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내 자취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근거리에 있었지만, 대부분의 졸업생이 그렇듯 나 역시 졸업 후 학교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담는 오후의 캠퍼스 풍경은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방학시즌이어서 그렇기도 했고, 매서훈 혹한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는 보도 끄트머리에 아직 녹지 못해 허옇게 모여있는 눈길의 안내를 따라 동아리 방이 있는 학관 건물로 향했다.
학교가 산을 깍아 만든 탓인지, 꽝꽝 언 산풍이 살벌하게 불어 가는 내내 뺨과 광대를 따갑게 두드렸다.
경사진 길을 간만에 오르려니 숨이 부쳤다.
이런 곳을 4년이나 다녔다니, 내심 내가 대견스러웠다.
오죽하면, 우리 학교 학생들의 체력은 등교가 아닌 등산을 매일 하기 때문이라는 소리가 나왔을까.
"헉. 헉."
살짝 입에서 단내가 돌 때쯤 , 캠퍼스 높이 위치한 학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방학인 탓이라 스산하게 조용할 법도 한데, 방학동안 본가에 안가고 학교에 남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내 예상과는 달리 학관 안에서 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복도나 매점에서, 그리고 어딘가의 동방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신나게 잡담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동아리 활동이라고는 일절 해본 적이 없는 탓에 학관이 무척 낯설었다.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며, 오컬트 동아리방의 위치를 찾아 헤맸다.
다행히도 동방마다 호수가 적힌 표지판이 있어 비교적 빠른 시간 내 오컬트 동아리를 찾을 수 있었다.
- 오컬트 동아리 503호
나는 오컬트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평범한 동아리실 문을 작게 두드렸다.
똑똑.
...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설마 아무도 없는 건가?
과동기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지 않았다.
잠시 바쁜 용무라도 있는 모양이다.
어차피 동방으로 오라고 했으니, 잠시 들어가서 기다린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겠지.
"실례합니다..."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동방 안으로 들어섰다.
평범한 문과는 다르게 내부의 풍경은 여기가 오컬트 덕후들의 모임장소다! 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컴컴한 커튼으로 가려놓은 창가, 심령사진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잔뜩 붙어있는 화이트보드, 책꽂이를 가득 채운 관련 서적들까지.
동방 내부는 난방이 빵빵한 지, 따뜻하다 못해 후덥지근 했다.
나는 그대로 패딩을 입고 있기에는 등에 땀이 날 것 같아, 옷걸이에 입고 있던 패딩을 대충 걸쳐두었다.
"흐음. 생각보다 괜찮네."
동아리방이라 하면, 뭔가 좁고 퀴퀴한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는데 그런 생각을 바꿔주는 훌륭한 동방이었다.
청소를 꽤 자주하는 지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고, 과도한 난방때문에 덥긴했지만 일정 시간마다 자동으로 작동하는 방향제 덕에
좋은 향기가 났다.
아무도 없는 오컬트 동방을 혼자서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이내 화이트보드로 시선이 꽂혔다.
- 심령 또는 유령사진으로 추정되는 것들.
보드 상단에 큼지막한 글씨로 사진들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삐뚤비뚤 보드에 붙어 있는 사진 옆에는 작은 글씨로 각 사진을 설명하는 문구들이 함께 적혀있었다.
4인 가족 사진에 찍힌 5번째 잔상이라던가,
총 인원이 7명인 모임에 7명 전원이 찍힌 사진이라던가,
혼자 방에서 찍은 셀카의 열린 문틈 사이에 보이는 인영이라던가,
다양한 심령사진이 붙어 있었다. 정말 유령인지 귀신인지 모를 것들이 찍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보다보니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어 푹푹찌는 동방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턱.
순간 내 어깨를 잡는 손길이 느껴져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하도 놀라서 비명소리도 안 나온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더워서 난 땀인지 식은 땀인지 모를 땀방울이 볼을 타고 한 방울 흘러내렸다.
"아 뭐야, 선배! 반응 진짜 재미없네."
매끄럽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뒤에서 들려왔다.
사람 소리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돌았다.
"?"
"어라? 누구세요?"
타오르는 듯한 빨간 머리카락과 빨간 눈동자가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여자였다.
염색하고, 서클렌즈라도 낀 건가?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색감이 아니었다.
머리, 눈색만 하더라도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는데도, 모자랐는 지 여자는 얼핏보기에도 엄청난 미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을 홀리는 귀신이거나 여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 그게..."
봐라, 비상식적인 여자의 외모에 내 말문마저 턱하고 막혀버렸다.
TV에서나 보던 여신 같던 연예인들도 이 여자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하지 않을까?
뚫어져라 여자의 얼굴만 쳐다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나는 간신히 평정심을 추스렸다.
"강이훈이라고, 친구 좀 보러 온 사람인데요?"
"그래요?"
그나저나 학교 다닐 때 이런 사람을 어떻게 내가 모를 수 있었지?
알고 싶지 않아도 소문으로 알 수 밖에 없었을 텐데...
"강이훈이요? 이상하다 이 동아리엔 그런 사람이 없는데..."
