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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29 19:22:22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20세기 초 영국, 일본 그리고 미국의 패권경쟁 (수정됨)

1902년 - 영일동맹 체결
1904년 - 러일전쟁 발발
1910년 - 한일합방
1914년 - 일본, 연합국 편에서 제1차세계대전 참전
1921년 - 영일동맹 폐기 

영일동맹은 대영제국이 역사상 최초로 평시에 맺은 동맹입니다. 1900년대에 이르러 과도하게 팽창한 대영제국은 국력의 한계에 이르렀고, 또 러시아나 독일과 같은 대륙국가들의 부상을 더 이상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은 인도와 중국에서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극동의 신흥국가 일본과 동맹을 맺었고 일본을 영국의 대리자로 내세워 극동지역을 관리하고자 했습니다. 

먼저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할 사실은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영향력과 권익은 절대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애초에 동아시아에 아편전쟁을 통해 최초의 거대한 충격을 안겨다주었던 국가는 영국이었으며, 중국대륙에 조차지를 획득하고 상업유통망을 설계한 것 또한 영국이었습니다. 아울러 중국의 세관업무를 총괄하고 감독한 인물도 로버트 하트라 불린 영국인이었으며, 그는 청나라가 무너질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하였습니다. 한편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중국이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때에도 중국은 영국은행 HSBC를 통해 대출을 받아 지불해야 했죠. 그런데 영국은 이 이권을 혼자 독식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기타 열강에게도 기회를 제공하였고 이를 통해 서구열강은 중국으로부터 각종 철도부설권과 광산 혹은 조자치 등 이권을 획득했습니다. 홀로 중국을 상대하는 것보다 열강과 연합해서 상대하는 게 수월했고, 또 여럿이 이권을 나눠가짐으로써 중국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고, 또 하나의 세력이 이권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이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1853년 이래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지속적으로 수모를 당한 러시아는 중국에서 자국의 권익을 공고히하고자 했고, 1900년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만주지역에 철도권익을 얻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군대를 아예 주둔시키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여 유럽지역과 동아시아지역을 연결하여 자국을 동서물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또 군사력을 효과적으로 투사시킬 수 있는 힘을 얻고자 했죠. 영국입장에 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러시아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가 영일동맹입니다. 

당시 유럽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인종편견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일본이 청일전쟁 당시 보여준 우수한 능력에 감명을 받아 일본을 파트너로 선택했습니다. 또한 일본은 영국 자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또 청일전쟁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영국은행에 예치하는 등 영국과 대단히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습니다. 러시아 발틱함대를 적극적으로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규모 자금도 공급해주었습니다. 또 조선에서 일본의 "특수한 권익"을 보장하면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사실상 인정하였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우려는 당시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또한 공유하고 있던 인식으로, 그 또한 일본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자 했습니다. 그는 문호개방정책을 펼치면서 중국과 만주에 대한 이권이 어떤 한 세력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로 필리핀을 획득한 미국 입장에서 필리핀의 안정화는 무엇보다 급선무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의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묵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당시 미국을 상대로 항쟁을 벌이던 필리핀의 투사들은 일본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일본정부는 당연 이를 묵살해버렸죠. 한편 뉴욕의 은행가들 또한 일본에 막대한 전비를 대출해주면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도록 지원한 것도 일본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황인종 국가 일본이 백인종 국가 러시아에게 승리하자 전 세계가 놀랐고, 일본이 열강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영국의 요청으로 일본은 영일동맹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물론 자국이익을 위해) 참전하였고, 당시 독일 지배하에 있던 중국 칭다오를 점령하고, 또 동아시아 제1의 해군을 활용하여 당시 독일령 서태평양 제도를 점령했습니다. 또 지중해에 구축함을 파견하기도 했고 호주 병력이 유럽에 안전히 수송될 수 있도록 호위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사실 영국 입장에서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사항이라 일본에 유럽전선에 50만대군 파병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유럽전선에서 피흘릴 생각은 단 1도 없었고, 홍보역할에 치중했습니다. 사실 피를 흘린건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이었는데, 신해혁명 이후 수립된 중화민국은 열강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참전을 선언하고 10만명의 노동자를 유럽전선에 파견하였습니다. 이들은 참호를 건설하고, 지뢰를 제거하고, 또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데 투입되었고 1만명에서 2만명 가량이 희생되었다고 전해집니다. 

