 판결한다고 해버렸죠. 이에 우문태는 왕사정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거듭거듭 단호하게 요청하자 동의하여 547년에 왕사정은 영천에 주둔합니다만 다음해 4월에 동위의 장수 모용소종에게 포위당하여 퇴로마저 끊긴 상황이 되었고 영천은 오랫동안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마침내 유수의 둑을 무너뜨려 성으로 흘려보낸 모용소종의 수공으로 단박에 함락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왕사정은 스스로 사지로 들어가 버린 셈이고 지원군을 요청했던 관우와 달리 적을 경시해 구원군도 몇년간 안 보내줘도 상관없다고 하다가 자승자박 해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자 왕사정은 돌과 화살을 무릅쓰고 솥을 매달아 취사하는 등 장병들과 고락을 함께했습니다. 그제서야 우문태가 급히 대규모 지원군을 파견했으나 이들 모두 유수가 범람하는 바람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우문태는 왕사정의 청을 들어준 것을 크게 후회하였죠. 이렇게 549년 6월에 영천이 함락되어 포로가 되어 버린 왕사정은 동위가 망하고 고씨의 북제가 세워지자 도관상서, 의동삼사가 되기까지 하니 관우와 달리 절의까지 잃어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동위의 장수 모용소종(慕容紹宗)입니다. 전, 후연의 왕족 모용 씨의 후예로 고환이 사망할 때 그 뒤를 맡긴 명장이었으며 앞서 말한 왕사정을 수장시킨 인물인데, 홍매의 평가는 짧지만 굵습니다.
모용소종이 후경을 꺾자 당시의 장수들은 모두 (모용소종의 능력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영천을 포위 공격하던 도중에 나아가고 빠질 때를 알지 못하여 물에 뛰어들어서 죽어버렸다.(慕容紹宗挫敗侯景,一時將帥皆莫及,而攻圍穎川,不知進退,赴水而死。)
예, 위에 나온 것과 같이 모용소종은 다 이겨 놓고 범람한 유수에서 그만 익사합니다. 영천이 막 함락되려고 할 즈음 모용소종은 연이어 악몽을 꾼 까닭에 유풍생 및 모용영진과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마음을 안정 시키는 한편 영천성 일대를 둘러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병사들에게 명해 성을 내려다보며 화살을 난사케 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 거대한 누선이 단번에 성벽 있는 쪽으로 밀려갔습니다. 그러자 서위의 병사들이 긴 갈고리를 이용해 배를 끌어당기면서 화살을 마구 쏘며 공격했고 모용소종은 급한 나머지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수영이 서투른 그는 탁류 속에 모습을 감췄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49세였고 굳이 적진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는데도 홀로 적진을 공격하려 가다가 어처구니 없이 죽어버린 셈이 되었죠. 유풍생은 간신히 헤엄쳐 토산에 올랐으나 그 역시 화살 비를 맞고 살해 당했고, 모용영진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성을 지키던 서위의 대장 왕사정을 비롯한 동위의 장수들은 모두 북위 때 모용영진과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사정이 모용영진에게 말했습니다.
"이 성이 무너지는 것은 경각에 달렸다. 나는 실로 경을 죽이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신하로서 목숨을 다해 지켜야만 한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모용영진을 참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어 모용소종과 유풍생의 시신을 수습해 함께 매장해주었습니다. 동위의 실권자 고징(高澄, 521-549)은 모용소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11만 대군을 이끌고 공성에 나섰습니다. 영천은 함락되었고 8천여 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고 왕사정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고징도 그의 충성을 높이 사 예로써 대했습니다만 앞서 말한대로 왕사정은 북제에서 벼슬을 받고 우문태에 대한 절의를 잃었습니다.
