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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8 18:08
저는 이러한 평론에 딱히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술작품의 감동이 시대를 거쳐갈 수록 닳아 헤어진다는 시각자체에도 동의할 수 없고요.
반복해서 접하게 되면서 최초의 감동이 덜 느껴지게 된다는 이야기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저는 제 손으로 처음 엘리제를 위하여를 완주했을 때의 감동을 기억하고, 처음으로 전원 1악장을 들었을 때의 감동을 기억합니다. 비록 시간이 지나, 처음 느꼈던 그 감동이 조금은 빛이 바랬을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왜 그 때 그 시절 나의 감동을 두고 소위 평론가라는 이들이 저 따위 막말을 해 대도 인정을 받는 것인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논법대로라면, 인간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만 몇번 이상을 보았을 [노을]의 감동은 왜 닳아 헤어지지 않는다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평론가 당신이 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러라지요. 저는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20/12/28 19:07
인간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만 몇번 이상을 보았을 [노을]의 감동은 왜 닳아 헤어지지 않는다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 개인이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역사적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닳아 헤진다는 것입니다. 노을을 보고 느끼는 감흥은 문명 자체와 - 역사적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성격이 바뀔 수 있는 개개의 문명들이 아니라 - 자연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회에서라도 사회에 대한 불만은 생기기 마련이고 그 불만은 가장 흔히 유토피아적 자연의 이미지 (자연미)를 낳습니다. 그 이미지 중에서도 노을의 이미지는 가장 원초적인 듯 보입니다. 그런데 이건 제 생각이고 아도르노는 어떤 자연미는 초역사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식의 생각을 안 합니다. 예술작품의 경우는 역사적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가 변하면 예술작품이 생산된 사회에서의 문제상황과 문제의식과는 다른 문제상황과 다른 문제의식이 생기게 되고 그것들을 반영하고 그것들에 대응하고 그것들을 표현하는 새로운 예술작품들이 요구됩니다. 어떤 예술작품들은 양파같이 다층적이고 풍부하고 복잡해서 사회가 변하면 겉 껍질에 해당하는 가치가 떨어져나갈뿐 속껍질에 해당하는 새로운 가치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아도르노 자신의 말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역사적 시간의 흐름 = 사회의 역사적 변화]에 따라 가치가 닳아 없어진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생각이고 지난 30여년동안 헤게모니를 쥔 - 문화전쟁에서 승리한 - 좌파 문학예술관련 식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런식의 생각이 타파하고자 한, 전통적인, 어떤 예술작품의 가치는 보편적이고 초역사적이다라는 식의 생각은 흔히, 비아냥 거리른 어투로, '리버럴 휴머니즘적'이라 불립니다.
20/12/28 19:20
그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도르노가 과연 개개인의 감동 역시 계량하여 어느 것은 저급하고, 어느 것은 고급하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유럽의 촌로가 틀에 박힌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고 성호를 긋는 것을 두고, 그는 닳아 문드러진 상징에 감동을 느낄 뿐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요. 아도르노의 감동이 그 촌로의 감동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저는 그의 양심을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름답다는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내밀한 것입니다. 다른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더라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지요. 세상에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 저는 모릅니다만,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개인별로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더]아름다운 것이라는 관념 자체가 고통을 계량화하여 누가 더 고통스러운지를 따지는 올림픽 같은.. 하등 쓸모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까지가 제 생각입니다. 하여, 타인의 감정을 두고 저 따위 말을 하는 이들을 존중하고 싶지도 않고요. 네. 그렇게 말씀하십시오. 저는 무시할테니.
20/12/29 12:48
노을의 감동도 역사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봅니다.
노동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인 세상에서 낮동안은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합니다. 황혼이 찾아오면 이제 이 힘든 시간으로부터 잠시 해방될 수 있기에 노을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노동 종말의 세상에서 태어날 아이들은 더 이상 노을이 아름답지 않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20/12/28 19:09
저는 본문의 내용에 상당부분 동의하는것이
한 시대의 예술 양식은 최고 수준의 예술적 업적을 이뤄내면서 후대에 큰 영향을 주는 예술가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지, 평균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죠. (물론 예술성 없이 영향력만 있으면 그 역시 의미가 없지만) 고전주의가 18세기의 흔하디 흔했던 당대의 무명 작곡가들의 트렌드에 의해 정의되는가 아니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천재들에 의해 정의되는가를 생각해보면 천재의 위대함과 중요성에 대한 가치를 온전히 회복하는것 역시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20/12/28 19:15
여담이지만 제가 예전에 다음에서 헤비메탈(중에서도 쓰레쉬,블랙,데스 등 익스트림 계열)과 클래식만을 듣는 카페지기분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딱 본문과 같은 논조로 베토벤을 조명하는 글을 봤는데 동일인물이 아닌가싶을 정도네요...
20/12/28 19:58
저는 그 카페 영향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도르노보다는 하인리히 쉥커의 이론을 많이 접했었습니다. 베토벤 9번 모노그레프, 화성,대위법,자유작법 등의 쉥커의 저서에서 예술양식이론 정립의 필요성을 역설했었는데 필연적으로 그 과정에서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자주 언급되었으니까요.
20/12/28 21:18
어, 여기서 '실용 오디오' 를 알고 계시는 분을 만나니 반갑네요. 십수년 전 거기 꽤나 들락거렸었는데, 어느 새 점점 안 가게 되었지만요.
나무위키 '오디오필' 항목에서 오디오 관련 사이트에 '두근두근 오디오' 나 '디시 인사이드 - 헤드폰, 이어폰 갤러리' 는 소개되어 있는데, '실용 오디오' 나 '하이파이 클럽' 은 소개되어 있지 않은 점이 아이러니하더군요. 둘 다 두두오 등보다 훨씬 오래된 사이트이면서 진짜배기 고인물들의 서식처일텐데요.