1918년 결국 독일이 항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고 일본은 전승국으로 파리 강회회의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5대열강(The Five Great Powers)으로 인정되어 전례없는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됩니다. 일본은 새로 창설된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이 되었으며, 유일한 유색인종 열강으로 발언권을 획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불만을 누린 국가가 하나 있었습니다. 

미국이었습니다. 

1917년 뒤늦게 참전한 미국은 전세의 판도를 역전시킬만한 힘을 보유한 국가로 성장하였고, 미국은 연합국의 가장 중요한 돈줄이었습니다. 전세계의 채권자였던 대영제국은 미국의 최대채무자가 되었고, 그 결과 미국이 대영제국을 대신하여 전세계의 최대채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은 흔히들 말하는 "고립주의 성향"이 전혀 아니었고 진실로 세계질서를 뒤흔들고자 했던 야심이 있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미국은 한편 동아시아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이 있었고, 특히 중국에서의 기회의 균등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그 기회의 균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실 세계대전으로 유럽열강들이 모두 유럽전선에 집중하자 일본은 이를 기회 삼아 중국에 이른바 21개조 요구를 내밀면서 반강제적으로 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는 모든 열강을 경악시켰습니다. 21개조 요구란 일본이 만주와 산둥반도에서 얻은 권익의 영구화를 목적으로 한 요구인데 비밀조항으로 중국정부의 정치, 재정, 군사에 일본인 고문 배치, 경찰에 일본인을 배치하고 또 일본과 합작병기창을 설립하고 중국 남부의 철도부설권을 넘기는 등의 조항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열강이 경악한 것은 만주와 산둥반도의 권익이 아닌 비밀조항 때문이었는데, 수세에 몰린 당시 중국정부가 비밀조항을 의도적으로 흘려서 열강이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주미일본대사에게 비밀조항이 사실이냐고 추궁했었는데 당시 일본대사는 "그런 조항 없다"고 답했고, 사실을 알고 있던 미국정부는 이를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결국 열강의 압력으로 일본은 비밀조항을 철회하였고, 만주와 산둥반도에서의 이권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1919년 베르사유 회의에서 중국이 강력히 반발하는 가운데 영국, 프랑스는 일본의 권익을 인정하였고 일본은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일본 입장에서 중국을 상대로 21개조 요구를 들이밀 수밖에 없었던 (?) 이유는 러일전쟁의 결과로 얻은 만주권익이 "시한부 권익"이었다는 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주가 여전히 명목상 중국의 주권 하에 있는 상태에서 철도에 대한 이권이 1920년대 부로 종료될 예정이었고, 일본은 이를 연장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수만명의 장병과 막대한 전비를 희생한 일본 입장에서 어렵게 얻은 이권을 중국에 다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만주와 중국시장에 마찬가지로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미국은 이를 대단히 불만족스럽게 생각했고, 특히 일본이 서태평양제도를 신탁통치 형식으로 보유한 것에 대해 큰 불만을 품었습니다. 

미국의 한 언론은 일본이 사실상 태평양 전체에 대한 제해권을 확보했다고 평가했으며, 미국의 관료들은 필리핀과 하와이의 안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이 일본에 대해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었고, 행여나 영일동맹이 미국을 겨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품게 되었습니다. 

이에 1920-1921년에 이르면 미국 국무부 내에서 일본에 대한 강경한 입장이 공식 입장으로 채택되게 됩니다. 

