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새벽, 바람이 범상치 않게 차갑더라니 하룻밤 새 겨울이 더욱 깊어졌다.
우는 아이 눈물도 꽁꽁 얼게 만들 동장군이 무심히도 찾아왔고, 한파주의보가 떨어졌다.
창틀이나, 지붕 뿐만 아니라 주차된 차들 아래에도 고드름이 얼얼하게 박혀 보기만 해도 서늘한 풍경을 연출했다.
워낙 추운 날씨에 잠자리가 편하지 않아 온 몸이 찌뿌둥했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억지로 눈을 뜬 나는 크게 기지개를 한 번 펴고 일어나 베란다 창을 열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니, 따갑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에 가득 차 그나마 정신은 맑게 깨웠다.
정신이 맑아지니 그 덕에 지난 새벽 있었던 일들이 더욱 또렷하게 떠올랐다.
'언제든 괜찮아. 기다릴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했을까 싶었지만,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은 말을 했을 것 같다.
'정말이에요? 나 기다릴게요?'
'응.'
사실 너는 모르겠지만,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고 대답하려다 말았다. 대신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대답에 하윤이의 눈가가 그렁그렁 해졌다.
이게 그렇게 감동적인 말이었나 싶었지만, 이어지는 하윤이의 말에 나는 그 반응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눈물로 호소할 생각은 없었는데... 누군가가 절 기다린다는 게 처음이거든요. 시간 감각이 없어서 얼마나 오래되었는 지 모르겠지만,
아마 몇 년은 훌쩍 넘어버린 것 같아요. 혼자서 걷고, 혼자서 어둠 속에 있었던 게.'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가슴 한 켠이 철렁했었다. 만약 내가 하윤이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내 정신은 진작에 무너져내려 착실히 미쳐갔을 것 이다.
나로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그 아득한 외로움과 고독함을 하윤이는 혼자 버텨온 것이다.
그제야 나를 만날 떄마다 미소지으며 반겼던 하윤이가 왜 그랬는 지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제 말을 듣지 못했어요. 살짝 건드려봐도 다들 아무 반응도 없었구요. 그나마 길 잃은 강아지나 고양이가 저를 알아봐 주지 않았다면,
전 진작에 미쳐버렸을 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였구나, 두부를 찾아주었을 때 그렇게 기뻐했었던 이유가.
'지금까지 저를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아저씨가 유일해요.'
유령이라니 살짝 혼란스러웠지만,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아라에게서 단 한 번도 하윤이에 대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함께 강아지를 구해주었는데, 마치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거기에 하윤이는 항상 새벽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역시 하윤이가 유령일지 모른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하윤이를 유령으로 단정짓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내게 하윤이는 만져졌고, 서늘하지만 포근한 감각을 몇 번이나 주었다.
그런 건 유령 따위에게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내가 유일하다니 영광인 걸?'
'..., 그걸 알고 있다니 똑똑한 아저씨네요.'
나는 애써 농담을 던지며, 무겁게 가라앉아 가는 분위기를 가볍게 전환시켰다.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 지 하윤이도 다행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그건 어떻게 아는거야? 가봐야겠다는 거.'
'그냥요...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모래시계처럼 느낄 수 있어요.'
'그렇구나.'
'미안해요. 아저씨.'
뭐가 미안하다는 것이었을까?
이런 자신과 엮이게 해서 그렇다는 것인지, 아니면 함께 더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미안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하윤이의 시간은 다 되었는 지 일방적인 작별을 고해왔다.
'다음에... 또 봐요. 아저씨.'
'기다릴게.'
몸을 돌린 하윤이가 내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그 모습에, 유령이라면 스르륵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멀어져가는 하윤이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회상을 마쳤다.
다시 복기해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얘기들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덤덤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윤이와 했던 대화들, 나를 달래주던 감촉들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이 수수께끼 같은 만남을 풀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슬슬 몸이 으슬해진 나는 베란다 창을 닫고, 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어제의 만남으로 그래도 많은 힌트를 얻었다. 그리고 그 힌트를 쫓기 위해선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
"안녕하세요. 아저씨."