20/12/28 21:26
저는 복잡한 건 잘 모릅니다만, '예술작품들의 위대성은 닳아없어진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네요. 만일 진짜 닳아없어지는 것이고 후대로 갈수록 나중에 나오는 작품에 의해 빛이 바랜다면 벌써 없어졌겠죠. 그리고, 실제로 당대에는 곧잘 연주되다가 현재에는 연주되지 않고 잊혀진 곡이 최소 현재 연주되곤 하는 곡들이 10배는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교향곡이 현재 연주되고 있는 곡이 100 여곡 정도인데, 실제 작곡되었던 곡은 1,000 여곡이 좀 넘는다던가 하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소위 '고전음악' 이라고 하는 것들, 특히 100년 이상 수백년을 살아남아 연주되는 곡들은 세대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각자 생활 환경도 다르고, 그에 따라 생활 방식 및 사고 방식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여러 세대들에게 공감되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죠. 실제로 남아 있는 곡보다 몇 배나 되는 많은 곡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잊혀졌구요. 그게 닳아 없어질 아름다움이나 위대함이었다면 몇 세대, 혹은 열 세대 이상을 거쳐 살아남기는 힘들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 곡이라면 앞으로 상당히 오랜 세월 ─ 어쩌면 인류 멸망의 순간까지 ─ 살아남아 있어서 여전히 그 아름다움과 위대함에 빛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20/12/28 22:19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예술적 가치의 존속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도르노는 많은 오페라 작품들이 예술적 가치가 소멸한 채 공식문화로만 살아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문화 부르주아지들과 국가의 문화정책이 도장찍어주는 것만으로는 - 즉 교과서에 실리고 공립 미술관에 소장되고 자주 공연/방송되는 것만으로는 - 공식문화가 될 수 없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좋게는 고급오락적 가치 나쁘게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라고 봅니다.
아도르노가 수백년, 수천년이 흘러도 예술적 가치가 살아 남아 있는 경우라고 볼만 하거나 보는 예술작품들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들, 셰익스피어의 희비극들, 베토벤의 말기 작품들이 그렇습니다. 그 살아남음은 그 작품들이 생산되었던 사회들과 그 이후의 사회들의 어떤 공통성/연속성, 그 작품들이 다루었던 제재가 그 이후의 사회들에서도 갖는 중요성, 그 작품들이 그 제재를 해석/가공한 결과로서의 그 작품들의 이념적 내용이 그 이후의 사회들에도 가질 수 있는 설득력에 의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생산되었던 사회에서는 주목/경청/간파되지 못했던 어떤 것이 이후 사회들의 감상자들에게 예술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본 글에서의 양파 비유). 그러나 알파님 자신이 얘기하셨듯이 그런 의미에서 살아남는 작품들은 극히 적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살아남는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도 초역사적이지는 않습니다. 그 예술적 가치는 여전히, 사회들의 역사적 연속성 등등 사회역사과학의 텀들로 설명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입니다. 근본적인 역사적 변화가 일어나면 그 예술적 가치들은 닳아없어지고 그 작품들은 망각되거나 사료로만 다뤄지거나 고급오락으로만 즐겨지게 됩니다.
20/12/28 23:06
아도르노의 미학에 많이 배우긴했는데, 오늘날 연주자들이 주목받는 시대에 들어선 지금, 처음 만들어졌을 때 의도가 어떻든 하이든 현악사중주 같은 음악도 위대하다고 이야기 할수 밖에 없다 생각하네요.
그리고 베토벤 후기 현악사중주가 잘 안들린다면 바그너부터 시작해 바르톡까지 귀를 뚫어놓고 다시 한번 도전해보시면 좋을거 같아요. 그래도 별로면 취향차이.
20/12/29 16:01
개념의 상대성을 무시한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케바케인 것을 객관화하는 오류가 아닐까요.
저는 무신론자이고 불교의 명상적 메카니즘을 좋아 합니다. 하지만 며칠 관련 서적을 읽다보면 관심이 사그라들지요. 그래도 몇쳔년간 불교를 탐구하는 스님들을 머저리들이라고 욕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클래식 음악가로서 대중음악은 감동의 지속성이 없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나한테 그런것이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정반대인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대학 교수를 비판하려 한다고 꼭 대학 교수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적어도 비판 대상에 걸맞는 지적 업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요. 베토벤만큼 인류 사상사에 업적을 남긴 인물을 헐뜯는 말을 들어 봤자 시간낭비입니다. 숭배하자는 말이 아니라 잘 알아보고 비판하자는 것이죠. 아난님은 일생동안 베토벤을 연구하는 인간들을 무시하고 싶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피지알에도 클래식 음악인들 있어요.
21/01/01 01:18
역사적인 것을 초역사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강려크 하다는 걸 댓글로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예술의 영도를 내걸었던 아방가르드도, 키치를 혐오했던 모더니스트도, 비판이론의 선구자 아도르노도, 모두가 오늘날에는 평등한 개취의 상대성의 세계좌표의 한 눈금을 차지할 뿐이겠지요. 지금과 같이 역사적인 것은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새로운 예술양식은 나타날 수 없으니 과거의 것을 가져다 쓰기 바쁜것 아니겠습니까. 의도는 다르지만 어쨌든 웹에는 넝마주이가 되어 과거의 것들을 편집증적으로 수집하는 뒤틀린 벤야민주의자들이 넘치는 오늘날, “생산에서 벗어난 시간”조차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온갖 문화산업에 점령당한 걸 보면 아도르노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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