당시 국무부 내 일본전문가 E.L. Neville은 일본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일본은 중국을 지배하고자 한다. 21개조 요구가 그 증거이다. 일본은 팽창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이며 이는 우리 예상을 상회한다. 일본은 중국영토와 중국의 자원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독점하고자 하며,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Asia for the Asiatics)를 만들고자 한다. 일본단체 흑룡회가 그 증거 중 하나이다. 일본은 중국본토, 혹은 시베리아도 지배하에 두고자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산업발전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오직 더 우월한 무력에만 복종할 것이다. 극동에서 러시아가 몰락한 이래 일본을 맞설 수 있는 다른 나라는 현재 없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국무장관 Charles Evan Hughes는 동의하였으며 영국을 상대로 강한 압력을 넣기 시작합니다. 

사실 영국은 1920년-21년 당시 영일동맹 갱신 관련 비교적 긍정적인 입장이었다고 하는데, 미국은 주미영국대사에게 대단히 강경한 입장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영일동맹의 갱신은 미국을 표적으로 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소. 그리고 이의 갱신은 일본 제국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만 낳을 것이오"

미국의 국무장관이 분명한 어조로 강한 워딩을 써가면서 경고한 것으로 주미영국대사는 크게 놀라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나는 그와 같은 흥분된 언사를 본 적이 없소이다. 이런 언사는 정신병동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오"

특히 당시 미국은 대영제국의 최대 채권자로, 영국을 파산시킬 수 있는 힘을 보유하였고 또 미국의 산업능력 또한 이미 영국의 몇배를 상회하여 마음만 먹으면 영국을 상대로 무제한 군비경쟁을 추진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에 당시 영국은 미국의 분노를 초래하여 파산하거나 혹은 군비경쟁을 하게 되느니 차라리 영일동맹을 폐기하고 그 대가로 다른 형태의 조약을 맺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워싱턴체제(Washington Treaty System)입니다. 이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사이에 맺은 4개국 조약이었고, 또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9개국 조약이었습니다. 

4개국 조약은 당대 4대 해군강국 간의 해군전력의 비율을 규정하여 맺어진 군축조약이었고
9개국 조약은 중국대륙에서의 현상유지를 9개 국가가 보장하는 형태의 조약이었습니다. 

미국은 영국에게 해군분야를 양보하는 선에서 타협하였고 영국은 그 대신 영일동맹을 파기하였습니다.
그리고 9개국 조약으로 일본은 만주에서 권익을 일단 암묵적으로 인정받았고, 그 대신 산둥반도의 주권은 중국에 되돌려줍니다. 

여러모로 일본에게 불리한 조약이었으나 어쨌든 일본은 만주개발을 위해 여전히 미국과 영국의 자본이 필요했고, 특히 석유와 같은 자원은 미국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대립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뼈아픈 것은 영일동맹의 폐기였고, 이로써 일본은 서구와 멀어지고 오히려 대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한편 미국이 20세기의 절대강자임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런던이나 파리가 아니라 워싱턴에서 국제정치의 구조가 결정되는 기념비적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출처: Walter LaFeber, The Clash: US-Japan relations throughout history 1853~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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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도사
20/12/29 20:19
수정 아이콘
요즘에 세계사에 관심이 많아졌는데 이런 글 보면 뭔가 더 배워가는 느낌이 듭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훈수둘팔자
20/12/29 20:34
수정 아이콘
(수정됨) 일본이 '귀축영미' 를 외치기 시작했던게 미국이야 그렇다 쳐도 저 당시 영일동맹이 끝나고 나서
영국에 대한 배신감(?)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metaljet
20/12/29 21:15
수정 아이콘
영일동맹은 러시아라는 공동의적이 없어진 1910년부터 이미 삐걱거렸을걸요..특히 호주 뉴질랜드는 일본 함선들이 동맹이랍시고 자꾸 안마당에 출몰하니까 이거 재고하지 않으면 우리가 직접 전함 만들겠다 계속 난리쳤던걸로..
사딸라
20/12/30 10:23
수정 아이콘
(수정됨) 미국이 비밀리에 영국과 전쟁을 벌이는 시나리오를 연구한 이유가 있었군요.

만일 영국이 일본과의 '의리'를 생각하며 미국과 대립각을 세웠다면 세계 역사는 과연 어떻게 흘러 갔을까요.

그리고 일본을 대적할 가장 중요한 강대국은 결국 미국이라는 걸 간파한 이승만의 혜안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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