하도 여자의 말이 자연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정말요?라고 반문할 뻔 했다.
다행스럽게도 절묘한 타이밍에 과동기 강이훈이 등장해 바보 꼴을 면할 수 있었다.
"장난은 거기까지 해. 마유미."
"앗, 들켰다. 헤헤."
나는 여전히 벙찐 표정이었지만, 녀석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하윤이가 생각나는 얄궂고, 장난기 넘치는 여자였다.
초면에 이런 장난이라니.
"하도 진지하게 사진들을 보고 있길래 저도 모르게 그만! 참을 수가 없었어욧!"
마유미라 불린 여자는 제 양 볼을 손으로 잡고 도리질 치며, 고양이처럼 부산을 떨어댔다.
나는 한 번 절레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강이훈에게로 돌렸다.
"오랜만이다. 세건아."
안경을 쓴 귀공자 같은 녀석이 다가와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예나 지금이나 이훈이의 외모는 한결 같았다.
잘 정돈된 귀공자.
생긴 것 만큼은 옆에 있는 마유미라는 여자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오컬트와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러게. 1년 만인가?"
"마지막으로 본 게 1년 쫌 안 됐을거야 아마. 앉자."
강이훈의 말대로였다. 마지막으로 녀석과 봤던 게 1년 살짝 안 됐을 쯤이었던 것 같다.
그마저도 잠시 지나가던 길에 인사를 나눈 것 뿐 이지만.
우리가 오랜만이기도 하고, 평소에도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서 만났을 때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녀석의 살가운 말투 덕분에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아, 이쪽은 한세건이고 내 동기야. 졸업생이지. 그리고 이쪽은 마유미야. 당연하지만 우리 후배지."
강이훈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와 마유미를 통성명 시켰다.
"뭐야, 동기였구나. 난 또 몰래 들어온 도둑인 줄 알았잖아요. 손님이 오면 온다고 미리 말을 했어야죠! 전 회장!"
말은 존댓말인데, 이상하게 호칭은 반말이다.
"전 회장이라고 좀 하지 마라. 그냥 선배라고 불러 제발. 그리고 미리 온다고 말 했잖아. 어디서 몰랐던 척이야?"
"앗. 이것도 들켰네? 헤헤. 하여튼 재미없다니까요. 전 회장'님!'"
베시시 웃으며, 마유미가 '님'자를 강요하며 강이훈의 말을 비꼬았다.
손쉽게 농락당했지만, 늘상 있는 일인지 강이훈은 표정하나 안 변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게 다였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아, 다짜고짜 연락해서 이런 부탁해서 염치 없긴 한데 내 주변에 오컬트 전문가가 너 뿐이더라고."
"그래?"
아부하려는 게 아니고 정말 그렇다. 오컬트 같은 매니악한 분야를 목 마르게 판 사람은 내 주변에 이 녀석 뿐이다.
근데 기분 탓인가? 오컬트 전문가라는 부분에서 어쩐지 강이훈이 헤벌쭉 웃은 것 같은데.
"하긴 오컬트가 워낙 마이너하고, 제대로 깊게 판 사람이 드물지."
녀석이 슬쩍 안경을 들어올리며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역시 내 착각이었나 보다.
"내가 보기에는 전 회장도 그렇게 깊게 판 것 같진 않은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취미라고는 중학교 때부터 한 우물만 파온 나에게?"
"아님 말고요. 거 참 남자가 쪼잔하게."
"쪼잔하다니? 난생 처음듣는 말이군."
"앞으론 많이 듣게 될 걸요?"
"하하하. 아주 재밌는 농담이야. 네가 한 말 중에 제일 재밌는 걸?"
"그래요? 전 회장은 재밌던 적이 없었는데, 노잼유죄! 전 회장 유죄!"
"이익..!"
...
아니다. 착각이 아니었다. 안 친해서 몰랐는 데, 내 친구 살짝 푼수기가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저 마유미라는 여자애가 그 침착하기로 소문 난 강이훈의 페이스도 무너뜨릴 정도로 마이 페이스라는 거겠지.
두사람은 마치 내가 투명인간인 냥 없는 취급하며 열심히 투닥거렸다.
사실 말이 투닥거림이지 항상 발리고, 끝에 분하다는 듯 이익..! 소리를 내는 것은 강이훈이었다.
결국 제 풀에 지친 강이훈이 그제야 내 존재가 새삼 생각났는 지 헛기침을 몇 번 흠흠 해댔다.
"이거 오랜만에 봤는데 추태를 보였군."
알고 있었니?
내가 알던 네가 아니라서 나는 지금 심히 당황스럽다.
"오랜만에 봐서 가끔 추태를 보니 좋겠어요. 전 회장 친구분. 나는 맨날 보는데. 아하핫."
"이익...!"
이래서야 오늘 내 얘기를 진행할 수 있을까?
아이고 두야. 아무래도 내가 잘못 찾아 온 것 같다.
나는 갑자기 지끈 아파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 와중에도 강이훈은 여전히 마유미에게 털리고 있었다.
1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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