편한 차림으로 자취방을 나선 나는 즉시 편의점에 들렀다.
새벽타임 동안 편의점을 보느라 피곤했는 지, 아저씨는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내 인사에도, 피곤기에 절어 정신을 차리기가 힘든 지 반응이 없었다.
이래서야 도둑맞기 딱 좋은데?
나는 애써 아저씨를 깨우기 보다는 먼저 가게를 둘러보며 살 것을 골라 집어들었다.
편의점에 들른 후에는 아라를 만날 예정이었기에 빈 손으로 갈 순 없었다.
이상한 꿈 때문에, 기껏 나를 초대하여 요리까지 해준 아라의 호의를 무시했던 어제가 생각났다.
그게 불과 어제의 일이라니. 시간이란 정말 상대적인 것이 맞나보다.
하루보다는 훨씬 오래 전의 일인 것만 같은데, 그게 불과 어제 저녁의 일이라니.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밀도가 달라진다는 격언을 몸소 체험한 것 같다.
편의점을 한 바퀴 빙 둘러 보았는데도, 정작 집어든 것은 없고 뭘 살지 고민만 더해졌다.
아라는 커녕 여자들이 무엇을 보통 좋아하는 지 조차도 잘 몰랐다.
나는 10분 정도 고민하다가 박카스 하나, 두부의 간식 거리 몇 개, 그리고 초콜렛을 종류별로 이것저것 집어들었다.
고등학생 시절, 초콜렛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소소한 쇼핑을 마치고, 계산대에 집어든 물건들을 와르르 쏟았다.
아저씨가 아직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쩐지 깨우기가 안쓰러운 모습이지만, 아저씨에게 확인할 것도 있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저씨. 계산이요."
"아 넵! 계산이요."
흔들어서라도 깨울 각오도 했었는데, 각오가 무색하게도 아저씨는 계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기계적으로 바코드기를 집어들었다.
이것이 프로페셔널로서의 삶인가? 그냥 부르면 묵묵부답이더니, 편의점 매출과 관련된 소리는 귀신같이 반응한다.
"허허, 자네였나."
아저씨가 나를 알아보고는 마치 졸았던 적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저씨, 그러기엔 양 눈에 왕눈이만한 눈꼽이 있습니다.
"허허허. 새벽타임에 일하는 건 언제나 힘든 법이지."
이런 내가 너무 왕눈이 눈꼽을 빤히 바라봤나?
아저씨가 자연스럽게 피로를 푸는 척 하며,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로 눈 앞을 꾹꾹 눌러보였다.
덕분에 눈꼽들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아저씨는 능숙하게 바코드를 찍어대며 껄껄 웃었다.
그래도 한숨 푹 잔 저보다, 밤새 일한 아저씨가 힘든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요?
입 안에서 말이 맴돌았지만, 그랬다간 얘기가 삼천포로 빠질 게 틀림 없었다.
"저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으응?"
"안 그래도 새벽에 저를 보셨다고 해서요. 혹시 제가 혼자였나요?"
아저씨는 순간 이 놈이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거지? 같은 표정으로 낯설게 나를 바라봤다.
"그럼 혼자지 둘이었나? 껄껄. 뭐 가끔 자네와 편의점 앞에서 만나는 그..."
설마 하윤이 애긴가?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개 데리고 다니는 예쁜 처자 말이야. 어제 그 아가씨는 없지 않았나?"
아라 얘기였나.
새벽에 편의점 앞에서 하윤이와 노닥거린 게 한 두번이 아니다.
확실히 아저씨는 하윤이를 보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냥 해본 소리에요. 감사합니다."
아저씨는 희한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부지런히 손을 놀려 바코드 계산을 마쳤다.
"이만 팔천 오백원 일세."
"봉투도 부탁드려요."