그러니까 홍매가 하고자 하는 말은 짧지만 굵은 겁니다. '아니 왜 진격하고 퇴각할 때도 제대로 안 잡고, 굳이 할 필요도 없는 위험한 짓을 대체 왜 한거야?' 아마 여러분도 동의하실 거라 믿습니다. 모용소종은 용력도 있고 지모도 있었습니다. 용모 또한 뛰어났습니다. 이처럼 탁월한 장수가 다 이겨 놓고 굳이 할 필요도 없었던 공성 과정에서 탁류에 휩쓸려 죽는 식으로 허망한 죽음을 당하고 동료 장수들까지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역대 전쟁사에서 매우 드문 일에 속합니다. 이것 역시 다 이겼다고 적을 경시하다가 벌어진 사태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은 남조 진(陳)나라의 장수 오명철의 이야기입니다. 오명철은 왕사정이나 모용소종보다는 한 세대 뒤의 장수로서 그의 부하이자 역시 명장이었던 소마하(蕭摩訶, 또는 소마가라고도 합니다)와 함께 남북조시대의 마지막 명장으로 꼽히는 장군입니다. 하지만 앞선 세 사람의 사례처럼 이 사람도 마지막이 그리 좋지는 못했습니다. 홍매의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오명철은 진나라가 쇠락한 후에 고씨 제나라(북제) 상대로 북벌을 단행했고, 장략을 가진 인재였으며, 공경의 으뜸으로 세워졌고, 사령관으로 있을 때는 그 앞에 견고한 성이 없었으며(한 마디로 성을 쉽게 함락했다는 뜻), 수 개월 사이에 (장)강 북쪽의 토지가 (진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팽성(彭城)을 공격하다 (주나라 장군) 왕궤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고, (왕궤는) 귀환할 길을 막으려 했다. 소마하가 공격을 요청하자, 오명철은 듣지 않았다. 그가 말하길 "깃발을 받들어 진을 함락시키는게 장군이 할 일이고, 길게 본 계산과 멀리보는 전략은 이 노부의 일이오" (그러다가) 일순(열흘) 사이에 수로가 마침내 끊어졌다. 소마하는 또 몰래 군대를 잠입하게 하여 포위망을 뚫기를 청했으나, 다시 허락하지 않아, 마침내 주나라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장병 3만 명이 모두 죽었다.(吳明徹當陳國衰削之餘,北伐高齊,將略人才,公卿以為舉首,師之所至,前無堅城,數月之間,盡復江北之地。然其後攻周彭城,為王軌所困,慾遏歸路。蕭摩河請擊之,明徹不聽,曰:「奉旗陷陳,將軍事也,長算遠略,老夫事也。」一旬之間,水路遂斷。摩河又請潛軍突圍,復不許,遂為周人所執,將士三萬皆沒焉。)
홍매가 말하는 오명철의 사례는 578년에 진욱이 오명철에게 30,000명을 이끌고 수양에서 사수를 건너 북주의 팽성을 포위하게 했으나, 북주 군대에게 전멸되고 오명철도 포로가 되고야 만 사건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명철의 사례는 앞선 세 사람의 예에 비하면 참작의 여지가 조금은 있습니다. 왜냐면 남사 오명철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는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킨 때로 수로가 끊어질 당시 오명철은 등 뒤에 질병을 앓고 있어서 매우 위독한 상태로 제대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당장 전쟁터에서 병이 날 정도로 쇠약해진 사람을 억지로 전쟁터에 내보낸 진나라 선제 진욱의 판단 역시 잘못된 것이었던 거죠.
진서 소마하 전에 따르면 처음에 적이 물길을 막으려 하는데 아직 물길이 잠긴 것은 아니니 빨리 가서 적을 격파하고 퇴로를 확보하자고 한 소마하의 말을 듣지 않고 고립을 자처한 건 오명철의 잘못이 맞습니다. 소마하가 대놓고 실색하고 물러났다고 할 정도의 판단 미스였지요. 이렇게 수로가 끊기자 소마하는 잠복한 군사로 다시 포위망을 뚫자고 제안했습니다. '공(오명철)이 통솔하는 보병을 말에 태워 서행하게 하고 자신이 철기 수 천을 통솔해 전후로 말을 몰아 멀리 달려가면 반드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요.
오명철이 이를 거부한 이유는 전략을 짤 일은 자신의 일이라며 소마하의 진언을 거절한 것이 부끄러운 데다가 또 진나라 군대에는 보병이 많으며 자신은 총 사령관이니 반드시 그 뒤에서 있으면서 함께 나아가야 하며 말에 탄 군대는 속히 전진해야지 천천히 가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결국 참군하고 있던 장수인 배자열의 말대로 소마하는 먼저 기병을 앞세우고 탈출했고 불과 80여기만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오명철은 둑을 터뜨려 물길을 따라 탈출을 감행합니다만 물의 기세가 줄어들면서 사로잡혔고 근심으로 병에 걸려 북주의 수도 장안에서 죽었습니다. 퇴로가 끊겼을 때 소마하의 말을 따랐다고 3만 명의 군세가 무사했을지는 의문 입니다만, 처음부터 북주군이 물길을 막으려 한다고 소마하가 보고했을때 '전략을 짤 사람은 나니까 너는 진을 함락 시키기나 하라'고 적을 경시하고 보고를 내친 오명철의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홍매가 말한 명장들의 사례는 아무리 명장이라도 적을 경시하면 말로가 좋지 않다는 경계의 말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분명 경계하고 있었긴 했지만 일단 오나라는 동맹이었기도 했고, 설마하니 손권이 아군인 미방과 손을 잡고 뒷치기 할 지는 알지 못했던 관우의 사례가 그나마 여기서 좀 나은 편으로 보이고, 아군에게 불리하고 적군에게 유리한 사지로 들어가는 걸 알면서도 굳이 들어간 왕사정의 사례가 그 다음이며, 적군에게 퇴로가 막히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도 무시한 오명철의 사례가 그 다음이라 봅니다, 그리고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사례는 나쁜 꿈을 꿨다고 굳이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적진을 한번 돌아보려다가 익사한 모용소종의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고징이 바로 대군을 이끌고 성을 함락시켰고 성을 수비하던 서위군이 약해져서 망정이지 수뇌부를 어처구니 없는 행동으로 순식간에 증발시킨 행위는 경솔했다고 밖엔 볼 수 없다고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