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적부터 책과 게임을 가까이 하던 습관은 외가의 영향이 컸다.
명절이나 제사때면 놀러가던 외삼촌댁은 작은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2층 양옥집이었다. 기억 존재하는 모든 때에 우리집은 아파트였단걸 떠올려본다면, 마당 딸린 주택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곳이었다.
허나 그보다 더 흥미로운 공간은 바로 사촌형들의 방이었다. 큰형과 작은형이 같이 쓰는 그 방에는 늘상 이상한 냄새가 났다. (사춘기가 지나고 내 방에서 그 냄새가 날거라곤 그땐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그 곳엔 내가 가지지 못한 삼국지와 영웅문, 은하영웅전설, 반지의 제왕 같은 소설로 가득했다.
어린나이의 나에게 마당의 감나무와 옥상 텃밭보다야 그쪽이 훨씬 신비로운 세계임은 틀림없었다. 그 덕에 난 삼국지를 알았고 무협과 판타지에 눈을 떴다.
어느샌가 동네 책방에서 난 무협지를 빌리는 큰 손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친구분들의 가족모임으로 여행을 가던 날, 난 책방에서 소설을 한아름 빌렸다.
어차피 내 옷가지는 어머니의 짐에 포함돼 있었고 내 가방엔 책만 넣으면 되었으니 2박3일간 읽을거린 충분했다. 무슨 소설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꽤나 과격한 내용이 있었음은 틀림없다.
지금부터 쓸 이야기는 그 소설과 관련된 쾅! 한 이야기다.
대체 몇 권을 빌려 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건 휴가에서 돌아올 때 까지도 결말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워낙에 많은 권수를 챙겨가기도 했거니와 텐트치고 물놀이 하는데 책 볼 시간이 어디있을까. 콘도나 팬션도 아니고, 어두워진 밤에는 글을 읽을 만한 불빛조차 없었다.
낮엔 물놀이, 밤엔 매운탕과 술. 물론 아이들은 술 마시진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밤엔 떠들고 노느라 바빴다.
그래도 차에서부터 틈틈이 읽어온 책은 두 권째를 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3일차. 텐트를 걷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초등생인 나는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때가 책 읽기에 가장 좋은 시간대였다.
모두가 뒷정리를 하는 와중에 난 작은아빠(친 삼촌은 아니고 아버지의 후배였지만 작은아빠라 불렀다.)의 낚시의자에 앉아 책을 읽어내려갔다. 두 권째를 넘겨 세 권째 책을 집을 때, 어른들은 텐트를 다 걷고 모닥불에 쓰레기를 태우고 있었다.
그 땐 그랬다.
종량제봉투가 있던 시절인지도 모르겠다. 휴가중 발생한 쓰레기를 태워버리는 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모두들 평화로웠다. 이틀간 아이들과 남편들의 놀이를 뒷바라지 했던 어머니들은 탈력감에 지쳐 눈을 붙였다. 아저씨들은 다 정리된 짐을 차에 실은 뒤 타는 쓰레기를 보며 담배를 피웠다. 아이들은 저마다 돌을 하나씩 잡고 물수제비를 튕겼다.
그 길지 않은 시간, 난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한창 재미있어지는 부분이었다.
정확한 지문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주인공과 악당의 전투였던 것 같다.
악당의 마법(무공이었을 수도 있다.)이 주인공을 향하고 주인공은 간발의 차로 이를 피했다. 주인공이 피하고 남은 자리엔 폭발이 일었다.
'쾅!'
쾅!
오타로 두 번 쓴게 아니다.
책의 지문 중 정확히 기억나는 한 글자, '쾅!'을 읽는 순간, 현실에도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전대물의 연출처럼 내 등 뒤로 불길이 치솟았다.
눈을 붙였던 어머니들이 깜짝 놀라 일어나고 아이들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보았다.
쓰레기를 태우던 곳이었다. 아마도 원인은 쓰다남은 부탄가스가 아니었을까.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다만 스무명이 넘는 사람들 중, 놀라지 않은 이는 나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들 가슴을 쓸어내리며 연신 다행이다를 외쳤다.
책을 읽은 덕분에 놀라지 않은 것인지, 폭발 덕분에 책을 더 실감나게 읽은 것인지.
어느 쪽이건 식은땀을 흘릴만한 기억에서 피식할만한 기억으로 바뀌었으니 다행인 일이다.
만일 중2때에 같은 일을 겪었다면 '크큭, 내 손의 흑염룡이 드디어 책을 현실로!'라고 되뇌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았던 것도 다행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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