"이만 팔천 오백 이십원 일세."
이것저것 집긴 했는데, 삼 만원에 육박하는 금액이라니.
나는 카드로 그것들을 계산하며, 봉투에 물건들을 집어넣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게를 나서려는 데, 아저씨가 나를 붙잡았다.
"박카스를 안 가져 갔네만?"
"하하, 아저씨거에요. 너무 피곤해보이셔서..."
"...!"
"그럼, 안녕히계세요."
"자네..! 자네...!"
아저씨가 굉장히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괜히 잡혔다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황급히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아직은 아라 집에 찾아가기에 너무 이른 감이 있어서 집에 있다 가야하 고민이 됐다.
아직 카톡아이디나 전화번호를 몰랐기 때문에 가도 되냐고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근데, 막상 갔는데도 집에 없으면 어쩌지? 난처하다.
"왕!"
그 때 익숙한 목소리, 아니 개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타이밍이 절묘할 수가 있나?
"두부야, 좀 만 천천히...!"
아라를 산책시키는 두부가, 아니 두부를 산책 시키는 아라가 두부에게 질질 끌려오는 것이 보였다.
두부가 멀리서도 나를 알아보았는 지 반갑게 내게 달려왔다.
"어? 세건 오빠?"
거리가 가까워지자 아라가 나를 알아보았다.
"안녕."
"아침에 어쩐 일이에요?"
"그러게. 안 그래도 어떻게 찾아가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운이 좋았네. 이거."
나는 손에 든 봉투를 건넸다.
"이게 뭐에요?"
"어제 기껏 저녁도 해줬는데, 내가 가버렸잖아. 미안해서 좀 샀어."
"아... 몸이 안 좋아서 간건데요. 뭐... 이런 거 안 사주셔도 괜찮은데... 근데 제가 초콜렛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시고..."
아라가 마지못해 봉투를 받아들었다.
슬쩍 내용물을 봤는지,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렛이 담겨 있어 기분이 좋아보였다. 다행이다.
이어서 아라는 봉투 구석에서 두부 간식을 꺼내어 두부에게 주었다.
뭔가 그 날일을 묻기에 좋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근데 두부 찾은 그날 말이야."
"네네."
"그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나?"
"네?"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쎼요. 저를 도와주겠다고 한 건 세건 오빠 뿐 이었는데... 아 이상한 점이 하나 있긴했어요."
"어떤 거?"
"오빠 혼자 뿐이었는데, '저희'가 두부 찾는 걸 도와주겠다고해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구나."
그랬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라의 기억력이 나보다 훨씬 좋은 것 같다.
어쨌거나 아라의 말을 통해 나는 하윤이의 말이 사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애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은 정말 나 뿐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하윤이는 어떻게 그 긴 시간들을 혼자서 버텨낸 걸까?
마음이 시렸다.
어쨌거나 정말 하윤이는 유령인걸까?
편의점 아저씨와 아라의 얘기에도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럴 땐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한 것 같아, 대학생 시절 오컬트 동아리원이었던 친구 녀석에게 도움을 청해두었다.
사실 친구보다는 과동기 정도가 적절한 표현이었다.
오컬트 같은 것에 일도 관심없던 내게 녀석은 그냥 오며가며 인사하는 동기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카톡을 열어 녀석에게 보내두었던 톡을 확인해봤지만, 아직 읽지 않았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어쨌거나 고마워. 가볼게."
나는 아라에게 인사하고, 녀석의 답장이 오기까지 집에서 시간을 떼울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저, 오빠!"
"?"
아라가 나를 불러세웠다.
"괜찮으시면, 같이 산책하지 않으실래요?"
'같이 걸을래요?'
아라의 말에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하윤이가 늘 내게 웃으며 묻던 말을 아라에게서 아침에 들으니 기분이 색달랐다.
어쨌거나 집에 가봐야 시간만 떼울 뿐이어서 나는 흔쾌히 아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10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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